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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1]
인천 국제공항 출발 (오전 10시)
후쿠오카 국제공항도착 (오전 12시)
점심 식사후 → 나가사키 이동 (대략 2시간)
▷나가사키 주교좌 성당 - 우라카미성당 (미사봉헌)
▷평화 기념 공원
▷ 여기당
저녁식사 및 호텔 휴식
일본 가톨릭교회는......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 도착으로 가톨릭 신앙이 전해졌다.
지방 영주의 개종 등에 힘입어 당시 신자수는 30만을 넘어서는 등 교세가 급성장했으나,
1587년 총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제추방령을 내리면서부터 시작된 박해는
1614년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금교령(禁敎令)을 선포한 이후 259년간 혹독하게 이어진다.
그렇게 일본교회는 침묵했다.
개화기 이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숨어서 신앙을 이어온 신자들(가쿠레 기리스탄)이 발견됐고,
새롭게 교계제도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교세는 16개 교구 신자 50여만명 정도~
유명, 무명의 순교자를 모두 합치면 4~5만 명의 순교자가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수많은 순교자 중에 1862년에 성인반열에 오른 ‘26 성인 순교자’와
1987년에 시성된 ‘성 토마스와 15 순교자’, 1867년에 복자품에 오른 ‘205 순교 복자’를 모시고 있다.
우라카미 성당 (浦上天主堂)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기독교(가톨릭) 성당이다.
성당은 이전 이름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이라는 이름으로도알려져 있다.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파괴되었으나, 1959년에 재건되었다.
1962년 이후 가톨릭 나가사키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소속 신도수는 약 7천명으로,
건물 및 신도 모두 일본 최대 규모의 가톨릭 교회이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막부)의 금교령은 우라카미 신앙공동체에도 위기를 불러왔다.
우라카미의 신자들은 비밀교회를 만들어 250년간 신앙을 이어왔고
1865년 오우라성당에서 쁘띠쟝 신부를 만난 신자들이 불교와 단절을 공표하자
메이지정권은 1867년 3,394명의 신자들을 전국으로 6년간 유배시켰다.
우라카미 신자들은 이 유배를 '신앙여행'으로 받아들였다.
1873년 금교령 해제 뒤 유배에서 돌아온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에 감사하며
1925년 천신만고 끝에 당시 동양최대 규모의 우라카미 성당을 완공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안타깝게도 1945년 8월 9일 원폭으로 파괴되었고,
이 원폭으로 성모승천대축일을 준비하던 사제 두분과 신자 24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12,000명의 신자중 8,500명이 목숨을 잃는 대참사를 겪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당은 원폭으로 기둥만 남아있던 성당자리에 1959년 재건한 성당인 것!
長崎平和公園
1945년 8월 9일에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투하된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와
그 북쪽의 언덕 위를 포함한 지역에 평화를 위해 마련됐다.
북쪽 언덕 위의 평화공원에는 공원을 상징하는 평화기념상이 있는데,
높이 9.7m, 무게 30톤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모습이다.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살짝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평화공원 입구에는 평화의 비둘기와 학의 날개를 상징하는 분수가 있어
피폭 후 극심한 갈증 속에서 죽어가던 희생자들의 넋을 달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의 조각상이 당시의 참상과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전시되고 있다.
여기당(如己堂)
뇨키도(重古道)는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건물로,
나가이 다카시가 백혈병에서 회복하면서 집필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약 3년 후인
1948년(쇼와 23년) 3월에 나가사키시 우라카미 시민과
천주교의 협력을 받아 축성되었습니다.
이 다다미 2칸의 방에서 나가이 다카시의 유명한 작품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바오로) (1908~1951)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이자 의사였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피폭되었으며 부인을 잃었고
병석에 누워서도 늘 하느님께 기도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책을 집필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1948년 우라카미의 신자들이 마련해 준 다다미 2장의 작은 집에서
나가이 박사는 두 아이와 함께 살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오직 원폭 피해자 치료에 여생을 바쳤다.
병석에서 붓글로 쓴 '평화'라는 글자 1000장을 국내외로 우송하여
두 번 다시 인류에게 전쟁과 원폭 없는 평화를 지키려 호소했다.
나가이 박사님은 1908년 시마네현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무사집안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여 방사선학을 전공하고
1933년 2월 군대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만주사변에 종군하였다.
가톨릭 집안의 후손인 부인 미도리 여사의 영향으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바오로 였다.
