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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16회>
줄거리
연화에 대한 국문은 계속 된다. 모든 신료들과 왕건의 간곡한 주청에도 아랑곳 않고 급기야 궁예는 연화에게 역모에 대한 죄를 물어 뜨거운 쇠방망이로 달구어 죽인다. 그리고, 어린 태자들의 목숨도 빼앗는다. 한편, 궁예는 왕건에게도 관심법으로 반역을 시도한 적이 있었냐고 묻는데, 이에 왕건은 최응의 도움으로 그렇다고 인정하여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게 되는데.....
씬 1 황궁 의형대 밖(낮)
지난 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궁예는 왕건을 그렇게 보고 있다. 왕건은 궁예를 보다가 다시 연화를 본다.
궁예 자, 나주에서 왕건장군이 왔느니라. 국문을 계속할 것이다. 의형대에서는 다시 황후의 죄목을 만인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밝혀라.
입전 예, 폐하. (눈치를 보며 떨다가 다시 읽는다) 삼가 죄인의 죄목을 아뢰옵니다. 황후마마께오서는 일찍이 대역죄인으로 형을 받은 죄인 강장자의 여식으로서 아비의 죄를 자숙하고 반성하지 못하였고 나아가 국모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사옵니다. 더불어 대장군 왕건에게 역모를 권유하여 국기를 심히 위험케 하는 해악을 끼쳤으며 폐하의 존엄에 중한 누를 끼쳤사옵니다. 보다 일찍 죄를 물었을 것이나 존귀하신 폐하의 혈육을 보존하고자 지금에서야 국청을 열게 되었사옵니다. 살살펴 헤아리시오소서, 폐하
궁예는 연화를 본다. 연화는 냉소를 짓고 있다. 그런 연화를 왕건이 본다.
그러다가 잠시 연화와 왕건의 시선이 교차된다. 짧은 마주침에는 많은 이야기가 지나친다. 그리고 안타까움이.....궁예가 그런 왕건을 보다가 말한다.
궁예 들었는가, 아우? 방금 의형대에서 황후의 죄목을 말하였네. 내가 다시 그 죄안을 하나하나 상세히 말해줄 것이야.
왕건 ..................
신료들 ( 그 면면들이 스쳐가고)
궁예 먼저 황후는 이 미륵의 안해로서 그 자질을 잃었어. 미륵의 안해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맑아야해. 하늘을 우러러 티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해. 이 미륵처럼 말이야.(사이) 그러나 그렇지 못했어. 그 아비는 감히 어린 태자들을 앞세워서 보위를 훔치려고 하였고 그 자신은 황후의 신분을 망각한 체 이 미륵을 대항하려 했고 욕보이려고 하였어. 어디 그뿐인가, 죄인의 신분임을 또한 잊은 체 대장군 왕건으로 하여금 역모를 하라고 부채질하였어. 역모 말이야.
왕건 .................
종간들 .................?
궁예 생각해보면 죽은 강장자의 역모는 결코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어, 저 황후와 태자들의 묵계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이야.
연화.태자들 ..............
궁예 이는 결과적으로 그 바탕이 순수를 잃었기 때문이야. 순수를 잃으면 무엇이 남는가? 음탕하고 불결한 것만 남아. 음탕하고 불결한 것! 이보다도 더 큰 죄가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황후 한사람의 잘못이 어린 태자들을 죄인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고 짐이 가장 사랑하는 아우 왕건 대장군의 죄를 묻게 만들었으며 만 백성들의 본이 되는 황실의 위엄을 송두리째 더럽히게 하였어. 이러고도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사이) 이미 그 마음이 사악하여 짐과 이 나라를 떠나버렸렸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어?
궁예는 그렇게 논죄를 마친다. 연화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고 태자들은 그렇게 떨며 눈치를 보고 있다.
왕건, 최응, 종간 은부들과 박지윤, 복지겸, 홍유, 배현경, 이혼암,능산들의 면면이 지나쳐 간다.
궁예 자, 죄를 더 열거하자면 얼마든지 많지만 내 입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이만 하는 것이야. 형리들은 들어라.
군사들 예.
궁예 이미 황후의 지은 죄를 소상히 다 말해주었다. 행형할 차비를 하라.
군사들이 대답하며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화를 둘러 선다. 왕건이 보다가 나서며 말한다.
왕건 폐하, 신 왕건 아뢰옵니다.
궁예 아우가...? 말하라.
왕건 아무리 죄가 중하다해도 황후마마는 이 나라의 국모이시옵니다. 집안이 죄를 받다보니 그 심중이 심히 어지러워 잠시 실언을 한 것으로 아옵니다. 하오나 이미 폐하의 아드님을 세 분씩이나 생산하시었고 폐하를 뫼시고 황실 안을 지키신지 어언 이십여년이옵니다. 어찌 목숨까지 거두려 하시옵니까, 미륵의 자비를 베푸시어 그 일신만은 보존하여 주시오소서. 삼가 청하옵니다, 폐하
궁예는 잠시 말이 없다. 신료들도 모두 궁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때 종간이 나선다.
종간 왕장군, 그대는 지금 폐하께 죄를 조사 받기 위하여 이 곳에 온 것이오. 다시 말하면 죄인의 신분인 것이오. 그것도 황후마마의 일과 연루되어서 온 것이외다. 죄인이 어찌 다른 죄인을 변호한단 말이오? 이야말로 무례한 일이 아닌가?
임춘길 그렇사옵니다. 폐하. 대장군 왕건은 황후마마보다도 그 죄가 열 배, 백 배 중한 죄인이옵니다. 저 곳에 신료들과 함께 서 있게 할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은부 그러하옵니다 폐하, 대장군 왕건을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리시오소서.
임춘길 끌어내리시오소서
궁예는 대답이 없다. 묘한 미소만 짓고 있다가 한마디한다.
궁예 그건 그래, 아우가 나설 자리는 아닌 것 같네. 평결은 오로지 내가 하는것이야. 황후는 이미 죽음을 면키 어렵게 되었어.
