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은 하느님이 갚아주신다
옛날 어느 왕이 성탄 전날 밤 거지처럼 변장하고,
동냥 바가지를 든 채 여러 집을 돌며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은 문도 열어주지 않고, 문전박대하였습니다.
어느 집은 기분 좋은 성탄절 이브날 거지가 찾아온 것이 불길하다며 동냥 바가지를
깨뜨리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느 집은 먹을 수 없는 썩은 음식을 주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고, 또한
왕이 거지 행색을 잘 흉내 내는 바람에 왕을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성탄절 저녁 만찬에 이들 모두를 궁궐에 초대하였습니다. 초대를 받은
백성들은 잔뜩 기대하며, 다들 말쑥한 옷을 입고, 궁궐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식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문전박대하며,
문도 열어주지 않았던 가족에게는 빈 접시들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에 불길하다며 동냥 바가지를 깨뜨린 가족에게는
식탁 위에 음식은 없고, 깨진 접시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썩은 음식을
준 집은 곰팡이가 끼고, 변질되어 먹을 수 없는 음식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식탁에는 산해진미로 푸짐하게 잘 차려진 진수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쟁반 위에는 감자 크기의 황금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습니다.
바로 이 집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젯밤 왕이 방문했을 때
자기들이 너무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다며, 감자 몇 개를 주었던 것입니다.
위 이야기가 신앙의 관점에서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만큼 하느님에게서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
“자선을 베풀 때에는 아까워하지 마라.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토빗 4,7).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빗 4,11).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 19,17).
오늘 대림 제3주일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정한 자선 주일입니다.
1984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제39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선 주일은 국내의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나눔 실천을 강조하는 날입니다.
재물은 똥(?)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으고 모을수록 악취가 나고, 모여진 곳은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돈, 재물이 모여지고
모여진 곳에서 악취가 나는 뉴스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으지 않고,
뿌리고 뿌릴수록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거름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재산을 기부하는 뉴스를 볼 때면, 세상이 훈훈해집니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글 : 서철승 가롤로 신부 – 전주교구
우리는 함께 꿈꾸어야 한다 !
2022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 주일입니다.
이제 하나 남은 하얀 초에 불이 켜지면 곧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지요?
2004년 방송작가로 가톨릭평화방송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한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딛고 서서
항상 두 눈은 하늘에 향해 살아야 한다.”고요. 그리고 그 말씀은 방송작가 생활을
하는 내내 모든 원고에 기본적으로 녹아있는 하나의 신념 같은 게 돼 버렸습니다.
지금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되어야 한다고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왜 종교방송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
‘언제부터 가톨릭교회가 특정 정당 편이 됐느냐?’ 이런 항의에 직면할 때마다
그 신념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초대 브라질 주교회의 의장으로 브라질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빈민의 성자’로 불렸던 엘데르 카마라 대주교님이 한 말입니다.
심지어 엘데르 카마라 대주교님의 이 말을 인용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조차
부자와 경제구조, 정치 지도자들의 양심 문제를 지적하며
부의 재분배에 대해 말씀하시자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으셔야만 했었죠.
이런 일부의 비판이 나오는 것엔 모든 것을 정치적 잣대로 재고,
내편 네 편으로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기성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다 함께 잘 살아갈 방법을
머리 맞대 고민하고 연구해 보자는 요구를 마치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라, 이런 협박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기득권의 욕심인 거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아파트 건설현장과 빵 공장 생산현장,
심지어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거닐고 즐겨야 할 거리에서 느닷없이 맞이해야 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의 불똥이 나에게 튈까,
비판의 통로조차 차단하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이냐
묻고 또 구조적 개혁을 요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원의 봉사자인 교회는 추상적 차원이나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 계획에 협력하도록 부름 받는다.”
(『간추린 사회교리』 60항)라고 우리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물론 전국 교구 산하엔 복음 선교와 가정 생명의 중요성,
노동과 사회복지, 생태환경, 정의 평화 등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실현하는 데
필요한 사목 기구와 각종 위원회를 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기구의
활동 목적은 바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어떤 모습인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심 깊게 바라보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 우리 신앙인들이, 우리 교회가
좀더 꼼꼼히 살피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하나하나 찾아내며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10여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리우데자네이루 세계청년대회에서
세상 젊은이들을 향해 “삶을 ‘발코니’에서만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예수님은 ‘발코니’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한가운데로 던지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 30대 나이만 젊은 청년들에게 해당되는 요청이 아니라,
늘 신앙적 젊은이로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요청하시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우리 가톨릭교회 역시 야전병원인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뭉치의 교회가 되기를 요청하셨음을 기억합니다.
‘공동체는 탁월한 개인보다 언제나 지혜롭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톨릭교회가 ‘시노달리타스’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주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식별이 공동체의 식별이 되고, 공동체의
식별이 우리 교회 전체의 식별이 될 수 있도록 성령 안에서 함께 꿈꾸면 좋겠습니다.
엘데르 카마라 대주교님의 말처럼 한 사람이 혼자서 꿈꾸면 그것은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모두 함께 꿈꾸면 그것은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2023년 새해엔 지금 꾸고 있는 나의 꿈이 우리 공동체의 꿈이 되고,
우리 공동체의 꿈이 전체 교회의 꿈이 되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세상 모든 이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멘.
글; 이지혜 체칠리아 / 대구 CPBC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