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을 만난 것은 <로마의 휴일>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였다고 문화일보 1996년 10월 21일자 32면에 ‘고객과 함께 하는 세계로 미래로-삼성’이 전면 이미지 광고를 냈다
흰머리 쭈그렁탱이 할머니가 아프리카나 어느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인간 막대기를 안고 세상을 슬프게 응시하고 있다.
영풍문고판 48쪽에 실린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몸매로 번 재산을 기아의 아가리에 털어 놓고서야 천사가 되다니 피부가 헌 가죽부대처럼 쭈글쭈글 해져서야 아름다워지다니
평생을 거쳐 아무도 아무것도 제대로 사랑해보지 않은 나는 언제 나에게서 해탈하여 이 할머니처럼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시집『소주병』 (실천문학사, 2004)
오도리 헵번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탱탱한 몸매’를 자랑했던 시절을 우리는 기억한다. 헵번은 <로마의 휴일>이후 줄곧 성공가도를 달리며 20세기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뉴욕 5번가 티파니 보석상 쇼윈도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까만 선글라스와 블랙드레스 차림의 그녀 모습은 끔찍하리만큼 아름다웠다. 1964년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정점을 찍은 헵번은 사상 최초로 출연료 100만 달러 배우가 된다. 당시 100만 달러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런 헵번은 1967년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나 나이 마흔이 되기 전 배우 활동을 접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가정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쉰의 나이에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를 만나 동거하면서 오로지 아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매진한다.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인권 운동과 해외 봉사 활동에 참가해 제3세계 오지를 찾아다니며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헌신했다. 헵번은 젊고 아름다웠던 황금기에 쌓아올린 부를 아프리카 난민 구제에 다 쏟았다. 특히 1992년 직장암 투병 중임에도 소말리아에 봉사활동을 가서 눈이 퀭한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은 지금 다시 봐도 뭉클하다. 사람들은 배우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젊은 시절 지방시가 디자인한 옷 등 명품을 고집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평범한 티셔츠와 헐렁한 옷도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데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고 소말리아 사진을 남긴 이듬해에 64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프리카 오지의 어린아이를 자신의 품에 꼭 안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아이의 손을 잡아주던 모습은 이 세상 그 어느 여인보다 아름답고 거룩해보였다. (하략)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