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시> 연재 칼럼 7 (2024년 3월)
패거리 문화
패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외롭다는 걸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필자는 그가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패거리를 짓는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 지향 욕구라고 말한다면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욕망대로 휘두르고 싶은, 그래서 어떤 형태든지 주체가 되어 군림하고 싶은 욕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패거리를 점검하고 관리하면서 아마 그는 점검과 관리라는 말조차 생각지도 못하고 거의 본능적으로 점검 관리하는 듯 보인다.
물론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 어떤 형태든지 사람이란 모여서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모여들 산다. 하지만 모여 산다는 것과 패거리를 짓는다는 것은 그 어감부터 다르듯이 부정적인 독소 들을 거느린다. 요즘 아니 오랜 역사를 지닌 폭력 조직이나 반사회적 불량 써클 등이 대표적인 패거리 들이겠지만, 문단이나 예술계, 무엇보다 정치판에 이런 패거리 문화가 팽배 되어있는 것을 볼 때마다 거의 환멸에 가까운 현기증을 느낀다. 내가 패거리에 못 끼어서 그런 거라고 질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패거리 들이 마구 지껄여대는 말 한 마디들에 베이고 무너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필자는 거의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느끼는 것은 물론 필자를 평생 짓누르고 있던 일종의 피해 의식과의 싸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패거리가 지닌 폭력을 바탕으로 한 비열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혐오감이 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직장에서도 끼리끼리의 패거리 행태가 보일 때 필자는 정말 정처가 없어진다.
어떤 형태든지 인신 공격성 발언이나 집단 따돌림은 안 된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누군가가 좀 튀고 잘되는 듯하면 그 주변 사람들은 아마 본능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그 소외감이 일종의 질투로 변형되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성향 중 하나인 것도 같다.
필자가 교사 10년 차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월반(越班)을 주제로 한 어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 학부형이 한 말이다. 만약 한 명이 월반하여 조기 졸업한다면 나머지 59명이 느끼는 상실감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당시는 한 반 학생 수가 60명 정도였고 고교 평준화 학력 평준화의 문제점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별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마저 패거리에 밀린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도 별로 뛰어나지 못한 자식을 둔 부모로서 그 학부형의 상실감을 충분히 이해는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자식의 소외감을 문제 삼아 뛰어난 아이가 내내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학교 시스템에 정체되어서 억지로 학기를 채우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그래서 우수한 이 땅의 인재 들이 해외 유학 후 잘 돌아 오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 건 아닐까.
유대인들은 같은 반 아이가 월반하여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하여 성공한다면 그 아이를 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아이와 한 반이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이런 점이 지금 이스라엘의 힘의 뿌리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거의 모든 부분의 핵심에 유대인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조그만 조국 이스라엘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유대인을 특별히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호랑이는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호랑이의 먹이가 무리 지어 다닐 뿐! 이는 가능한 저 대신 운 좋게 남이 먹이가 되길 바라기 때문에 짓는 무리일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은 당연히 아름다운 일이고 인간들의 운명이다. 하지만 모여 사는 거와 패거리는 다르다.
이승훈 선생님
선생님은 정신적 갈증에 시달리셨고 나는 현실적 공복에 시달렸다. 선생님은 젊은 대학 강사였고, 나는 몇 번의 휴학 과정을 거친 좀 나이 먹은 고학생, 선생님의 제자였다. 선생님은 성실해 보이는 마른 체형이었고, 나는 게을러 보이는 비만형이었다. 선생님은 내성적 성격이었고, 나는 좀 거칠고 조급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독하게 배고프고 외로웠던 나의 대학 생활 내내 선생님의 우울한 시와 강의에 압도당했고, 졸업 후 겨우 배고픔을 면한 후에도 그 우울은 평생 나를 실체 없는 피해 의식과 열등감에 시달리게 했다. 선생님은 나의 습작시를 다듬어 준 스승이었고, 내 습작시 <手話>를 나도 모르게 <현대문학지>에 일면식도 없는 시인(박양균)의 추천으로 실어준 분이셨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사는 일에 휘둘린다는 핑계로 나의 재능 없음을 합리화했으며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당시 나는 문단에 적응하는 방법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문우도 없었고, 사교적이지도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선생님과 나는 점점 멀어졌으며 그건 일종의 필연이었다. 그리고 나는 멀리서 선생님이 점차 저명한 교수, 권위 있는 이론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 시인, 힘 있는 문학지의 주간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늙어왔다. 하지만, 멀리서나마 나는 선생님의 시와 시론들을 빠짐없이 읽어내려 노력했다. 선생님은 끝내 나의 이런 노력 들은 알지도 못하고 지난 겨울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선생님과 작별하지 못하고 있고 아마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럴 것만 같다. / 2018년 9월 14일
춘천공원묘원 / 김민홍
벼르고 벼르다가 / 이승훈시인께 다녀왔다 // 춘천공원묘원으로 이사하신지 / 벌써 오 년이 지났구나 // 눈부시게 양지바른 묘 앞 / 따가운 햇살 속에 잠시 서 있었다 / 고향도 선산도 없고 / 묻힐 곳도 마땅치 않은 나는 / 이런 풍광 속으로 스며들진 못하겠지 // 관리실에서 꽃 몇 송이 사서 / 시인께 드리고 / 평소 좋아하시던 맥주는 따라드리진 못했다 / 당분간 생의 변두리에서 더 시달려야 할 / 나의 음주운전이 될 것만 같아서 // 비석 뒤의 지상에서의 이력을 / 다시 꼼꼼히 읽었다 / 촌놈인 스무 살짜리 국문과 일 학년 봄 / 최초로 만난 나의 詩 은사의 / 묘비문 // 춘천공원묘원엔 / 대한민국 시인 이승훈이 계신다 / 내겐 / 공원 전체에 이승훈 시인만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