제대후, 나가이박사님은 대학병원에서 결핵성 질환 근절을 위해
열악한연구시설로 인해 <만추골추성 백혈병> 걸리게 되였다.
남은 생애는 3년이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연구에 매진하였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도 병원에서
X-RAY 필름을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다행해 목숨을 건졌으나 집에 돌아왔을때
사랑하는 아내는 이미 죽었고 두 아이만 살아 있었다.
그후 박사님은 폐허가 된 집터에 신자들이 마련해준
다다미 2장의 작은집 `여기당`에서 누운채 실명에 가까운 눈과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14권의 책을썻다.
<나가사키의 종> <묵주알> < 로사리오의 쇠사슬>등 저술 활동을 통하여
`참된 평화의 길`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누워서 지내는 처지였지만 당시 일본 천왕과 헬렌 켈러 등 유명인사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러 왔다,
그는 저서를 통해 전쟁과 적이 없는 평화와 사랑을 호소하였고
평화의 수호자로 `평화`란 글자를 친필 붓글로
1,000장을 병석에서 써서 국내외로 우송하여
두 번 다시 인류에게 전쟁과 원폭이 없는 평화를 지키려 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축복 서한을 보냈고,
나가사키시에서는 명예 시민증 1호를 수여하였다.
1951년 5월 10일 사망할 때 43세였다.
[Day2]
▷ 타비라성당
▷ 사세보 미우라 마치 성당
(미사 예배)
▷ 히라도 프란치스코하비에르 기념성당
중식
▷ 복자 카밀로콘스탄치오 신부 처형터
▷ 타비라성당
▷ 오후라성당
사세보 미우라 마치 성당
1930년에 세워진 하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제 2 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에 의해 감시되어 공습을 피하기 위해
흰색 외벽을 콜타르로 칠하고 검은 모습이되었습니다.
종전 후 외벽은 원래의 흰색 모습으로 복원되었지만,
교회 바로 아래를 달리는 35호선의 확장에 따라 앞의 산이 깎여나가
반쯤 뒤쪽의 가파른 계단으로 옹벽을 올라갑니다.
1549년 예수회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신부가 복음을 전하면서
일본의 가톨릭 역사는 시작되었다.
일본 큐슈(九州) 남부 가고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하비에르 신부는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와 불승들이 박해하자
1550년 9월 나가사키현 남서해 지역에 있는 히라도(平戶)로 옮겨 복음을 전했다.
당시 히라도는 국제 교류 도시로 16세기부터 유럽 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아시아와 유럽이 섞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또 히라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많은 병사를 파견했고,
이곳 다이묘 마츠우라는 귀국 할때 조선 도공 100여 명을 끌고와
'히라도야키'라는 도자기 문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에서 머문 약 한달 동안
다이묘 마츠우라 타카노부(1529~1599)의 가신인
키무라 집안 사람 1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 후손들 중 키무라 세바스티아노는 일본인 최초의 예수회 신부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끌려와 세례를 받은 조선인 코라이 안토니오는 히라도에서 순교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잇따른 가톨릭 금교령으로
300여년 동안 박해를 당하면서
순교자들과 신분을 감춘 채 숨어 살았던
가톨릭 신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일본 전역에서 불교사원과 가톨릭교회가 같이 공존하는 보기힘든 지역이라고.
히라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일본의 한 동네를 지나 절을 끼고 있는 돌담길을 올라야 한다.
언덕 위로 고딕식 성당이 보이고 그 아래로 3개의 절이 앉아 있는 재미있는 풍경.
코우묘우지(光明寺)와 즈이운지(瑞雲寺)의 사찰 건물과
연한 올리브색 고딕식 성당이 어우러진 모습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 성당
히라도의 상징인 히라도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히라도 선교를 기념해 1971년에 건립한 성당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주첨탑을 작은 첨탑들이 둘러싸고 있는
독일식 고딕양식 건축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보이는 방향으로 오른쪽 중간 첨탑이 하나 없이 완공된 성당.
건축비가 모자라 첨탑을 못올렸다는데 오히려 그것이 성당을 더 아름답게 해 찾는이들이 많다는~
그분은 이렇듯 '나쁨=모자람......'을 '좋음=넘침......'으로 바꾸어주시는 임마누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4.7-1552.11.2.)
스페인 바스크 출생,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예수회 공동창설.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는 인도 고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말라카에서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고 이는 일본 선교의 계기가 된다.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도착, 1550년 히라도, 나가사키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중 광동성 앞 섬에서 열병으로 선종,
1622년 3월 22일 시성,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축일은 12월 3일.
