♣복음말씀의 향기♣ No3380
1월24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3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0xRceXbDSM (최진묵 리카르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우리에게는 양들을 향한 사랑에 깊이 빠지고 미친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이 친척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걱정들이 대단했습니다.
뭘 보고 미쳤다고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 민족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 규정을 깨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전수되어온 정결례를 개무시하고 있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고 다니고 있다. 저러다가 분명 제 명대로 못살 것이다. 미친 것이 맞다.’
아직도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신원 파악을 하지 못한 친척들 역시 미쳤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냥 저대로 뒀다가는 친척 예수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강제로라도 데려와 집에 가두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미친 것이 맞습니다. 미치긴 미쳤는데, 사랑에 미쳤습니다. 세상의 기준, 세상의 잣대로 바라볼 때, 예수님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심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투자란 단1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모든 에너지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쏟아부었습니다. 예수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우리 인간의 행복과 구원, 영원한 생명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미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열렬한 사랑에 미쳤습니다. 당신의 모상인 우리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 미쳤습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의 아버지 돈보스코 역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탁월했던 돈보스코는 서품 직후 여기저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좋은 본당에서, 병원 원목실에서, 학교에서...
그러나 돈보스코는 좋은 제안들을 다 거절하고 토리노 뒷골목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거부당하고,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친구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유능해보이는 젊은 사제가 본당에 있지 않고, 사고뭉치 뒷골목 청소년들과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 위험해 보이는 수많은 아이들의 우두머리처럼 행세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돈보스코 역시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미쳤습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그들에게 미쳤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목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자기 자신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양들에게 깊이 빠져,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께서 그런 모습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
<(2) 보다 매력적인 존재, 사랑스런 존재, 세파에 지친 세상의 나그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사목자!>
오늘 우리는 참으로 특별한 성인 한 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품위 있고 매력적인 사랑과 온유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사목자이다 보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발길 닿는 곳마다 그분께 흠뻑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과 군중이 몰려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그분께 가까이 가려고 경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그분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눈물까지 흘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우리 사목자들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계시는가? 자문해봅니다. 급격히 침몰해가는 우리 교회가 회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우리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그런 사목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연히 한 유명 가수의 일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수가 주도하는 콘서트 장소에는 수천·수만의, 군중이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동원되어 오거나, 억지로 와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멋진 가수는 멋진 노래들과 퍼포먼스로 콘서트장을 감동의 도가니요,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팬클럽 회원들은 한마음 한 몸이 되어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팬들의 눈은 마치 꿀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했고, 천국에라도 와 있는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분위기를 이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우리 교회의 지상 최대의 잔치인 미사는 저렇게 되지 않는 건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그 멋진 가수는 경호원, 안무팀, 연주팀, 무대팀 등 수많은 스탭들과 만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더군요. 수정하고 보완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감사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우리 교회의 대잔치인 성체성사도 전례 차원에서, 성가 차원에서, 말씀 선포 차원에서 더 세심하게 고민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제네바의 주교 시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샹딸 수녀를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있지도 않은 추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트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그 어떤 법적 대처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기도만 하셨습니다. 엄청난 모욕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심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장본인인 벨레라는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저를 음해해서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신다지요? 제가 그 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변호사님이 제 눈 하나를 멍들게 한다든지 뽑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나머지 한쪽 눈을 가지고 여전히 선생을 기쁘게 바라볼 것입니다.”
