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 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듣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리는 루카 복음사가는 특이하게도, 내용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개의 제자 파견
사화를 전합니다. 하나는 ‘열두 제자’의 파견과 관련이 있고(9,1-6 참조),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일흔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입니다(10,1-12 참조).
후자는 루카 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루카는 왜 열두 제자의 파견 외에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또 이야기하였을까요? 그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는 데에, 열두 명의 파견만으로는
그 수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더 많은 이의 파견으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미 믿음을 가지게 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 널리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 선포에 헌신할
일꾼들이 어느 시대든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소자들이 크게 감소하는 위기에 맞닥뜨려 있습니다.
물론 학령 인구 자체가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큰 폭으로 줄어드는 실정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이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련히 아시고 일꾼들을 부르시겠지.’ 하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됩니다.
그 일꾼들을 주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할 이들을
지속적으로 키워 내는 일에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성소자 육성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을 많이 보내 주십사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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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 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선교사들을 위한 복음사가, 루카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당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예수님을 알아야
비로소 그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마태오는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마르코의 깨달음 위에서, 믿는 이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상세히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루카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선교적 안목에서 마르코와 마태오가 미처 전하지 못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이 세상에 출생하시는 첫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루카 복음 1장 35절), 구원자이시며 또한 주님이심
(루카 복음 2장 11절)을 강조하였고, 성모 마리아께서만 아시는 출생의 신비 즉 성령으로 인한 잉태와
역시 성령의 개입으로 탄생한 세례자 요한과의 기묘한 만남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선교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마르코나 마태오가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로 소개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가난한 이들이 들어야 할 복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마태오 4장 18절-19절).
루카는 같은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양성하시고자 부르신 열두 제자를 종종
‘사도’라고 앞당겨 부릅니다. 이미 사도들이 활약하는 교회 시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임무
(루카 복음 9장 13절 ; 12장 41절-48절 ; 22장 14절-20절), 그리고 그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에
도와줄 협조자들까지 고려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10,1. 그리고 8,2-3. 참조).
그래서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이나 처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태도와 처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루카의 관점에서 사도란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분을 뵙고 체험했으며
증언하는, 다시 말하면 그분처럼 복음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선과 용서, 기도와 자비가 강조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선교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믿는 것을 넘어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과 활동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교 활동은 사도직입니다. 세상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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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 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며,”
하느님의 계획은 높고 또 오묘하다는 사실을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의 삶을
보면서 더욱 느끼게 해줍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박해하던 유대교 신봉자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온 삶을 바쳐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를 맡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살아간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와 같이 감정도 있고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감정의 갈등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콜로새 서간에서 ‘루카와 데마스’(4장 14절)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에서 데마스는 떠나고 루카만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51년 경에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전교여행 때에 그를 수행했으며 3차 때에도 수행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61-63년까지 로마에 있으면서 수인이 된 바오로 곁을 지켰고
66년 바오로가 순교한 이후에 그리스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80-90년 경에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에서 주님의 복음을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승천으로부터 바오로가 수인 생활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사도행전과
루카복음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선교여행을 떠나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지내며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펼칩니다.
그러나 2차 여행 때에는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갈라져 개인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길에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와 동행하려고 했지만
사도 바오로의 반대로 서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루카는 끝까지 바오로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공동체를 통하여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공동체의 모습들을 얻어
듣게 되었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자칫 잘못하면 신앙 안에서 길들여진 로봇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성격과 개성들이 있고 서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갈라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치에서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그들의 불일치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주님의 공동체는 거룩하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은 죄인들인 것입니다.
불안정하고 갈라지지 쉬운 죄스러움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이러한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서 선으로,
사랑으로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끌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루카는 선의 공동체 뿐 아니라 인간적인 흐름으로 갈등을 겪는 모습도 겪은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초대 교회의 믿음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재조명하며
그가 사도 바오로와 동행하며 들었던 이야기들, 또 공동체에 전해오는 전승들을 토대로
그는 복음을 집필할 수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치유와 말씀 그리고 그분의 삶과 어머니와
그 가족관계를 소상하게 전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사랑이 루카의 말씀과 기록을 통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루카 복음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복음선포를 위한 진정한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서는 간절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돈주머니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사하지 말고 곧바로 복음선포에 전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평화를 전하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라고 이르십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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