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새로운 발견―제주도가 정녕 이런 곳이었단 말인가
‘제주 답사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번째 ‘제주답사 일번지’에 등장하는 지역은 제주의 동북쪽 조천과 구좌 부근이다. 이 지역은 다랑쉬오름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오름, 돈지할망당·갯것할망당에서 엿볼 수 있는 제주의 신앙, 그리고 제주 해녀의 1/10이 여전히 활동 중인 하도리의 물질 풍경 등 제주의 자연과 인문의 속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제주의 현대사를 가장 비극적으로 만든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없는 일’ 4·3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이 지역은 제주 자연의 대표적인 상징인 기생화산, 즉 오름의 왕국이다. 특히 제주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할 당시 기적적으로 발견된 용천동굴 이야기는 세계적인 평가를 통해 제주 자연의 가치에 한층 더 자긍심을 갖게 만들어준다. 또한 해녀 이야기를 제주어의 맛을 살려 풀어주는 ‘제주 삼춘’들의 에피소드는 육지사람들은 물론 제주인들에게조차 신비롭고 재미있는, 답사기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다.
두번째 ‘한라산 윗세오름 등반기’에 등장하는 영실은 저자가 꼽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꽃이 흐드러지면 또 그런 대로 가장 아름다운 이곳은 험한 등반 코스가 아니면서도 한라산의 전모를 한껏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실 등반 코스는 서막인 울창한 숲길을 지나, 제1막 오백장군봉, 제2막 진달래 능선, 제3막 구상나무 군락지, 제4막 윗세오름을 지나 백록담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숨가쁜 등반 중에도 저자는 입담을 발휘하여 백호 임제의 『남명소승』과 오백장군봉의 설문대할망 전설을 소개하고, 최익현의 ?유한라산기?를 노래한다. 진달래 능선에 도착해서는 아예 자리를 펴고 관광하러 온 팔도 아줌마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팔도 사투리와 입말이 살아 있는 ‘팔도 아줌마론’을 구성지게 풀어놓는다. 그 산길에서는 또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를 가져가 오늘날 크리스마스트리의 주종이 되는 나무 종을 만든 영국의 식물학자 윌슨과 한라산의 높이를 최초로 측정한 겐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세번째는 ‘탐라국 순례’로 탐라국에서 제주도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제주의 고·양·부 3성의 시조가 태어난 전설이 얽혀 있는 삼성혈과 삼양동 선사유적지를 시작으로 고려시대 몽골에 항거한 삼별초의 유적, 제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 중 하나인 관덕정을 거쳐 다섯 성현을 모신 오현단, 그리고 조선시대 의녀 김만덕 할머니를 기리는 공간까지를 소개한다. 일반 관광지로도 널리 알려진 관덕정과 삼성혈은 그 역사적 의미나 가치를 모르고 간다면 사실 별달리 눈길이 가는 곳이 아니다. 스토리가 빠진 단순 관광이라면 어디라도 그렇겠지만 유난히도 현대화되고 화려한 관광코스가 많은 제주에서라면 더군다나 그런 곳은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이다.
“전설이 유물을 만나면 현실적 실체감을 얻게 되고, 유물은 전설을 만나면서 스토리텔링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 저자는 이를테면 삼양동 검은 모래 해수욕장은 육지의 관광객이나 일본 관광객들까지도 많이 찾는 모래찜질로 유명하지만 바로 그 위쪽에 있는 선사유적지에 들르는 사람은 극히 드문 점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는 학자들의 지나친 학문적 신중성과 엄숙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김만덕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표준영정까지 제작하는 등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된 김만덕 할머니를 돌아보는 공간에 들어서면 정작 그 묘소는 초라하게 방치되고 엄청난 규모의 기념탑이 세워져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든다며 애석해한다.
제주의 심장으로서 광장의 역할을 해야 마땅한 관덕정 앞마당의 오늘날 모습에 대한 아쉬움, 테마파크처럼 복원해놓은 채 출입을 금해놓은 제주목 관아 보존 방식에 대한 충고, 본래의 소박하고 조촐한 다섯 기의 비석 옆에 현대식 비석들이 난립한 오현단의 모습에 대한 개탄 등 여전히 갈 길이 먼 문화재 행정과 지자체의 인식 부족에 대한 아쉬움 등을 토로하는 대목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네번째 지역은 ‘제주의 서남쪽’으로 하멜과 서복의 흔적이 남은 산방산 일대, 일본군 진지동굴과 알뜨르 비행장이 있는 송악산 일대, 추사가 유배 왔던 대정, 그리고 제주 추사관이 자리하고 있고 대정향교와 대정읍성에서 가까운 모슬포 일대가 펼쳐진다. 이 지역에서는 『완당평전』을 썼던 저자의 김정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재청장 재임 당시 제주 추사관을 재건하며 경험했던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소개된다.
마지막 ‘가시리에서 돈내코까지’에서는 제주마, 토종닭 마을, 재일동포 공덕비 등을 둘러보며 그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특히 제주의 자연, 문화, 신앙, 언어, 역사 등을 집약하며 ‘제주학’의 경지를 지향했고 저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주요한 두 인물인 ‘나비박사’ 석주명과 일본인 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이찌(泉靖一)를 소개한다. 이 책 전편에는 오늘의 제주를 만든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특히 이 두 인물의 이야기는 이채롭고 뜻깊다.
‘답사기’의 새로운 경지
주목받지 못하고 제대로 조명된 적 없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일깨우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유홍준 교수의 섬세한 시선과 해박한 인문적 해석은 이번 제주편에서 문화유산뿐 아니라 제주의 자연, 민속, 언어에까지 미친다. 저자는 이에 예의 답사기가 문화유산에 집중했다면 이번 답사기는 그 폭과 깊이를 동시에 꾀하며 궁극적으로는 ‘제주학’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다. 새로운 옷을 입은 답사기 제주편 ‘감귤 에디션’이 일상의 새로운 활력에 목마른 모든 독자들에게 청량감 있는 여행 경험으로 다가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