매력적인 사목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축일을 맞아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매력적인 존재, 사랑스런 존재, 세파에 지친 세상의 나그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사목자로 거듭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caFp0gMRWY
++++++++++++++++++
<(1) 그리스도인의 사랑법: 하느님의 유전자를 볼 줄 알아야!>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고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물론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따른 사람이 없기에 성모님만큼 완전한 그리스도의 가족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겐 핏줄보다 강한 가족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그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발견함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려면 예수님의 이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형제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있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 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었기에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서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사내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형은 왜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일까요? 부모가 같다는 이유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없어도 부모에게 효도하려 합니다. 받은 것이 있기에 나오는 의무감입니다. 이것이 형제간의 사랑을 만들고 가족을 만듭니다. 형은 사실 동생 안에서 부모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형이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은 없습니다. 형제들은 형제 안에서 부모의 유전자만 발견이 되면 이렇듯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유전자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우리 아버지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또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면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말 나의 형제요 자매로 생각하고 부르는 것일까요? 어쩌면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양식을 통해 들어옵니다. 양식을 함께 먹으면 식구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당 형제자매들이 혈육의 형제자매보다 덜 형제자매 같다면 어쩌면 우리는 양식을 제대로 먹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 곧 말씀과 성체는 우리가 같은 유전자(DNA)를 지닌 형제들임을 확증해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처럼이 아닌 가족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 ‘과속 스캔들’(2008)은 잘나가던 서른여섯 은퇴한 아이돌 스타에게 스물두 살 딸, 그리고 그녀에게서 난 여섯 살 손자가 함께 찾아오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습니다. 차태현은 아직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자, 청취율 1위의 인기 라디오 DJ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10대에 사고를 쳐서 자녀가 있고 이미 할아버지라 한다면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는 딸과 손자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잃을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 친자가 확실한 이상 자기가 살겠다고 딸과 손자를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인기를 포기하고 결국은 가족을 선택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들의 DNA가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차태현도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컸기 때문에 부모의 뜻이 그 안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양심상 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서로 싸운다는 말은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서로 같은 DNA를 부모로부터 받았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부모까지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의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처럼 지내려 노력하지 말고, 가족임을 인정합시다. 한 아버지를 둔 우리들은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고 그래서 부모가 되신 하느님의 뜻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힘으로는 생겨나지 않던 사랑의 감정이 생깁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 혹은 하느님의 유전자,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온전한 사랑이 실천 되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사람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유전자를 지닌 것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보스톤 해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갈매기들이 금방 친구를 알아채고 그의 발아래 모여들었습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용감하게도 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하였습니다.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고급 요리를 그야말로 마음껏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매일의 이 광경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화를 내며 “비싼 새우를 새들에게 낭비하다니 너무하다.”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사실 그 노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뢰를 발사하여 그의 배를 격침시켰습니다. 이에 그와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구명정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의 어려움을 당하며 몇 날을 보내었습니다.
부하들은 한 명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장군을 비롯한 몇 명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장군도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굶주림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순간 바로 옆에 작은 흰 물체가 안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갈매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을 천천히 뻗쳐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그 갈매기는 몇 시간 수명을 더 연장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고 그 몇 시간은 그가 섬을 발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섬에서 안전을 찾고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자 사람들을 보스톤의 갈매기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 장군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 막달레나로 알려져 있는 한 여인이 2천만 원에 달하는 향유를 깨서 예수님께 발라드릴 때 유다는 그것이 아까워서 화를 냅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초에 루치펠이라는 대천사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에 화가 나서 하느님께 반란을 일으켜 사탄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잘 해 주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보스톤에서 갈매기에게 비싼 새우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갈매기에게 귀한 것들을 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받기만 하면서 그만한 보답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 묵상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당시 아일랜드에 사셨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저에게 해 주신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면, 혹은 모르는 사람이 청한 것이었다면 공부하는 중에 인터넷에 매일같이 묵상글을 올릴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올리기 시작하였지만, 사실 그분들께 감사한 것이 있어서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까지 하시고 죽을 라자로까지도 살리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이를 살리는 권능을 아버지께 청해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청해도 저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따르신 분이고 저는 한 명의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그리스도를 시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아멘!’으로 따르셨기 때문에, 그만한 청을 해도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고위층 유다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물론 그는 진흙이 발라진채로 실로암으로 뛰어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임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그를 설득시키려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이렇게 말하며 끝까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죄 없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9,31.3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청이나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성녀 제르뚜르다에게 누가 와서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제르뚜르다는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녀의 기도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도 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누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느냐 안 들어주시느냐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분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의 첫 기적을 얻어낸 것입니다. 