그러자 박지윤이 나선다.
박지윤 폐하, 은혜를 배푸시오소서. 백성들이 보고 있사옵니다. 부디 황후마마의 죽음만은 면케하여 주시오소서.
복지겸 (역시 앞으로 나서며) 폐하, 신 복지겸 또한 청하옵니다. 은혜를 베푸시오소.
그러자 홍유와 배현경, 원극유, 박질들이 모두 나선다. 이혼암만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하고 있다.
그들 폐하,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연화 ..(여전하고).............
궁예 (벌떡 일어서며) 무엇들 하는 짓인가. 당장들 거두지 못할까? 무슨 은혜를 베풀라는 것인가?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 죄인들이야.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또한 당연한 것이야. 더군다나 저 죄인 스스로가 한 점 뉘우침이나 변명이 없어. 그런데 무얼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라는 것인가, 무얼? 저 음탕하고 더러운 것에게 무얼 말이야?
연화 .........(냉소)
신료들 ...........
궁예 더 오래 끌 것 없다. 형을 집행할 것이다. 죄인은 듣거라.
마지막으로 소명의 기회를 줄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
연화 ........(여전히 냉소로 보고)
궁예 (사이)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다. (사이) 할 말이 없는가?
그러자 여태까지 비웃듯
보고 있던 연화가 입을
연다.
연화 그래도 마지막 말을 남기게 해주시니 고맙사옵니다. 폐하께서는 한 번 하신다 하시면 하시는 분이시옵니다. 이미 폐하께선 이 몸을 죽이시기로 작정을 하셨사옵니다. 모든 결심이 다 서시었는데 무엇을 변명하며 목숨을 구걸하오리까?
신료들 ...............
궁예 ................
연화 이 몸은 오래 전에 이미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여인이라는 그 자체를 병적으로 혐오하시고 불결해 하시는 분이시옵니다. 인간다운 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으신 분이 폐하시옵니다. 그 옛날 미향이라는 북원부인이 어찌 죽었사옵니까? 폐하께서 죽이신 것이 아니옵니까? (사이) 폐하께서는 저 송악의 세달사라는 절에서 그렇게 승려로서 평생을 사셔야 할 분이셨사옵니다. 그런 분이 세상에 나와 거짓 미륵을 참칭하며 백성들을 속이고고 한 나라의 황제가 되셨사옵니다.
종간 .....(놀라고 당황한다)....아니 .....저....저.....?
왕건 (그저 안타깝다)..........
궁예 ...(굳어진다)....
연화 폐하께오서 궁금해하시던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오리다. 신첩은 지금까지 폐하를 사모하지 않았사옵니다. 단 한 순간도 폐하를 사모한 적이 없사옵니다.
궁예 ......(아프다) 계속해보라... 허락해준 시간이니 마지막으로 마음대로 지껄여보라.
연화 그저 폐하께서는 가엾고 불쌍한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사옵니다. 제 안해와 자식을 죽이려는 사람이 제정신이겠사옵니까? 이 얼마나 가여운 분이십니까?
왕건, 신료들 .................?
궁예 (벌떡 일어서며) 닥치지 못할까? 그대는 죄인이기에 죽는 것이다. 죄인 말이다. 죄인, 죄인. 이 제국을 음해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늘 보여주려는 것이다. 황후나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나라에 죄를 지었을 때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만 천하에 보여주려는 것이란 말이다. 그대는 이미 더럽고 불결하고 음탕한 여인임이 밝혀졌다. 무얼 더 이야기할까? 그 마음이 더럽고 음탕하니 수천만 번 간음하고 간통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그 죄를 이미 관심법으로 다 보았다. 다 보았어. 그런데, 무얼 더 지꺼리느냐?
연화 사람을 이미 수없이 잡으신 폐하이시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밉다한들 더러운 죄목으로 엮지는 마시오소서. 하늘이 보옵니다.
궁예 닥쳐라! 이미 네 입으로 나를 사모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것은 다른 사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간음이고 간통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대로는 아니되겠다. 여봐라.
내군들 예.......
궁예 도저히 편하게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법에 무서움을 더 크게 깨닫게 해줄 것이다. 화로를 가져오너라. 화로를 대령하고, 법봉을 그 불에 달구어라.
궁예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지른다. 이미 분노로 하여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신료들이 표정이 모두 하얗게 변한다. 종간과 은부도 예상외의 명령에 크게 놀라고 긴장하여 심호흡을 한다. 특히나 종간의 모습은 당황하기 그지없다. 왕건도 어쩔 줄을 모른다. 복지겸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보고 있다.
그 사이에 거세게 타오르는 화로불이 옮겨지고 법봉이 그 위에 달구어진다. 그래도, 연화는 표정이 없다. 그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며 궁예는 더욱 거칠게 호령한다.
궁예 더러운 것은 깨끗이 해야 해. 이 불로써 태워서 모두 깨끗이.... 자, 방망이는 금방 달아오를 것이다. 그때까지 시간을 더 주마. 말해보거라. 할 말이 있으면 더 해보아. 어차피 죄인은 이제 죽을 것이다. 나는 황제로써 그리고 미륵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의 이름으로 죄인을 처단하는 것이다. 할 말이 있는가?
연화 국가와 백성을 팔지 마시오소서. 백성들은 그렇게 미련하지 않사옵니다. 국가는 백성들의 것이지 폐하 혼자 분의 것이 아니옵니다. 누가 이 나라를 폐하께 드렸사옵니까? 바로 백성들이옵니다. 그 백성들이 폐하께 드린 것을 지금 다시 거두어 가려한다는 것을 모르고 계시니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궁예 닥치거라! 이 나라와 백성은 짐의 것이다. 생각이 그와 같이 천박하니 오늘 이렇게 죽는 것이니라. 자, 저 법봉은 금방 달구어질 것이다. 아직 할 말이 남았으면 더 해보거라. 더 해보아.
