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5일차 마무리 미사- 주례: 김인한, 강론: 김상효
(생탁.택시 노동자들과 함께 / 부산시청 앞)
- 참가 사제: 김상효, 이동화, 이균태, 김인한, 최병권, 김종화, 한상엽, 최혁, 고원일, 조성제, 박혁,
이영훈, 김병조 신부
- 참가 수도회: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스승예수제자수녀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전교수녀회,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예수성심시녀회,
전교가르멜수녀회, 노틀담수녀회, 작은형제회,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삼위일체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꼰벨뚜알성프란치스코수도회,
- 참가 단체: 천주교 사회교리 실천 네트워크, 신빈회, 거제성당 교우들, 좌동성당 사회교리공부반,
사직성당 사회교리반, 정의평화위원회, 노동사목
⊙● 강론
숨지 마십시오
강론: 김상효 신부
사제들이 단식을 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민주주의 회복을 기원하는 단식기도회였습니다.
5월 18일 진도 팽목항에서 시작된 사제들의 단식은 청주교구 사제단, 안동교구 사제단, 수원교구 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단, 인천교구 사제단의 단식으로 이어졌고,
지난 7월 13일부터 오늘인 7월 17일까지 부산교구 사제단의 단식기도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산교구 사제단의 단식기도가 끝나는 날입니다.
사제들이 단식을 하였습니다.
더 약해지기 위하여 단식을 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단식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거대한 벽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약함을 드러냈듯이, 광고탑 위에 올라간 생탁과 택시 노동자 두 분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처지를 세상에 드러냈듯이 사제들은 스스로 약해지기 위하여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아니 눈물도 미처 흘리지 못한 채 진실을 알게 해 달라고, 매달리고 애원하고 주저앉아 땅을 치는 세월호 유가족들. 그들은 약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방어할 아무런 조직도 힘도 없이 그저 광고탑에 올라앉은 저 노동자 두 분도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굶는 것 외에 외침을 말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사제들 역시도 힘없는 사람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도 답답한 현실에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안 될 것 같아 이 약한 사람들을 만나러 오신 여러분들도 힘없는 사람들과 한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광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가려줄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지만 우리는 광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숨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자랑으로 여기며
함께 서로를 부둥켜안을 마지막 힘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를 광장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우리의 속살이 바위 앞의 계란처럼 허물어질지라도 밝은 빛 속에 머물기 위해
우리는 여기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러니 세월호의 당사자 여러분, 제발 숨지 마십시오.
청와대 앞 철문 뒤에 숨지 마십시오.
누더기 같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뒤에 숨지 마십시오.
관료 조직의 방어막 뒤에도 숨지 마십시오.
공권력의 완력 뒤에도 숨지 마십시오.
물대포로 무장한 차벽 뒤에도 숨지 마십시오.
언론의 무비판적 동조 뒤에도 숨지 마시고
세월이 지나면 세월호가 잊혀질 것이라는 기대 뒤에도 숨지 마십시오.
왜 숨어 있습니까?
세월호의 비극이 엄청난 것이지만 우리가 해결하고 치유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광장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의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 그리 어렵습니까?
아이들의 죽음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정치적 사안입니까?
아이들의 죽음이 안전망 없는 대한민국에 울리는 경종이 되어
우리를 깨우쳐 주는 의미가 되는 것이 그리도 못마땅합니까?
이 일을 이렇게도 어렵게 만든 것은
세월호의 당사자 여러분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이끌고 광장에 나와 있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숨게 만드는지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게 만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광장에 나와 세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생탁과 택시노조의 비참한 현실에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 여러분, 제발 숨지 마십시오.
입맛에 맞는 노조를 선택하여 그 뒤에 숨지 마십시오.
노동자들의 취약한 지위를 엄폐물로 삼지 마십시오.
쌓아놓은 돈 뒤에도 숨지 마십시오.
어설픈 제도와 공권력 뒤에도 숨지 마십시오.
부디 광장으로 나오십시오.
처음부터 이 노동자들이 사용자 여러분에게서 뺏을 수 있는 것이란 없었습니다.
원래 이들에게 속한 것이었고 원래 이들이 누려야할 권리였습니다.
이들과 교섭하는 것이 하늘이 무너질 만큼 대단한 일입니까?
이들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당신들을 무너뜨리고
당신들의 것을 빼앗아 올 수 있겠습니까?
부디 광장으로 나와 이들을 만나십시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도 숨지 맙시다.
일상 속에 숨어들지 맙시다. 오늘이 무사하니 내일도 안전할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로 우리의 양심이 일상의 껍질로 차단되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먹고 사는 일이 우리에게 시급한 일이지만,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아무 것도 아닌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숨지 맙시다.
우리의 힘은 우리가 숨지 않았다는 사실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약함을 드러내고 약한 이들끼리 서로를 부둥켜안았다는 사실에 존재합니다.
아파할 일은 충분히 아파합시다. 분노할 일에는 마땅한 분노를 가집시다.
그리고 광장으로 나와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말합시다.
사제들이 단식을 하였습니다.
“충실하던 도성이 어쩌다 창녀가 되었는가?”(이사야 1,21)라는 이사야의 탄식을 공감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시작되고 햇빛 아래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모두가 숨고, 모든 것을 숨기는 골방에서
음습한 창녀의 기운이 덮쳐 나와 민주주의를 썩게 만드는 현실에서
이사야의 탄식은 사제들의 탄식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좋아하는 그 참나무들 때문에 너희는 정녕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가 선택한 그 정원들 때문에 너희는 창피를 당하리라.”(이사야 1,29) 예루살렘이 죄 속에서 자신을 숨길만한 대상으로 삼았던 그 모든 것들이 무참히 사라질 우상이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사제들이 단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