성모님 외에 누가 그 기적을 얻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성모님 외에 감히 ‘불필요한데도’ 남의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없으니 기적으로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당당하게’ 청할만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성모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당당하게’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하시며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당신에게 그 정도도 못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첫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모님을 비하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시고 일부 그리스도교 교파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보는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큼 확실히 성모님을 들어 높이는 복음도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평가는 바로 하느님께 청한 것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께 청해서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성모님만이 온전히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 합당하게 불릴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당신은 모든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을 따라올 여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분이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한다면, 또한 그리스도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성모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청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학생 때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환자 마을로 봉사를 갔을 때입니다. 친구는 그곳 아이들에게 자기가 만든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겨울이니 어느덧 40년이 지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노랫말과 멜로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오늘은 그 노랫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던 즐거운 일요일에/ 우리 사랑 영원하라 주님께 기도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마저도/ 우리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곳으로/ 이 세상에 너보다 어여쁜 이 있다면/ 이 세상에 너보다 사랑한 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다 거짓말이야/ 어여쁜 너 어여쁜 너 나의 천사여” 노래의 제목은 ‘나의 천사여’입니다. 유안진 선생님은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의 허물도 모두 예뻐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허물이 크고, 늘 죄를 짓고 살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023년을 시작하면서 저도 ‘천사’를 몇 번 만났습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께서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덕분에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로 시작한 2023년은 주님의 축복이 함께할 것 같습니다. 새벽 5시에 무덤성당으로 조배를 갔습니다. 미사를 예약하지 못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천사 같은 수녀님이 부활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미사를 봉헌하는데 순례 온 한 교우분이 미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의 몸가짐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덤으로 미사를 봉헌한 네 명의 사제들의 사진도 찍어 주었습니다. 주님공현 대축일을 앞둔 화요일에 베들레헴 주님 탄생 성당으로 순례를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현지에 사는 한 형제님이 친절하게도 주님의 탄생 성당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고, 경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4박 5일의 짧은 성지순례였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 덕분에 감사하고 은총이 충만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저 역시도 이웃을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천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에는 2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태조, 한글을 창제한 세종,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정조, 나라의 문을 닫아야 했던 고종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존경받는 왕은 세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방, 과학, 문학, 외교, 예술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글의 창제는 세종의 가장 빛나는 업적입니다. 한글은 그 만든 목적이 유일한 문자이며, 창제의 원리가 전해지는 유일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창제원리는 우리가 인터넷 강국이 되는 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들의 고충을 이해했고, 백성들에게 문자를 선물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입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나의 욕망과 나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내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세포는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세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양분을 나누지 못하는 세포는 ‘암’세포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틀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새해에는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의 것들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2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가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의 가족에 분명히 포함하셨다. 사람들이 당신께 알려준 사적이고 개인적인 혈연관계로서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마리아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또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을 앞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혈육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 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세례를 받았다는 기억만으로 그리스도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종교가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질문을 바꿔서, 예수님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지만 세례를 받았다는 기억만으로 믿는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고,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안 믿는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실제로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더라도 자기 종교가 그리스도교이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대답한 것을 더 높이 평가하실까? 아니면 자기의 실제 생활 그대로 종교가 없고 안 믿는다고 말하는 솔직함을 더 높이 평가하실까? 아니면,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도 자기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꾸짖으시고,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종교와 신앙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배교’ 라고 꾸짖으실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신앙고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는 다음 말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신앙고백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두 가지를 합해서 “신앙고백은 ‘삶의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의 두 사람은,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복잡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는 종교도 없고 신앙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인들보다 더 훌륭하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종교와 신앙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무신론자들이나 비신자들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실제 삶은 신앙인들보다 훌륭하고 거룩하지만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사람과 신앙인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고백하지만 실제 삶은 무신론자들보다 못한 사람의 심판은 어떻게 될까? 하느님(예수님)께서는 고백에 초점을 맞춰서 심판하실까? 아니면 삶에 초점을 맞춰서 심판하실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문제는 “무신론자였지만 거룩하게 살았던 사람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될까?”가 아니라, “나는(우리는) 어떤 심판을 받게 될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누가’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어떻게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냐?”, 또는 “나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인데,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은, 앞에서 이미 인용한,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께서 ‘신앙고백’ 여부와 상관없이 ‘실행’만 강조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믿음을 고백하는 일’과 ‘믿음을 실행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면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삶이 따르지 않으면 그 고백은 거짓 고백이 됩니다.
