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카페에 놀러 와서 몇자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도 IMF 탓일까?
잘되면 지가 잘나서 된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탓이라고 하더니 핑게거리라도 찾아 봐야겠다.
근데 이렇게 장사가 안되니 마담 노릇도 못해 먹을 판이다.
심심한 사람을 위해서 옛날 놀러 갔던 얘기나 하나 올려야겠다.
******* 바스, 솔즈버리, 스톤헨지, ***************
(98년) 8월31일(월)이 뱅크 홀리데이여서 식구들을 데리고 카디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스(Bath)와 스톤헨지 그리고 솔즈베리나 둘러올까 하고 먹을 것과 지도책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섰다.
바스는 웨일즈와 잉글랜드의 경계를 짓는 세븐강을 건너면 바로 지척간인데도 영국 온지 근 1년이 다 되도록 가보지 못한 것은 가깝게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갔다올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집과 학교연구실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관습에 젖어 하루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훌쩍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여행이란 것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그냥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하늘엔 구름이 옅게 깔려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영국 날씨치고 비오지 않는 맑은 날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렵지 않은가.
아이들이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고 걱정을 하니 집사람이 "자가용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고 모처럼의 나들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M4 (영국에서는 고속도로를 M으로 표기함)하이웨이를 타고 세븐 브릿지를 지나 조금 달리니 바스(Bath)로 빠지는 도로표지판이 나왔다.
접속구(juction)18번에서 빠져 나와 작은 라운드 어바웃드를 돌아 A46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잉글랜드에선 산이라 해봐야 우리 나라의 밋밋한 언덕봬기 같은 구릉지대이다.
경사진 골짜기를 제외하고는 목장 아니면 광활한 밭이었다.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작은 나무 울타리들이 도화지 위에 녹색의 크레용으로 줄을 그은 듯 선명하였다.
밭에는 보리를 추수하고 난 다음 보릿대를 묶은 동그란 짚동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어서 바람이라도 불면 금세라도 굴러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 따라갔더니 시야가 확 트이는 곳이 나왔다. 올라올 때엔 별로 높은 곳인 줄 몰랐는데 올라와서 보니 사방이 발아래 아득하게 펼쳐져서 제법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였다.
길가에 있는 목장에는 양떼와 얼룩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길가에는 저속기어를 넣어라는 친절한 안내판도 서 있었다. 내리막 길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계속 밟고 있으면 마찰열로 인하여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영국의 도로표지판은 완벽하게 되어 있다. 도로 표지판도 큼직하게 잘 보이는 위치에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과속단속 무인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위치에는 카메라가 있다는 커다란 주의 표지판이 여러개 서 있어 단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전경고로 과속을 미연에 방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스는 옛날 로마군들이 영국에 쳐들어 갔을 때 로마군들의 주둔지였다. 당시 목욕탕은 현재 목욕탕 박물관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 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당시 대중탕으로 사용하던 곳과 장교 그리고 대장이 사용하던 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단지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바스(Bath)라는 말이 영어로 목욕탕의 어원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하옇튼 바스는 시가지가 그리 크진 않으나 아담하고 건물들이 고색창연하다.
크레센트라 하여 초승달 처럼 생긴 아파트 건물 그리고 그 앞의 잔디밭과 공원, 의상 박물관, 드등 볼거리 들이 상당하였다.
* 솔즈베리 대성당에 대하여
바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윌슨 하우스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솔즈베리가 나온다. 솔즈베리 대성당은 1220년에서 1258년에 걸쳐서 건립되었다.
신의 위대함과 영광에 필적하는 숭배를 위한 건물로서, 당시의 예술과 기술을 구사하여 아름답고 장엄한 공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한다.
대성당은 기도와 숭배의 장소로 건립이래 750년간 매일 2회에서 3회의 예배가 행하여지고 있다고 한다.
대성당에서 신의 존재를 찾아낸, 수세기에 걸쳐 몇 십만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당을 방문하여 신의 마음을 느껴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솔즈베리 대성당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저 멀리 아득한 지평선에서도 뾰쪽한 첨탑이 보이는 솔즈베리 대성당은 "잉글랜드 초기 고딕양식"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한다. 건축기술의 진보가 우뚝 솟은 아치의 건설을 가능케 하여 사람들에게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여 신에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 같다.
회랑, 챕터하우스는 13세기반에, 고탑과 첨탑은 14세기에 들어가기 전후로부터 14세기 초기에 걸친 건축이라고 한다.
대성당"Cathedral"은 그리스어의 "의자"casdra"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의자' 결국 '주교의 자리'는 교구내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안내하는 것을 시사한다.
솔즈베리 대성당은 드세트와 빌트세아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인구 약75만명의 솔즈베리교구를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바스와 윌슨하우스를 구경하고 솔즈베리에 도착한 때는 해가 이미 서쪽 하늘 구름뒤로 숨어들어 저녁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까맣게 솟은 첨탑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성당일부는 수리를 하고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 구경꾼들은 몇이 보이지 않았다. 성당안내인이 내부를 같이 다니면서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특이한 것은 현존하는 마그나 칼타4질중 그 한질이 이곳 성당에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절대왕권으로부터 시민들이 찾은 권리장전이 바로 여기에 있다니..., 진열장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니 내 자신이 1250년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에 올라탄 것 같았다.
책의 크기는 큰 대사전정도였다. 또 하나는 성당시간을 알리는 오래된 기계식 시계였다. 톱니바퀴로 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부장식들은 각종 조각들이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대평원 가운데 무슨 돌무덤처럼 우뚝 서 있는 스톤헨지에 들렀다. 우리 나라 고창에 가면 지천으로 늘려 있는 돌무덤인데, 이곳에 있는 돌덩어리들은 어떻게 해서 좋은 대우를 받고 우리 나라에 있는 돌덩어리들은 후손들을 잘못 만나 그야말로 돌멩이 취급만 받는가. 사람이고 돌멩이고 간에 주인을 잘 만나야 대우를 받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