연화 ............
궁예 더 해보라고 하였어.
연화는 더 이상 말이 없다. 냉소로 궁예를 보던 그 시선이 천천히 왕건을 본다. 왕건은 떨고 있다. 뭔가 시선으로 안타깝게 말하고 있다. 제발, 용서를 구하라는 그런 표정이다. 그 참담한 시선에서 바람소리만 간간이 깃발들을 거세게 흔들고 있다. 그 침묵에서...디졸브.
씬 2 왕건의 집 외경
씬 3 동 집 사랑
두 여인이 극도의 초조와 불안에 쌓여 서로를 보고 있다. 여기에 유천궁과 유긍달이 함께 해 있다.
유천궁 지금 한참 국문이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유긍달 그렇겠습니다. 문제는 왕장군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 사위 말입니다.
수인 만약에 집사장이 석총대사의 간자에 대해서 모두 발설을 하게 되면 서방님께서는 살아나시지 못할 것이옵니다.
유긍달 그러게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유씨 어쩌면 좋사옵니까, 아버님?
유천궁 황후께서 죄를 받는다면 왕장군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그 죄목에 연루되어서 불려왔으니 말이다. 어찌되었을꼬...? 지금쯤 뭔가 결단이 나도 났을 것인데....
씬 4 다시 국문장
바람 소리가 여전히 깃발들을 펄럭이고 있다. 카메라는 아직도 분노에 잠겨 있는 궁예와 벌겋게 달아오른 법봉과 냉소를 품고 있는 연화와 겁먹은 태자들을 거쳐 왕건으로 이어져서 종간, 은부들을 지나 신료들의 면면을 지나친다. 침묵이다. 무서운 침묵이 계속되고 있다.
궁예 자, 더 할 말이 없느냐? (사이) 더 할 말이 없어?
연화 ...........
그때, 두 태자들이 나서며 울부짖는다.
신광 아바마마, 어마님을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아바마마.
궁예 .......... ?
청광 어마님을 살려주시오소서, 어마마마를 용서하시오소서, 아바마마.
두형제 (함께) 아바마마, 용서하시오소서. 아바마마....
여전히 신료들이 보고 있다. 궁예는 한동안 그렇게 계속 애원하는 두 아들을 보다가 주장자를 바닥에 쿵 쿵 내려친다.
궁예 나랏법을 시행하는 자리이다. 태자들은 닥치지 못할까? 너희들 또한 죄인으로 이곳에 나와있느니라. 자, 이제 시간은 다 되었다. 말 하라. 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
그러자, 연화는 천천히 다시 왕건을 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된다. 가만히 보면 연화의 손에는 처음부터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릴적에 왕건이가 사다준 목걸이이다. 연화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연화 왕장군?
왕건 ............?
연화 (사이) 인연이 없는 분에게 너무도 많은 짐을 드리고 가는 것 같습니다. 용서를 구한다면 장군께 구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
궁예 ............? (입술을 꼭 깨문다)
연화 저 때문에 너무도 많은 곤란을 겪고 계십니다. 만약에 훗날 구천에서 만나 뵐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죄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못다한 말씀을 다 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옵니다, 장군. 내내 행복하소서.
왕건 (절박하다) 황후마마, 용서를 구하시오소서. 폐하께 용서를 구하시오소서, 황후마마. 그리하시오소서, 황후마마. (다시 궁예에게) 폐하,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이 나라의 국모님이시옵니다. 죄를 크게 묻지 마시고, 자비를 베푸시오소서, 폐하.
보고 있던 박지윤이 다시 나선다.
박지윤 폐하, 신이 다시 한 번 청하옵니다.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신료들 (일제히) 폐하,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은혜를 베푸시오소서.
그 많은 신료들이 모두 무릎을 꿇으며 청하고 있다. 그러나, 환선길은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서 어찌할까를 망설인다. 그런 환선길을 복지겸이 보고 있다. 그 계속되는 소란을 궁예가 주장자로 바닥을 치며 멈추게 한다.
궁예 그만들 두지 못할까? 나는 법을 시행하고 있는 중이다. 누가 나랏법을 방해하는가? 누가 이 자리에 죄인으로 나와 관심법을 받고 싶은가? 나설 자 있으면 다 나서라. 그렇게 해 줄 것이야.
신료들 .......... (소란이 가라앉고).......
궁예 법이 무엇 때문에 있는가? 죄를 다스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후로 소란을 떠는 자는 즉시 여기서 죄를 물어 죽음에 처할 것이다. 행형할 준비가 다 되었느냐?
군사들 예, 폐하.
궁예 행형하라! 그 더러운 것들을 모두 불로 태워 버려라.
연화 폐하...?
궁예 .........?
연화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아낀다 하였습니다. 신첩이야 이미 갈 길을 선택했습니다만은 태자들은 폐하의 아드님이시오. 설마 죽음을 내리시지는 않으시리라 믿사옵니다.
궁예 (사이, 생각하다가) 그 일은 내가 할 일이니라. 형을 시행하라.
군사들이 대답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법봉을 화로에서 빼어 든다. 어쩔까를 묻는 듯 궁예를 본다.
궁예 뭘 그러고 있느냐? 그 더러운 것을 다 태워 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신료들 .........
왕건 ...........(어쩔 줄 모르고)
종간 ..........(너무도 어이가 없고 충격이다, 어쩔 줄 모른다)
궁예 뭣 하느냐? 시행하라. 시행해. 어서, 시행하라!
