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만 비범한 노력으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보물을 찾기
1열왕 3,5-12; 로마 8,28-30; 마태 13,44-52
연중 제17주일; 2023.7.30.;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7월의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에, 7월 전례에서 들려온 하느님 말씀의 흐름을 축일과 주일 안에서 간추려 보겠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 봉헌했던 이 달의 가장 큰 전례는 7월 5일에 지낸 김대건 사제 순교자 기념일이었습니다. 사실상 대축일급이었던 이 날의 전례를 지내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에 최초의 사목자로서 활약했던 사제 최양업 토마스까지 포함해서, 사실상 공동의 수선탁적인 이 두 사제가 한국천주교회에 미친 어마어하한 영적인 영향력에 대해 묵상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이 '순교'라는 주제를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함을 묵상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피어린 역사와 각별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가톨릭 성가집 287번, 김대건 안드레야 사제 순교자 성가의 가사를 음미해 보았던 것도 그래서 였습니다. 특히 이 성가의 5절 가사는 김대건과 최양업 사제를 포함하여 박해시대 모든 순교자들이 우리 후손 천주교 신자들에게 남겨진 과업과 소명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가신 님 자국자국 남긴 피 뒤를 따라 싸우며 끊임없이 이기며 가오리니 김대건 수선탁덕 양떼를 돌보소서 거룩한 주의 나라 이 땅에 펴주소서.”
2. 우리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비롯한 순교 성인들의 뒤를 따라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펴자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박해시대는 아니지만,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칠 각오로 우상숭배의 풍조와 싸워야 하고 또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순교정신이요, 우리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 성인들을 우리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공경하는 절박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아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지 못했으며, 우리 교회가 올리는 경신례는 세상 사람들의 정의감을 일깨울 만큼 거룩하지도 또 사회적이지도 못합니다. 경신례를 올리는 신자들의 마음 밭이 아직 복음의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만한 좋은 땅이 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상과의 싸움에서 부딪치며 정화되고 성숙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무릇 토양이 비옥해지자면 미생물이 활발하게 활동해야 하듯이, 우리 신자들의 마음 밭이 비옥해지자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셔야 합니다.
사실 7월의 첫 주일이었던 교황 주일에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한민족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자들에게 남긴 메시지를 상기시켜 드렸는데, 그 초점 또한 복음화의 과제 즉 거룩한 주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놓여 있였습니다.
3. 사실 7월의 두 번째 주일 복음의 메시지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안식의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고, 세 번째 주일 복음의 메시지는 이 과정에서 우상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밀밭에 돋아난 가라지들을 처리하는 지혜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뿌리지도 않은 가라지들이 밀밭에 자라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며, 가라지들을 뽑겠다고 함부로 덤비다가 밀을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저 마치 가라지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가정하고 밀이 잘 자라도록 집중하다 보면 수확 때가 될 때 비로소 밀과 가라지가 확연히 구분될 것이므로, 가라지는 베어서 땔감으로 활용하고, 밀은 베어서 곡식으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라지는 밀을 위한 존재로서, 악이 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고 발판이 되어야 한다는 이치입니다.