田平天主堂 타비라성당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다히라 교회(가톨릭 다히라 교카이)라고 불리며,
그 위치를 따서 세토야마 천주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히라도시시 다히라초 서쪽의 탁 트인 언덕에 세워진 붉은 벽돌 교회에서는
히라도 세토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히라도 다리가 내려다보이며
사진과 그림의 소재로 자주 사용됩니다.
타비라 성당(田平天主堂)은 1886년 이후 라게 신부와 드로 신부가 사들인 땅에
나카타 토키치(中田藤吉) 신부가 프랑스 독지가의 후원과 신자들의 노력을 발판삼아
1915년 테츠카와 요스케(鉄川与助1879-1976 ) 설계로 착공, 1917년에 준공하였으며
1918년 벽돌 건축 양식의 교회를 완성해 봉헌하였다.
나가사키현 안의 벽돌식 성당으로는 가장 늦게 세워진 성당.
성당 정면에 팔각형 돔의 종탑을 세웠으며 외벽은 벽돌과 목조를 사용,
특히 벽돌의 색이나 쌓는 방법에 적절한 변화를 주어 다채롭게 마무리하였다.
내부는 나무에 페인트칠로 마감했는데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높은 아치창문, 동백꽃 부조,
제대와 난간을 칠한 금색이 화려하다.
교회는 히라도(平戸)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있으며
사제관과 문기둥, 돌계단, 돌담, 조개소각장 등이 남아 있고
주위에는 묘지와 밭이 펼쳐지는 등 역사적인 환경이 잘 보존되어
2003년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벽돌, 기와 시멘트, 목재 같은 건축자재는 배로 옮겨졌고,
벽돌을 붙일 아마카와(석회와 적토를 섞어서 만든 접합제)의
재료인 석회는 신자들이 히라도 바닷가의 조개껍질을 모아
태워 만들었다니 당시 신자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이 성당은 "일본의 26명의 거룩한 순교자"에게 봉헌하기 위해 봉헌했습니다.
야이자 사적 공원焼罪史跡公園
‘죄를 불태운 유적공원’이라 씌어있습니다. ‘燒罪史跡公園(소죄사적공원)’입니다.
순례자들의 기분을 씁쓸하게 하는 명칭입니다.
국법을 거슬러 범한 죄를 불태워 없앤 기념공원이라는 뜻입니다.
국사범을 처형한 자리입니다. 그 징벌을 기억하라는 경고의 자리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카밀료 콘스탄시오 신부가 1622년에 화형 당한 곳입니다.
콘스탄시오 신부는 1591년에 일본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614년에 마카오로 추방당했는데, 1621년에 비밀리 다시 돌아와
선교를 계속하던 중 다시 체포되어 1622년에 50세의 나이로 화형 당하여 순교합니다.
복자로 시복 된 카밀료 콘스탄시오 신부의 순교 장면을 형상화하여 조형물이 탑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 둥둥 떠서 태워지는 순교자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있습니다.
그 형상의 탑 너머 물결 위에 솟은 히라도 성(平戶城)은
지금도 우리 순례자들을 향하여 경고를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통치권을 거스르면 이렇게 불태워진다고!
그러나 우리의 신앙증거란 그렇게 불같은 열정으로 타올라
세상을 비추는 것이어야 한다는 감흥으로 순례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오우라 천주당
오우라 천주당(일본어: 大浦天主堂、おおうらてんしゅどう 오우라 텐슈도)은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일본 26위 성인 성당(日本二十六聖殉教者堂)이라고도 불리며,
1853년 일본 정부의 쇄국주의가 끝난 후에 곧바로 건립되었다.
일본의 국보 가운데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면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기도 하다.
성 필립보 성당(26 성인 기념성당)
26성인 기념성당인 성 필립보 성당은 순교자 26명이 성인품에 오른 100주년을 기념해
1962년 26성인 기념관과 함께 니시자카 언덕(서판공원)에 세워졌다.
원래 기념관과 사제관만을 짓기로 했으나
26성인 중 하나인 멕시코 수도자 성 필립보 데 헤스스를 위해 멕시코 정부가 보낸 기금으로
26성인 기념성당 성 필립보 교회도 설립됐다.
이 성당은 지붕에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26성인이 걸어온 길의 도자기 가마에서 모은
도자기 조각들로 마감한 탑을 세웠으며, 제대에는 26개의 십자가가 조각돼 있다.
설계자 이마이 겐지로는
성가족성당을 설계한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일본에 소개하였으며
그래서인지 두 개의 첨탑이 가우디의 작품들이랑 묘하게 닮아있었다.