군사들이 다가가 연화를 잡아든다. 그리고 신료들이 보지 못하게, 한쪽으로 비단 휘장을 둘러친다. 그 휘장 안쪽에서 연화는 냉소를 짓다가 왕건을 본다. 그리고, 잠시 미소를 짓는가 하다가는 그대로 눈을 감는다. 달아오른 법봉을 든 군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군사도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 법봉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형을 집행한다. 연화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계속해 길게 허공을 가른다. 아무도 말을 못한다. 두 태자는 더 이상 애원도 못한 채 입을 벌리며 보고 있고, 신료들도 그렇게 얼어붙었다. 푸른 연기가 하늘로 가늘게 솟아오르고 있다. 연화의 그 긴 비명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줄어든다. 그리고, 드디어는 왕건을 한 번 보는가 했더니, 고개를 떨군다. 손에는 그렇게 왕건의 목걸이를 꼭 쥔 채.......
그리고, 해설이 이어진다. 그 동안 연화의 지나간 면면들이 파노라마로 소개된다.
해설 연화, 이는 극중의 이름이다. 실록에는 그녀의 이름이 강씨라고만 되어 있다. 신천출신으로써 지역적 범주로 보면, 송악의 왕건과는 아주 가까운 패서지역사람이다. 그녀가 죽은 것은 실제로 서기 915년, 단기로는 3248년의 일이다. 그러나, 극의 흐름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하여 집약적으로 이야기를 묶어 놓은 것이다. 황후 강씨가 죽을 때의 모습을 삼국사기 궁예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있다. “황후 강씨가 궁예왕이 그릇된 일을 많이 하는지라 정색을 하고고 간하자 왕이 미워해 말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을 하니 웬일이냐? 라고 하였다. 이를 강씨가 부인하자, 왕은 내가 신통력으로 다 보았다, 라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죽였다. 그리고, 드디어는 그 화가 두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황후 강씨가 궁예왕의 전제정권에 대립하다가 해를 입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황후를 앞세운 패서지역의 호족들이 궁예와 맞서다가 해를 입은 것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황후는 그렇게 죽었다. 우리가 여기서 황후 강씨와 훗날 태조가 되는 왕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것은 철원지방에 내려오는 짧은 한 토막 민간 구전 설화에 의존한 것임도 아울러 밝혀 둔다.
씬 5 다시 그 곳 국문장
아무도 말이 없다. 왕건은 창백해 입술을 깨물고 있고, 종간은 아직도 진저리를 치고 있다. 다른 신료들은 물론이고....
계속되는 바람 소리는 얼어 붙은 그 국문장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이미 두 태자들은 넋이 나가 있다. 그 태자들을 궁예가 보고 있다. 그리고, 궁예는 다시 한 번 신료들을 쭉 훑어보고 나서는 말한다.
궁예 이미 큰 죄인은 죽었다. 그리고, 저 어린것들이 남았다. 인정으로 보면 딱한 노릇이다. 그러나, 자식이라 하여 어찌 대역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이 나라 법이 서겠는가? 형리들은 들어라!
군사들 예.
궁예 죽여라.
신광 아바마마, 살려주시오소서, 아바마마...
청광 살려주시오소서, 살려주시오소서.
신료들 .........
종간들 ........... (이제는 체념이다)
궁예 죽여라! 법봉으로 쳐죽여라.
두형제 아바마마, 아바마마.......
신광과 청광은 ‘어마마마’를 부르며 연화가 있는 쪽으로 도망가려 한다.
그러나, 연화는 죽었다. 법봉을 든 형리가 다가온다. 두 형제는 계속 살려달라고 궁예를 보며 두 손을 빌고 있다.
두형제 아바마마. 아바마마......
궁예 아, 무엇 하느냐? 어서 시행하라. 어서!
그것으로 끝이다. 군사들은 법봉으로 태자들을 내려친다. 그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살육이다. 그 살육의 현장을 신료들은 숨을 죽이며 보고 있다. 왕건이는 여전히 굳어 있다. 복지겸과 능산, 홍유, 배현경들도 마찬가지이다. 궁예는 쓰러진 처자식들을 보고 있다.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는 궁예의 표정이 다시 왕건을 본다.
두 사람의 그런 시선에서.. 바람소리만, 바람소리만.......
씬 6 철원 저자 거리/ 어느 주막
허월이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주막으로 들어가고 있다.
씬 7 동 주막 안
그 옛날 석총이 묵었던 주막이다. 형미가 술을 마시고 있다. 허월이들어와 앉는다.
허월 허허, 형미대사가 아닌가? 낮부터 곡차시구먼, 그래.
형미 예, 대사님. 참으로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허월 오랜만은 무슨..? 삼한 땅에 이름 있는 고승들이 태봉국 수도로 다 모인다기에 나도 궁금해서 와 봤네 그려. 나도 고승 소리 한 번 들어보려고 말이야.
형미 어인 말씀을.. 자, 곡차 한 잔 하시오소서.
허월 (앉으며) 고맙네. 그래, 어쩐 일인가? 왜들 모두 이리로 모이는 것인가?
형미 태봉국의 제삿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옵니다.
허월 허허허, 제삿날이라..?
형미 지금 황궁 안에서는 마군이 새끼 한 마리가 제 처자식을 도륙하고 있사옵니다. 나라를 무너트리는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허월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네가 보자 하기에 올라 온 것이야.
형미 황제는 지금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사옵니다. 이미 덕을 잃었고, 그 근본을 잃었습니다. 빨리 세상을 바꾸어서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하옵니다. 그리고, 진정한 불국토의 세계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게 해주는 것이 우리들의 길이 아니겠사옵니까?
허월 그 일을 자네가 하려고?
형미 그렇사옵니다, 대사님. 지금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을 목이 타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우리 불제자들이 그 소원을 이루어주어야 하옵니다. 그렇게 하자면 누군가 그 일에 불씨를 심어야지요.
허월 허허허, 그러고보니 석총대사 생각이 나는 구먼. 그 사람도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 들어갔거든.
형미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이라 하였사옵니다. 민초들을 위하여 나를 죽이고, 부처의 세계를 얻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이겠사옵니까? 허허허. 자, 곡차 한 잔 더 하시오소서. 왕장군도 사지로 끌려 들어가 있는데, 어찌 되었는가 모르겠사옵니다. 지금쯤 심한 피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을 것인데, 쯧쯧쯧....