4. 악을 상징하는 이 가라지는 밀밭에만 자라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 밭에도 얼마든지 자랍니다. 죄와 악은 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할수록 악마는 우리의 마음 밭에 악한 가라지 씨앗을 뿌리려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그 일을 방해하려는 자들 때문에 자기 마음 안에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생겨날 때 놀라지 말아야 하며, 그 미움과 분노 때문에 하느님께 향할 수 있는 정신적 태세인 마음의 평정을 빼앗겨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하느님의 일과 선에 집중하다 보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마무리해 주십니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다시피, 마음속 밀은 수확하여 양식으로 주시고 마음속 가라지들은 다 뽑아서 밀로 음식을 조리할 때 필요한 땔감으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아듣기로 이러한 이치는, 마음 밭의 가라지와 맞섰던 체험은 사도직 영성을 위한 내공으로 남고, 마음밭에서 수확한 밀은 사도직의 공로와 보람으로 남습니다. 이 내공과 공로와 보람이 씨앗이 되어 그 다음에 이룩할 사도직 활동에서 더 크고 더 많은 선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서른 배나 예순 배 심지어 백 배나 되는 풍성한 열매가 맺히리라던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5. 순교자들을 본받으려는 영성은 순교 정신으로 이어지고, 이는 우상과의 싸움이라는 과제로 남는 것이며, 또한 이 싸움이 세상 현실에서나 우리네 마음속에서 내 뜻과 상관없이 자라나는 가라지들을 지혜롭게 대할 줄 아는 내공으로 이어지는 이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이 내공으로부터 순교 정신이 열매를 맺어야 할 결정적 열매인 영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이 영성이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묻혀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캐려는 비범한 노력이자 사색을 말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하늘 나라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는 비유가 그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가느라 수고하고 땀도 흘리게 되지만 그 대가로 알차게 영근 곡식을 얻는 일도 보람찬 일이기는 해도, 그 과정에서 밭에 묻혀 있던 보물까지 얻게 된다면 이는 크게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농부는 보물을 발견한 다음에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농부는 그 밭의 주인이 아니라 소작인이었던 모양이고 따라서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했다면 그 보물의 소유권은 그 소작 농부가 아니라 원주인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주인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 두었다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주인 모르게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려고 했던 것이겠지요. 그러니 농사짓는 수고로 얻은 수확물보다 몇 배 더 값비싼 그 보물이 그 농부의 기쁨이 되었을 터입니다. 숨겨지고 감추어졌던 것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공을 들여야 하고 지혜도 필요한 법입니다.
6.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 제13장에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총망라한 장을 꾸미면서, 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의 비유 이야기 속에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에 숨겨진 교훈을 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즉, 공생활 내내 그리고 마지막 수난의 십자가를 통해 참으로 고생스러우셨던 예수님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로 오늘의 비유를 삽입해 넣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이해받지 못하고 중상모략을 당하면서도 줄기차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느님께서 보물처럼 주시던 기쁨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던 농부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생을 모조리 투자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 일을 계승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사도로 양성하시는 데에 집중하셨습니다. 이 선포 활동과 양성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한 비결이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기쁨이었으리라고 본 것입니다. 이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차지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소작인 농부가 자기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사듯이 당신의 목숨을 바쳐 이 기쁨을 제자들이 계승하도록 부활하셨습니다.
7. 다시 말씀드리자면, 오늘 이 비유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내다보셨으면서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선포하시고, 이 선포 활동을 가로막던 그 당시의 가라지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도 그 선포 활동을 멈추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본 마음을 알게 해 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골고타 언덕에서 짊어지셔야 했던 나무 십자가만이 아니었고, 삼 년 간의 공생활 내내 전개하셨던 활동에서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가 더 컸는데 이는 두 가지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복음선포 활동에서 생겨나는 케리그마의 십자가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다케의 십자가였습니다. 케리그마의 십자가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었고, 디다케의 십자가는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분이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한 적대자들이 짊어지어준 케리그마의 십자가라면, 예수님께서 당신 친히 알려주셔도 쉽사리 알아듣지 못하던 제자들의 몰이해가 가져다 준 것이 디다케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적대자들은 가라지처럼 자라났지만,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까지 함부로 손을 대지 않으셨으며 오직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는 데에만 진력하셨습니다. 과연 그분이 부활 승천하시고 나니 하느님께서 역사의 무대에서 케리그마의 그 적대자들을 말끔하게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 반면에 디다케의 그분의 제자들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가 아니라 천 배, 만 배 그 이상으로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리더십이었습니다.
7.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생활이나 활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밭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밭의 소작을 맡은 농부로서 그저 주어진 작업만을 하고 소작료를 받아 가거나 수확물을 걷어갈 수도 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로 볼 때는 누구나 자기 밭에서 보물을 찾아낼 수 있다는 보장이야 물론 없지만, 하느님의 이치로 볼 때는 다릅니다. 누구나 일상의 생활이나 활동이라는 하느님의 밭에서 그분이 숨겨 놓으신 놀라운 섭리를 캐낼 수 있습니다. 그분이 비장물(秘藏物)로 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치로만 보면 보물을 발견할 확률은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그 희박한 확률이지만, 하느님의 이치를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100%의 확실한 확률로 보물을 캐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그분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요 그분이 이미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가능성들을 안배해 놓으셨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공생활을 해 나가셨던 것이고, 골고타 언덕에 오르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 평범해 보이지만 실상 비범한 노력으로 하느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보물을 찾는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