멕시코의 기부로 1962년 6월 완공되었다.
성 필립보 성당은 도자기 조각으로 마감한 두개의 첨탑이 뿔처럼 높이 솟아있었다.
왼쪽탑은 기도와 찬미를 뜻하며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주는 성모님을,
오른쪽 탑은 천상 은총의 통로로 성령의 은혜를, 피뢰침은 지상승리의 왕관을 상징한다고 한다.
[Day3]
▷ 콜베수도원성당 미사
▷ 침묵의 비
▷ 시츠성당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기념관, 혼고우지성당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폴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며 순교자, 성인으로 속명은 라이문트 콜베(Rajmund Kolbe).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제.
가톨릭과 성공회, 루터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며 축일은 8월 14일이다.
기자, 정치범,아마추어 무선 (HAM), 약물중독자, 가족, 낙태 근절 운동의 수호성인이며 미디어를 활용한 선교의 선각자.
나치 독일 치하에서 수천명의 유대인을 숨겨주었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그곳에서 다른 사람 대신 죽기를 청해 순교.
혼고우지 성당
1930년 나가사키에 도착한 콜베 신부는
1931년 혼고우치 히코산 기슭에 '원죄 없으신 성모원'이라 부르는 '성모 기사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6년 동안 청빈을 지키며 선교(나가이 다카시 박사 세례)와 교육을 하고,
결핵으로 1936년 폴란드로 귀국한 후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성콜베 기념관
콜베 사제는 1930년부터 나가사키에서 약 6년간 일본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생 교육, 가난한 이들 구호를 비롯해 현 히코야마 중턱인 혼고우치에 성모의 기사 수도원을 설립했다.
기념관은 1971년 콜베신부 복자품을 기념해 지어졌고, 그의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신부는,
1910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고,
1911년 첫 서원. 1914년 유학간 로마에서 종신서원,
마리아 신심을 표현하고자 수도명에 '마리아'를 덧붙였다.
로마 대학에서 철학, 신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1915년 로마의 신학교인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리메이슨의 반교황 캠페인에 대항해 6명의 동료 수사들과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소책자와 월간지를 출판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콜베 수사와 그의 동료 수사들은 교리문답과 짧은 기도 소책자,
23만 부수의 일간지, 백만 부수가 넘는 월간지를 출간하면서
언론인의 수호성인의 근거가 되었다.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9년 폴란드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프란치스코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라디오 방송국과 출판 사업에 참여하여 언론인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6년간 머물렀다.
일본에 가는 도중 부산에도 잠깐 들렀다.
귀국한 뒤 니에포칼라누프(Niepokalanów)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939년 폴란드가 독일 나치에 점령되며 콜베 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이에 콜베 신부는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등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게슈타포에 체포.
당시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폴란드의 유력 인물도 체포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소장은 네에포칼라누프 수도원에서 퇴회한 前 수도자의 명의로 제출된 것이었지만,
게슈타포가 쓴 독일어 고소장에 독일어를 읽을 수도 없는
전 수도자를 협박해 사인만 한 것이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죄수 번호 16670번으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나오자
수용소 지휘관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1903 ~ 1945)는
14A동 블럭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내 그들을 아사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이 10명 가운데 폴란드군 중사였던 프란치셰크 가요브니체크
(Franciszek Gajowniczek, 1901.11.15.~1995.3.13.)라는 사람이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그러자 콜베 신부는 "나는 가톨릭신부입니다.
가요브니체크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라 청하였고 프리치는 이를 승락했다.
콜베 신부와 9명의 죄수가 지하감옥(일명 '13호 감방')에 갇혔다.
콜베 신부는 지하감방에서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음식도 물도 주지 않은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1941년 8월 14일 나치는 병원 잡부로 일하는 범죄자 보프를 시켜서
페놀을 주사해 살해하였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가요브니체크는
1944년 8월 25일까지 아우슈비츠에 있었고,
다른 캠프로 보내졌다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살아남았다.
그의 아내 엘레나는 살아 있었지만,
아들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소련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가요브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콜베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알려지도록 세계 각지에서 강연했다.
시복식(1971년 10월 10일)과 시성식(1982년 10월 10일)에도 참여했다.