씬 8 다시 국문장
침묵이다. 궁예가 왕건을 보다가 묻는다.
궁예 아우는 듣게.
왕건 예, 폐하.
궁예 우리는 오랫동안 형제로 잘 지내왔어. 헌데, 왜 반역을 하려고 하는가? 왜, 무엇 때문에?
왕건 폐하, 신이 어찌...... ?
궁예 황후가 죽었어. 태자들도 죽었어. 그 죄가 역모 때문이었어. 아우는 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었는가?
왕건 ..........
궁예 나는 말해 주었다. 나는 능히 관심법을 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안다고 하였다. 솔직히 말하라. 그런 일이 있었는가?
왕건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궁예 허허, 아니라? 그렇다면 내가 입정에 들어가 다시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해야겠네 그려. 관심법으로 보아야겠어.
그렇게 왕건을 한참 노려보다가 궁예는 눈을 감는다. 관심법을 위해 입정에 들어간 것이다. 복지겸, 능산들의 표정이 바짝 긴장한다. 종간, 은부들도 그렇다. 그 무서운 침묵 속에서 갑자기 똑 하는 소리가 들리며 최응이 붓을 떨어뜨린다. 그 붓이 잠시 굴러가 왕건의 발치에 머문다. 최응이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가 그 붓을 줍는다.
씬 9 그 곳
최응이 붓을 줏으며 짧게 소근 거린다. 엎드려 말하므로 아무도 알지 못한다.
최응 장군, 인정하시오소서. 길은 그것뿐이옵니다.
왕건 ...........? (그렇게 선 채로 모르는 척 듣는다)
최응이 그렇게 재빨리 소근거리고 제자리에 가서 선다. 관심법은 계속된다. 여전히 아무도 최응이 해 준 이야기를 알 지 못한다. 종간, 은부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왕건과 궁예를 보고 있다. 한참만에 궁예가 그 외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주장자로 바닥을 두어 번 친다.
궁예 자, 관심법이 다 끝났느니라. 말해보라. 반역을 도모한 사실이 있었는가? 황후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신료들 ...........
왕건 예, 폐하. (무릎 꿇으며) 과연, 그러했사옵니다. 신이 반역을 도모하였으며, 모반을 꾀했나이다.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폐하.
의외다. 복지겸들이 모두 놀라, 창백해진다. 박지윤도 그렇고, 왕식렴, 왕신들도 숨이 멈출 것처럼 놀라서 보고 있다. 종간, 은부는 의외라는 표정이다. 이게 아닌데, 하는 것이다.
궁예 했어? 반역을 꾀했다, 그 말이지? 모반을 하였다. 모반을...?
왕건 예, 폐하. 그리하였사옵니다. 어찌 폐하의 그 관심법을 모면할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께서 그리 보셨다면 틀림없이 그러한 것이옵니다. 신을 참해주시오소서.
신료들 ..........
최응 .........
궁예 (한참 보다가, 웃는다) 허허허.... 과연, 아우로다. 그 죄를 인정하고 벌을 달라하니,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다시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왜 많은 이들이 그대를 시기하고 의심하는 지를 반성하라.
평결이 끝난 것이다. 종간, 은부가 아연해한다. 이게 아닌 것이다.
종간이 급히 나서며 말한다.
종간 폐하, 황후마마까지도 죄를 받았사옵니다. 대장군 왕건은 스스로 역모를 인정하였사옵니다. 용서를 하심은 그 형평이 맞지 않는다고 사료되옵니다.
은부 벌하시오소서, 대역죄인이옵니다, 폐하.
임춘길 벌하시오소서. 죄를 인정했사옵니다.
궁예 ..........
신료들 ...........
임춘길 폐하, 스스로 대역죄를 인정했사옵니다. 어찌 용서하시옵니까? 황후마마와 역모를 논한 사실도 그렇거니와, 죽은 석총이와의 일도 증인이 있사옵니다. 벌을 내리시오소서, 폐하.
궁예 법을 관장하는 것은 바로 짐이니라. 이미 죄인이 죄를 자복하고 빌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나의 관심법은 늘 그렇다. 스스로 자복하고 뉘우치면 누구나 다 살려주었다. 이 평결은 이것으로 끝이야.
종간,은부 폐하.... ?
궁예 의형대는 들어라.
입전,신방 예, 폐하.
궁예 벌을 받은 죄인의 시신들은 모두 산으로 내다버려라. 그리고, (진내관, 슬이들 보며) 황후전에 있던 상궁 내관들은 외방으로 부처하여, 관노로 삼도록 하고 강장자의 양자는 방면하여 풀어주어라.
입전,신방 예, 페하.
궁예 다른 여죄는 모두 여기서 끝이 났다. 앞으로는 죽은 석총이나 아지태의 이야기를 누구든 꺼내지 말라. 나라를 위해 좋지 않느니라. 오늘의 국문은 끝이 났느니라. 대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궁예는 그렇게 일어나 국문장을 빠져나간다. 가다가 왕건과 시선이 잠시 교차된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아주 태연히 연화와 태자들의 시체 곁을 지나 그대로 황궁 쪽으로 가버린다. 최응이 그런 궁예를 수행해 간다. 종간과 은부, 임춘길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들도 그렇게 왕건과 시선이 부딪친다. 그리고는 황제의 뒤를 따라 간다. 모두들 가버리는 중에서 복지겸과 홍유들이 안도의 표정으로 왕건을 보고 있다. 능산이 다가와 말한다.
능산 주군, 참으로 사지를 잘 벗어나셨사옵니다.
복지겸 (다가오며) 고생하셨습니다, 왕장군.
배현경 고생하셨습니다.
홍유 큰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사옵니다. 정말 다행이옵니다.
왕건은 아무 말이 없다. 그렇게 옮겨지는 연화의 시신을 보고 있다. 옮겨지는 연화의 손에는 여전히 그 목걸이가 꽉 쥐어져 있다. 왕건이 보고 있다. 점점 멀어지는 연화를 보는 그런 왕건의 시선에서 디졸브 된다.