동시에 신앙인답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신앙고백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에,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닌데도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감추면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일이고(마태 5,15), 신앙생활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라고 주장하는데(요한 8,41),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악마의 자식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한 8,44)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막 산다면, 그것은 악마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과 같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다.”라고 주장할 자격을 잃는 것이고, ‘악마의 자식’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고백'과 ‘믿음’과 ‘사랑’과 ‘계명 실천’은 하나이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때에만 ‘진짜’가 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의 일생에 대하여 전하는 바가 거의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일찍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복음이 “어머니와 형제들”만을 언급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마치 당시의 신앙인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일하신 아버지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마르 14,36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포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관계입니다. 가족이 중시되고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이 강조됩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혈통을 가진 이들은 한 마을에 모여 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자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새 기준입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혈통이나 민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십자가라는 나무토막을 던져보세요>
오늘 복음은 마치 예수님이 불효자식 같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 하고"(마르 3,22) 악의적인 소문을 내자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섰습니다.
많은 군중들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밖에 와 서서 예수님을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둘러앉은 군중이 전하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하고 반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자기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참된 가족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가족들에게는 어쩌면 섭섭하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의 의도는 혈연에 따른 가족과 절연하겠다는 의사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참 가족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늘상 우리에게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드러나는 태도로써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십자가와 부활도 믿지 않는 비신자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어려움에 불평하고 불만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물론 피해지지 않지요. 그것이 사람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오히려 그 시련이 은총이요, 자기 성숙의 계기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주어진 삶의 무게,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프란시스코 성인이 고향에 있을 때,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시스코 성인은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하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도련님, 제가 물을 퍼 올릴 때 이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반 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이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코 성인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후에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네.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나무토막을 던져보게나. 그러면 곧 마음의 물통이 안정될 걸세."
그렇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편지처럼 두려움과 고통, 절망으로 출렁거리는 마음의 동요를 십자가라는 나무토막을 넣음으로써 진정시킬 수가 있고 부활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의 이웃을 위해서 고통스럽지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형제자매 여러분!" 하고 호칭합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시련과 아픔을 예수님께서 지셨듯이, 삶이 주는 여러 시련들을 은총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부활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모두 한 가족임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질 때,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말씀에 머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요한 사도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맞아들일 것을 부탁하실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입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의미의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생각에 그를 붙잡으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으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군중이 함께 있는 곳, 즉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머뭅니다.
하느님의 말씀 바깥에 있으므로 당연히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본당 공동체에 가든지 그곳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선행과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사이에서 가끔 불협화음이 들려오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하느님 말씀의 바깥에 머물러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같이 그들 중 누군가가, 아니면 모두가 봉사의 근본을 하느님의 말씀에 두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이 함께할 때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 실행할 수 있고, 말씀에 충실히 머물 때 한 가족이 되어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의 새로운 가족>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집(3,20)에서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모여든 군중을 가르치시고, 돌보시는 동안에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나섰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정면으로 예수와 맞섰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파리의 신)이나 다른 더러운 악령에게 사로잡혔거나,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구마기적을 행한다고 비방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방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3,29)고 못을 박았다. 이는 곧 예수께서 모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제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집 앞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및 그리스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고 한다.
이 점을 무시하면 성모 마리아에 관한 ’평생동정교리(平生童貞敎理)’에 하자가 발생한다. 아무튼 예수를 만나려 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려고 찾아 나선 바로 그 친척들을(3,21) 말하는 것인가?