엔도슈사쿠 遠藤周作(원등주작)의 '침묵'의 비(沈默の碑)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人間はこのように悲しいが 海があまりにも青いです
엔도 슈샤꾸(1923~1996)는 가톨릭 신자이고 신앙적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그의 '침묵'(沈默)은 참 많은 질문을 주었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박해 때문에 배교하는 사제의 이야기는 그 후 재미 한인소설가 김은국(金恩國 리처드 김)의
'순교자(殉敎者 Martyr)'와 함께 극한 상황 속에서 신앙을 지킬수 있는 것인지,
하느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깊은 도전을 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침묵의 배경이 된 일본 나가사키의 바닷가에 엔도 슈샤꾸 문학관이 있고
침묵의 비가 세워져 있고 그리고 엔도 슈샤꾸가 쓴 한구절이 있군요.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시츠성당
1865년 3월 “신자 발견” (오우라천주당)뒤, 프티쟝(Bernard Thadée Petitjean) 신부는
9월에 소토메(外海)를 찾아와 신자들을 만났다.
그리스도교 금령이 풀린 뒤
시츠(出津)에 임시 성당을 짓고 선교를 한 페뤼(Albert Charles Arsène Pélu)신부에 이어
1879년 소토메에 부임한 드로 신부 (Marc Marie de Rotz, 1840-1914)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앙 생활의 거점이 되는 시츠(出津)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박해를 딛고 신앙을 되찾은 소토메 신자들을 위해 지은 이 성당은
오로지 실용성에 중점을 둬 건축비용을 최소화했다.
드로 신부는 사비를 들여 소토메 마을에서 잘 보이는
약간 높은 산비탈 땅을 산 뒤 직접 설계하고 시공을 했다.
신자들은 동네 단위로 번갈아 가면서 노동 봉사를 하면서
신앙의 터전인 성당을 지어나갔다.
(산에서 베어 낸 목재를 운반하거나 바닷길로 실어온 벽돌을 해변에서 옮기는 일)
계단식 밭 한가운데에 착공한 시츠성당은 이듬해인 1882년
벽돌에 회반죽을 바른 아름다운 성당으로 완공되었다.
1891년과 1909년에 증∙개축을 함으로써 두 개 종탑을 갖춘 독특한 외관을 지니게 되었다.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성당은 견고한 외관에
아치형 입구와 창틀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하고 있으며
성당 내부는 단순하지만 제대부분을 반원형 평면으로 지어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바람이 센 소토메(外海)지방의 기후를 고려해서 지붕을 낮게 만들었다고.
[Day4]
▷ 니시자카 순교터
▷ 운젠
중식 후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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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26인 성인 순교지 (니시자카 순교터)
일본 26위 성인은 1597년 2월 6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책형을 당한 26명의 천주교 신자이다.
통상 26 성인의 순교라 지칭하고, 이들을 일본 이십육 성인이라 부른다.
26명 모두 일본인은 아니고, 스페인인, 중국인, 인도인, 멕시코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처형된 지 265년 뒤인 1862년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이들은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과 비슷한
니시자카(西坂)에서(나가사키역 근처) 죽기를 원했고 처형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순교성지가 되었으며 기념관도 함께 있다.
운젠 지옥 (온천)
운젠산은 운젠다케와 후겐다케라는 두개의 큰봉우리에서 가스가 계속 분출되고 있는 활화산이다.
이 화산의 활동으로 운젠은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온천지역으로 알려지며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서양무역상인들의 여름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다.
약 30종류의 지옥온천이 점재되어 있다.
유황 냄새가 진동하고 화산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물과 수증기, 열기, 습기 등이 지옥 같다 하여
운젠 지옥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일본의 기리시탄에게는 정말로 지옥이었다.
이 운젠 지옥에서 배교를 거부한 일본 가톨릭 신자들이 칼에 온몸을 찔린 채
120도의 뜨거운 화산 열탕에 담금질당하는 잔혹한 고문 끝에 33분이 순교했기 때문이다.
운젠은 황화수소에 좀 더 강한 철쭉류가 퍼져있는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데
순교자들이 흘린 피처럼 붉은? 철쭉이 유황냄새 진동하는 산기슭 바위 틈사이에 피어있었다
운젠지옥 중턱에 있는 '오이토 지고쿠'에는 나가사키대교구에서 1961년에 세운 십자가 순교비와
1939년에 설치한 성화 비석이 있다.
십자가 순교비에는 안토니오 이시타 신부와 미카엘 나카시마 수사 등 순교 복자 6위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성화비석에는 시인 이쿠타 쵸스케가 운젠의 붉은 철쭉을 순교자가 흘린 피에 비유해 지은
'성스러운 불이 타오르다'라는 싯구 한구절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