씬 10 어느 산야(밤)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고 있다. 그리고, 비바람이 분다. 폭풍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비바람이다. 숱한 고목들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있다. 그 어느 곳에 황후와 태자들의 시신이 버려져 있다. 번쩍이는 번갯불에 연화가 아직도 쥐고 있는 그 목걸이가 빛을 발한다. 어느 선가 그 요란함 속으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비바람 속에 횃불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은 형미와 승려들이다.
씬 11 그 길
형미 (다가오며) 여기 어디쯤에 버렸다고 했는데...
승려1 대사님, 저기 저쪽이옵니다.
형미 오, 그렇구먼. 이런 세상에.... 쯧쯧쯧.... 그래도 일국의 황후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태자들이 아닌가? 하늘이 무심치 않을 것이로세.
그들은 그렇게 시신들 가까이로 다가온다. 승려들은 이미 시신을 수습할 관과 수의들을 가지고 왔다.
형미 자, 이 분들을 잘 수습해드리도록 하세. 그래도, 한 나라의 국모님이신데.... 장례는 제대로 치루어드려야 할 것이 아닌가? 자, 서두르세, 어서.
승려들 예.
형미 (연화의 목걸이를 보며) 이런 쯧쯧쯧.... 모진 세상 떠나면서 이 목걸이는 무엇이 그리 소중하다고 쥐고 계실꼬? 이런, 쯧쯧쯧..... 그 목걸이도 잘 함께 뫼셔드리게.
승려들이 대답하고 연화의 시신을 수습한다. 그들은 그렇게 부산하다. 천둥번개와 바람 소리는 여전히 극을 달리고 있다.
씬 12 황궁 외경
씬 13 동 대전
이곳에서도 천둥번개는 요란하다.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궁예가 술을 마시고 있다. 천둥번개 소리는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들이다. (크게, 에코우성으로) 궁예의 외눈이 독기를 품은 채 그렇게 빛나고 있다. 최응이 석상처럼 한쪽에 조용히 앉아 보고 있다.
궁예 (마시다가, E) 이제 모든 게 끝이 났다. 인간적인 모든 고리들이 잘려나갔어. 제국을 위해서이다. 그 제국의 앞날을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황후도 그렇고 태자도 그렇다. 그들이 있어 나의 마음을 산란케 해서는 아니된다. 다 가야 한다. 처자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세월은 그렇지가 않다. 아니.... 이제는 내게 처자 따위는 다시는 필요 없다.
궁예는 다시 술을 마신다. 천둥소리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듯 그렇게 이어진다. 궁예가 잔을 든 채 허공을 본다. 그러다, 다시 최응을 본다.
궁예 아직까지 가지 않고 그곳에 있었느냐?
최응 예, 폐하.
궁예 천둥번개가 극성이구나. 바람소리까지 아주 엄청나.... 갓난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내 아들 순백이 말이다.
최응 곧 뫼셔 올 것이옵니다.
궁예 그래, 그 순백이 하나면 된다. 이제 다 되었다. 왕건아우는 최응이 너의 말마따라 관심법으로 보니 여전히 충신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을 내게 보여주었어. 사람들은 왕건아우가 두렵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아. 스스로 죄를 인정하였으니, 언제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어. 아니 그러냐, 최응아?
최응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때, 대전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대전내관 (E) 폐하, 태자마마를 뫼셔왔사옵니다.
궁예 오, 들여라. 그래, (들어오는 것을 보며) 순백이로구나. 나의 아들이다. 대 태봉국의 태자로다. 어디 보자. (안아들며) 그래, 순백아, 아비니라. 내가 아비니라, 하하하하....내가 아비다. 아비야.
최응 .......(여전히 표정없이 보는)
씬 14 동 황궁 내원
이곳에서도 천둥번개는 계속 들려오고 있다. 바람이 문짝을 부서버릴 듯 계속되고 있다. 종간이 듣다가 한숨을 짓는다.
종간 우리가 잘 못 생각하였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은부 ..........?
종간 폐하께서는 실성하셨네. 병이 나으신 것이 아니야. 더해지셨어.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황후마마를..... 그렇게 죽이시다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아프다) 실성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은부 그렇사옵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렵사옵니다만은 어떻게 이십여년을 함께 살아오신 황후마마를....
종간 그만하게. 허나, 이제 어쩔 수가 없지 않는가? 세상이 알 것은 다 알고 있어. 위기일세. 일찍이 신료들이 그렇게 벌떼처럼 나선 적은 없었네. 폐하께서는 치명적인 광기를 보여주셨어. 아... 정말로 위기가 오고 있네. 두렵고 떨려.
종간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밖의 소리들을 듣는다. 은부가 묻는다.
은부 왕건이를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대부분의 많은 신료들이 왕건이를 두둔하는 눈치였사옵니다. 폐하께서 또 왕건이를 용서하시다니요?
종간 역시 왕건이는 뛰어난 인물일세. 변명없이 다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충성심을 보여주었어. 폐하께서는 거기에 넘어가버리셨네. (사이) 이 위기를 어찌 넘겨야 할 지는 나로써도 대책이 아니 서네. 일단은 군부를 단속하고 신료들을 더욱 엄히 감찰하게나.
은부 예, 내원어른.
종간 위기야. 엄청난 태풍이 몰려오고 있어. 태풍이야....
밖의 그 소리들에서......
씬 15 왕건의 집 외경
씬 16 동 집 사랑
왕건과 왕식렴 형제, 유천궁, 유긍달, 두 유씨가 함께 해 있다.
유천궁 사지에서 천만다행으로 살아 왔네 그려.
왕건 ........
유긍달 정말일세. 나는 그야말로 사위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네.
