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로마 6,19-23 루카 12,49-53
지난 한가위 때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태오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도 주인공은 아닙니다.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 안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신앙을 전해 주신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추석 한가위를 함께 모여서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던
조상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가진 것을 쌓아 놓고 기뻐하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부자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어서 천국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은 본질을 보지 않고, 현상만 보려는 태도입니다.
성서에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달은 진실과 진리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손가락은 작은 것을 탐하면서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아담이 먹었던 선악과는 손가락일 뿐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어긴 것입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주어진 권력을 남용했고,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하느님의 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본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이 있습니다.
‘거리두기, 손 씻기, 마스크 착용, 백신접종’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백신접종을 했다는 카드를 제시해야 합니다. 카드가 없으면 식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
한국이 코로나 대응을 잘 한 것은 ‘추적, 검사, 치료’였습니다.
확진자와 만난 사람을 추적해서 검사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생활치료소와 같은 것을 만들어서 확진자와 만났던 사람들은 2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의 시스템을 멈추지 않고, 코로나 시대를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추적, 검사, 치료의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나라는 코로나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저는 같은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뽑을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자를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라면 가족일지라도 따르면 안 됩니다.
악에 머무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같은 악을 행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악한 행위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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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로마 6,19-23 루카 12,49-53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어떻게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의 삶을 둘러보면 평화롭거나 쉬었던 일은 없고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으셨던 힘겨운 나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순탄하거나 영광의 길은 아니었고 집도 없는 뜨내기 삶이셨습니다.
주님의 삶을 들여다 보면 혈육으로 맺어준 가족에게서 떠나는 삶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보통 사람의 삶을 사셨다면 고향에서 가족들과 오손 도손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다운 고향에서 혈육으로 부모인 요셉의 직업을 대물림하시면서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셨을 것이지요. 물론 복음서는 주님께서 나자렛에서 어떻게 유년 시절을
보냈고 어떻게 성장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았어도 부모에게 순명하신 주님께서는 가족이나 이웃을 힘들게
하시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합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표현 중에 오늘 말씀은 강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49-51)
주님의 길을 좀 더 가까이 보면 나자렛에서 사신 삶 외에는 가족을 떠나신 삶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공생활을 하시면서 가족과의 연결에서 자유로우신 삶을 사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강하고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소명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분열도 혼란도 싫어합니다.
그저 안일무사하고 평화의 시간을 갖기를 내심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앞 날이 결코 평탄하지 않고 박해의 연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그렇게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것은 혈육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족을 떠난 것처럼 이제는
인간이 가장 약하고 걸려 넘어질 것 같은 혈육을 뛰어 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육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말이 쉽지 가족을 떠난다는 것, 서로 가치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뛰어 넘기가 사실 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갈라지는 가족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장 52-53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준엄한 일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관계를 놓고 적당히 넘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사실 중요한 가족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적대와 분열의 관계로 이끌어 가시려고 합니다.
이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부정도 그렇고 어떤 계획이 좌절되는 것 중에
대부분 가족이나 혈연에 막히는 일을 자주 봅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은 그 만큼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며
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른 제자에게 아버지 장례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인간적 관계나 어떤 이익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소극적이거나 평온의 길 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역동적이고 과감한 도전의 끝과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오는 것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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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로마 6,19-23 루카 12,49-53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립되는 의미의 단어들이 줄곧 등장하여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분
맞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한때 평화라 믿었던 현실이 안주와 고착으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을 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하여
현실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진실이었던 것이 여전히 진실인지,
그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직도 공동선에 유익한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는 이가 필요하지요.
그 안에서 질문을 일으키는 존재는 불, 곧 성령이십니다.
물론 그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기득권자들을
불안하고 성가시게 한 죄로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반동세력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지요. 그가 제기한 논점은 사라지고 질문을 제기한 자체로
상종 못할 인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이제 그가 감히(?) 깨뜨린 평화가
진정한 평화였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라 믿던 안위와 무탈과 야합의 가면을 찢고 진정한 평화에 이르려면 균열과 진동,
맞섬과 갈라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을 이루는 두 진영을 선명히 대조시켜 줍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로마 6,19)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더러움과 불법을 일삼고, 결국 죄와 악의 종이 되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끝은 결국 죽음이지요. 그가 어떤 제도에 속한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자기 선택에 따라 영혼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질식되고 악이 기승을 부리는
놀이터가 되고 말지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그간 죄와 맺었던 달콤한 동맹을 깨고 죄에서 갈라져 나와 그동안 주인이었던 죄와 맞서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기울기대로 굳어져서 존재의 방향으로 틀어 올리려면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 주인 자리를 다시 내어드린 이는 그간의 더러움이 어떠했어도
다시 거룩함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구원 의지를 믿는 그 자체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얕은 살얼음판 같은 거짓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영혼에 놓으신 성령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면,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에 귀기울여 볼 일입니다.
시편 저자는 죄와의 오래되고 끈질긴 동행을 끊어내고 거룩함의 길에 들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진리의 불길이 닿으면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인간적 세속적 관계들에 얽혀 있다면
그 관계가 어디서 양분을 받으며 유지되는지, 이 관계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곁으로 모아 주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진정한 평화를 향해 흔연히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