이 대목은 정확히 말하기가 힘든 부분이다. 형제들만 왔다면 몰라도 예수의 어머니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그 친척들과 오늘의 가족들은 별개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전자(前者)가 맞다면 예수가 미쳤다거나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러 찾아 나선 예수의 친척들 중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후자(後者)를 따르자면 왜 갑자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타나 예수를 만나려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묻다보면 결국은 예수가 미쳤다는 생각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를 걱정하여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예수께서는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신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말이 나왔으니 예수는 사실상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본의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신도 하느님을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신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관계를 허물어버리셨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되었다. 그 소속기준은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곁에 그분의 가족>
마르코 3,31-35 (예수님의 참가족)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분 곁에 그분의 가족>
그분 곁에
그분의 가족
그분의 마음 곁에
그분의 마음을 닮은
그분의 가족
그분의 뜻 곁에
그분의 뜻을 따르는
그분의 가족
그분의 눈길 곁에
그분의 눈길을 보내는
그분의 가족
그분의 손길 곁에
그분의 손길을 내미는
그분의 가족
그분의 삶 곁에
그분의 삶을 사는
그분의 가족
그분 곁에
그분의 가족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평생 살아가면서 200번 정도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또 50번은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극도의 혐오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바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도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부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은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 항상 결점을 없애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전우로 여기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짊어집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신이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혜롭고 완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요구하는 삶이 아닌,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내게 요구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마르 3,22).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친인척이 찾아왔으니 다른 것을 다 뒤로 하고 먼저 만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육체적으로도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나요?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
오늘 복음을 보며 저 자신을 크게 반성합니다. 특히 저의 신원 의식에 대해 크게 반성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과연 예수님의 형제요 어머니인지 반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머니 마리아도 당신도 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분들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하며 하느님 말씀을 그 자리에서 걷어차지 않고 주님의 종이니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주님도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라는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당신 사명으로 삼으셨고 그래서 아버지 뜻이 당신 뜻이었지요.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신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당신 뜻이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런 일을 하셨고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마리아와 주님과 저를 비교할 때 저도 말로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프란치스코의 말을 인용하여 자주 떠들어대고 있고, 또 매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라고 주문 외듯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신의 뜻은 당신이 알아서 이루시라고 하는 것이지, 여기엔 예수님처럼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들이 되려는, 아들은 못 되어도 도구는 되려는 의지와 진정성이 없습니다.
저는 인사이동과 같이 굵직한 일에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지만,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할 때는, 예를 들어 반찬을 먹거나 물을 먹을 때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아무 생각 없이 저 좋을 대로 먹고 마십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저는 주님처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만 하느님은 진정 나의 아버지라는 의식이 없거나 약한 것이고,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기도에 앞서 주님의 어머니라는 신원 의식,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을 뼈아프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회개, 비움, 친교, 섬김-
"주님, 제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제 넋이 당신을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26,9ㄱ)
아침성무일도중 이사야서 찬미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제 설날 연휴에 우리 수도형제들은 ‘영웅’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후에 수도형제들의 표정을 얼핏보니 흡사 단체피정한 분위기 같았습니다. 얼마전 ‘탄생’과 ‘영웅’을 영화를 본 제 느낌 역시 ‘성지순례’한 또는 ‘대피정’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으로 강렬한 ‘회개의 표지’와도 같은 영화 작품이었습니다.
어제처럼 저녁9시 늦게 취침하기는 처음입니다. 다음날 12:30분쯤 기상하기에 늦어도 오후8:30분에는 취침하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 경남 진주의 의인義人, ‘어른 김장하’ 2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후부터 틈틈이 1부에 이어 2부까지 다봤습니다.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1944년 생이니 저보다 5년 연상이니 거의 동시대분입니다. 또 많은 분들에게 동영상 보기를 권하기도 처음입니다. 흡사 상쾌한 숲속을 산책한 느낌이었습니다. 산소같은, 나무같은, 산같은 참 좋은 사람,진인眞人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닮고 싶은, 존경할 만한 분이었습니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현 시국時局 삶의 하늘이 흡사 짙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하더라도 일시적 현상으로 얼마 지나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니 지극한 인내로 참고 기다리며 부단한 기도와 분투의 선한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호흡을 길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푸른 하늘을 가린 어둠의 구름들 오래 가지 않고 곧 지나갈 것이라는 이런 믿음이, 희망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구원합니다.