왕식렴 지금 생각해도 등에 식은 땀이 나옵니다. 형님께서는 정말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
왕신 그렇사옵니다. 만약에 그때 모든 것을 아니라고 변명하셨더라면 오히려 큰 봉변을 보셨을 것이옵니다.
유씨 듣고보니 그렇사옵니다. 정말 하늘의 도우심이옵니다.
수인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겠사옵니까? 소첩은 아직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술 한 상 차려오면 어떻겠사옵니까?
유씨 오, 그렇게 하세.
왕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소이다, 부인. 장인어른들께서는 한 잔들 하시오소서. 저는 이만.....
유천궁 (그제서야) 그렇지. 그럴 것이네. 어서 가서 쉬게. 우리도 곧 돌아갈 것일세. 허허, 이 날씨하고는....
왕건이 나간다. 그렇게 보던 유천궁이 유긍달을 보며 혀를 찬다. 그리고, 안도하는 두 유씨의 표정에서....
씬 17 동 밖 대청
왕건이 어둠 속에서 쓰러질 듯 태풍에 버티고 있는 나무들을 본다. 바람소리와 천둥소리, 번개가 그렇게 계속 들끓고 있다. 왕건이 비로소 눈물을 흘리고 있다. 주먹을 쥐고 혼자 절규한다. 그리고, 소리친다. 그것은 참았던 분노의 울부짖음이다.
왕건 어우..... 어우......... 어우......... !
씬 18 임춘길 집 외경
씬 19 동 집 사랑
임춘길과 도우가 마주해 있다.
임춘길 왕건이 또 살아났소이다. 이렇게 되면 내일이 또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게되었습니다. 이보시오, 대사. 황제는 정말 내가 보기에도 악귀같았소이다. 방망이를 불에 달구어서 황후마마의 그 은밀한 곳을 불로 지졌소이다. 이것이 사람이겠소이까?
도우 하하하, 장군, 진시황은 그 보다도 더한 일도 수없이 했소이다. 중원의 역사를 보면 폭군들은 차마 말로 하지 못하고 글로 표현하지 못할 일들을 수없이 했지요.
임춘길 과연 이 제국이 오래 가겠소이까?
도우 글세올습니다. 허나, 장군이 가실 길은 이미 정했졌사옵니다. 왕건이 죽어야 장군이 사옵니다.
임춘길 글쎄올습니다. 글쎄올습니다. 충주에서 집사장까지 데리고 왔지만, 아무 소용도 없게 되어 버렸소이다.
도우 또 길이 생기겠지요. 아마도 내원 그 사람이 그냥 안있을 것이옵니다, 허허허. 그 일을 도와주시면 될 것이옵니다. 뭔지 모르지는 말입니다.
씬 20 어느 집 사랑
은밀한 그곳에 복지겸, 배현경, 홍유, 능산이 모여 있다.
복지겸 이제 더는 아니되겠소이다. 공들도 보셨겠지만, 낮에 있었던 국문은 국문이 아니라 미치광이들의 광란의 장이었소이다.
모두들 ........(끄떡인다)
복지겸 황제는 희망이 없소이다.
능산 그렇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소이다. 뭔가 나라를 위해 대책을 세워야 하오이다.
홍유 그 말씀에는 동감이올습니다만은 구체적인 방안이 없질 않소이까?
배현경 군을 황제의 권력과 독재에 이용하고 있는 내원과 내군장군 은부가 문제올습니다. 저들만 견제할 수 있다면 일이 의외로 쉬울
수도 있어요.
능산 구사일생으로 왕건대장군께서 오늘 목숨을 건지셨습니다만은 얼마나 더 오래 가실 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대장군께서 변을 당하시면 그 다음에는 바로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의 차례올습니다.
배현경 맞아요, 그 이야기는 맞소이다.
복지겸 그래서, 우리가 뭔가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렇게 모인 것이 아니겠소이까? 우리는 모두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기장들이올시다. 군대를 잘 장악해야 할 것 같소이다.
홍유 그러나, 내군에서 눈치를 챈다면 어떤 화를 당할지 모릅니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배현경 이미 우리의 사기장의 뜻은 정해진 것 같소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나라를 바로잡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제도 바꿔야 하는 것이고요.
모두들 .........(긴장하고)
복지겸 그렇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능산 (끄떡인다) 대안을 마련해보십시다. 일단은 군대올시다. 군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예요.
모두들 (끄떡인다)........
홍유 이렇게 되면 실패할 경우는 반역이 됩니다. 반역을 혁명이라는 말로 바꾸자면 우리가 승리를 해야해요. 다행히 백제나 신라와의 사이에 이렇다할 큰 전쟁이 없소이다. 이럴 때 바짝 서둘러서 거사를 해야 합니다. 백제가 조용할 때에 밀어 붙여야지요.
씬 21 백제 황궁 외경
씬 22 동 황궁 어느 곳
문을 열어 놓고, 문 밖을 지나치는 태풍을 보고 있다.
최승우 아마도 폭풍인 것 같사옵니다, 폐하. 참으로 엄청난 바람이옵니다.
견훤 그러게 말일세.
최승우 근래에 전장이 없고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을 하다보니 올해는 그런대로 곡식이 넉넉할 것 같사옵니다.
견훤 그래야지. 사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겠는가? 그놈의 전쟁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은 역시 백성들이야.
최승우 그러하옵니다.
견훤 그동안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전장터에서 보냈는가? 나이 탓인지, 요즘 들어서는 삼국이 이대로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할 때가 많다네. 내 당대에 꼭 통일을 봐야 하는데 말이야.
최승우 그렇게 하실 것이옵니다.
견훤 아니야. 모든 게 마음 뿐이지. 제대로 되지가 않아. 신라는 금방 무너질 듯 하면서도 여전히 잘 버티고 있고, 태봉은 또 어떠한가? 우리 삼국 중에 땅이 제일 넓고 견고해. 쉽지가 않아. 쉽지가....
최승우 삼국을 통일한다는 것이 어디 꼭 힘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겠사옵니까? 그에 걸맞는 운이 따라야 하옵고, 또한 싸움보다는 내정이 단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태봉국은 그런 면에서 아직도 우리보다는 못하옵니다. 기다려보시오소서. 좋은 소식이 올 지도 모르옵니다. 지금 태봉국은 속으로는 썩고 곪아가고 있사옵니다.
견훤 글쎄....
씬 23 철원 황궁 외경
씬24 동 대전
바람 소리만 높게 불고 있다. 천둥과 번개는 멎었다. 궁예가 웃으며 아이를 어르고 있다.
궁예 그래, 순백아. 이제 너하고 나뿐이다. 군주는 본래 강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컸단다. 저 신라의 황실에서 버림을 받고 쫓겨나 거리를 유랑하며 살았다. 너도 강하게 커야 한다. 양지에서 자란 꽃은 거센 바람을 견디지 못한단다. 들풀처럼 거칠게 커야 한다. 거칠게... 그러나, 마음까지 그래서는 안되지. 너는 이름처럼 순백해야 한다. 순백하고 강한 황제가 되라. 강한 황제 말이다. 강한 황제.....! 내가 그 기틀을 다 만들어주마. 허허허.... 어허, 저 바람소리 하고는.. 밤새 불어재끼는구나.
그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궁예의 표정에서.... 어렴풋이 만가 소리가 덮여 든다.
씬 25 철원 시가지(새벽)
요령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꽃상여를 승려들 집단이 메고 가고 있다. 그 상여 앞에 형미가 올라타고 요령을 흔들며 회심곡(상여소리)을 메기고 있다. 허월이 보고 함께 가고 있다. 백성들이 가득히 뒤를 이었다.
형미 (곡조를 붙여)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내 집 앞에 북망일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주오.
상여꾼들 너허, 너허, 너화너.... 너희 가지 넘자, 너화너.
형미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인생사가 찰나인데, 어이 모르고 살았는가? 황후국모가 무엇인가, 윤회 업은 어김이 없네.
상여꾼들 너허, 너허, 너화너.... 너희 가지 넘자, 너화너.
형미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하나가면 하나오고, 인연의 업은 끝이 없네. 죽었다 서러워마소. 한세상이 다시 오네.
상여꾼들 너허, 너허, 너화너.... 너희 가지 넘자, 너화너.
장관이다. 끝없는 횃불들이 뒤를 이었다. 승려들의 표정은 경건하다. 형미는 그렇게 상두가를 뽑아 들며, 대열을 이끌어 가고 있다. 바다 같은 그 숱한 무리들의 표정이 끝없이 지나치고 있다. (사설은 반복해서 계속.......) 그 위로 종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종간 (E) 무슨 소린가, 그게?
씬 26 내원
종간이 잠옷 차림으로 벌떡 일어나며, 금대와 은부를 보고 있다.
종간 상여가 나가고 있어? 뭐라? 승려들이 상여를 인도해가고 있어? 누가? 누구의 상여를 내가고 있단 말인가?
금대 황후마마와 태자마마님들의 상여라하옵니다.
종간 뭐라? 황...황후, 태자들....? 누가... 도대체 누가 그런 참담한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금대 형미라는 고승이 승려들로 하여금 상여를 메게 하고, 백성들이 그 뒤를 끝도 없이 따르고 있다 하옵니다.
종간 이게 무슨 소린가? 아니된다. 상여라니? 다시 가서 알아보아라. 내군들을 동원하여 막아야 한다. 상여라니, 황후의 상여라니? 막아라, 어서 막아라.
은부 ......... ?
종간 이럴 수가 있는가? 승려들이 황후의 상여를 내가? 백성들이 뒤를 따라? (벌떡 일어나서며) 아니다. 아닐세, 가보세. 우리가 가봐야겠네. 상여라니, 상여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당황하는 종간의 그 표정에서....
씬 27 왕건의 집 사랑
왕건이 놀라서 능산을 보고 있다.
왕건 상여..? 황후의 상여..?
능산 예, 주군. 제가 신료들과 이야기가 있어 지금에서야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상여가 나가고 있었사옵니다.
왕건 그것이 황후마마의 상여가 틀림이 없는가?
능산 그렇다하옵니다. 밤새 저자거리를 돌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듣자하니, 형미라는 큰 고승이 그 행렬을 주도한다 하옵니다.
왕건 형미대사가? 형미대사가 말인가?
씬 28 다시 철원 저가 거리
아침이 밝고 있다. 상여는 여전히 그렇게 가고 있다. 형미의 상두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백성들의 후렴도 계속 된다. 마치 한판 놀이처럼 그들은 저자거리를 가득히 밀려가고 있다. 그 한쪽으로 수많은 내군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씬 29 그 곳
은부와 종간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 행렬을 보고 있다. 끝도 없는 행렬들이다. 은부는 겁에 질려있다. 금대, 장일이 함께 해 있다.
은부 내원어른, 저자가 형미라는 중인 모양이옵니다.
종간 이것이 바로 폭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성들의 저항이야.
은부 어쩌면 좋사옵니까?
종간 막아야지. 영을 내리게. 당장 저 상여를 빼앗고, 형미라는 중을 잡아 들이게. 백성들을 해산시켜. 어서....
금대,장일 예, 내원어른.
금대 내군들은 무엇 하느냐? 저자들을 해산시켜라. 형미라는 중을 포박하라.
내군들이 벌떼처럼 달려간다. “서라, 해산하라” 하는 소리들이 뒤범벅된다. 상여가 무너져 내리고, 승려들과 백성들도 혼란이다. 곳곳에서 유혈이 낭자하다. 그 와중에서 형미와 종간의 시선이 부딪친다. 종간은 떨고 있고, 형미는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허월이 있었다.
종간 아니, 허월대사께서....?
허월 이른 아침에 어쩐 일이시오, 내원?
종간 .............?
그런 종간의 표정에서.....
< 116회 끝 > (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