동영상 내용중 “장학금을 받았는데 특별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하다”는 제자의 말에,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어른의 말씀도 감동적이었고 곳곳에 심금을 울리는 말도 내용도 많습니다. 이웃들의 증언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하루 삼식三食은 “놈”, 이식二食은 “님”, 일식一食은 “양반”이란 유머에 웃었습니다. 선생은 자신을 세끼 차려주는 음식을 먹는 삼식이라 했습니다. 또 김장하 선생은 “결이 다른 사람이다” 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시종일관한 김장하 선생의 한 생애였으니 세례 유무를 떠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예수님의 참 형제임을 깨답습니다. 이분 또한 강렬한 회개의 표지가 되는 인물입니다. 세례 받아 명시적으로 가톨릭신자가 아니되었더라도 이렇게 사심없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예수님을 닮은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의 참 형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피정와서 면담고백성사를 본 열심한 자매가 제 ‘행복기도’를 나누고 싶다 하기에 수백장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참 좋은 깨달음 덕분에 행복기도 처음에 ‘참회합니다’를 넣었습니다. 제 행복기도를 바치는 분들은 꼭 다음처럼 맨앞에 반드시 ‘참회합니다’를 넣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참가족에 속한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하느님의 자녀가,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희망,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반드시 맨처음에 ‘참회합니다’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 첫 일성도 회개하라 였고, 미사도 자비의 참회송으로 시작합니다. 영성생활도 ‘회개(메타노니아)-비움(케노시스)-친교(코이노니아)-섬김(디아코니아)’의 순서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주신 예수님의 응답 말씀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의 울림을 주는 생명과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어디에 있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마리아 성모님을 격하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최고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역시 빛나는 예수님의 참 형제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성인의 생애가 참 화려하며 파란만장합니다. 참으로 모든 좋은 자질을 지닌 성인으로 ‘개신교의 로마’라 일컫는 악조건의 종교개혁의 본산지 제네바 교구장의 재임중 활약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설립자인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의 영적우정도 널리 알려진 미담입니다. 성인은 1662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같은 교황에 의해 1665년 시성되었으며,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고, 192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고전에 속하는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란 책도 저술하셨습니다. 특히 ‘신심생활입문’은 ‘준주성범’과 더불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양대 권장 도서에 속합니다. 성인은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를 받고 만55세에 선종합니다. 바로 다음 마지막 감동적 임종어가 예수님의 참 형제였음을 입증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 예수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
그대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은혜롭고 감동적인 대목 둘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대로,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 유익하고 감동적인 강론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 실행한 하느님의 뜻 자체인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강론의 요지 셋이 아주 분명합니다.
1.하느님의 말씀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The Word of God is for everyone).
2.하느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참회를 요구한다(The Word of God calls everyone to conversion).
3.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선포자로 만든다(The Word of God makes us heralds).
얼마나 은혜로운 요약인지요!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한 분이요, 부단한 참회를 요구하는 분이요, 우리를 복음 선포자로 만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과 예닮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여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순종하여 실행할 때 비로소 우리 모두 참으로 ‘결이 다른’, 예수님과 ‘결이 같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됨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큰 기쁨도 행복도 없을 것이며 우리 삶의 모두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예수님과 깊은 우정의 형제자매들로 살게 해 주십니다.
"너희는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이사26,4).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하느님의 형제 자매들이 되자!>
오늘 복음(마르3,31-35)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만나고 싶어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소식을 알려드리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34-35) '예수님의 참가족'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이들은 '모든 것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10,7)
효성스러운 자녀는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사람,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효성스러운 자녀이십니다. 우리 죄에 대한 희생 제물이요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이 뜻을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효성스런 자녀들인, 하느님 아버지의 형제 자매들이 됩시다!
우리가 실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서로를 위해 내가 먼저 죽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KWlPzCvSUko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모든 뜻에는
실천이 따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어디를 향해
우리들의 관계는
가고 있는 지를
묻게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관계로
나가야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현실속에서
적용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관계조차도
하느님의 뜻과
실천안에서
서로의 길을 충실히
가게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빠져있거나
하느님의 뜻을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오히려 가장 가까운 관계가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는
관계의 집착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관계를 풍요롭게
맺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관계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안으로
초대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실행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뜻은
더욱 힘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실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혈육을 뛰어넘는
이타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지금 이순간임을
믿고 따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