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
한 없이 크고 넓어 확연(廓然)이 되었다오.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라도 서원 중 하나다. 이곳에는 16세기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인후는 장성 맥동리(麥洞里) 출신으로 1540년 대과에 급제해 세자(인종)의 사부가 되었다. 학문을 숭상하고 도의를 실천하려고 했으나 인종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 후에는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쓰면서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필암서원 방문은 그의 사상과 업적을 찾아가는 두 번째 답사가 된다. 필암서원은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다. 황룡면이라는 지명은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에서 나왔다. 황룡강은 내장산 줄기인 입암산에서 발원해 장성군을 관통해 광주시 용두동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 필암서원을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장성나들목을 나와 장성역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황룡강을 건너야 한다. 필암서원은 취암천 북쪽에 있어 하천을 따라가야 한다.
필암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후 위상이 더 높아져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난해보다 관광객이 적어 여유 있게 서원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출입절차는 더 까다로워졌고,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그 대신 이번에는 필암서원 도유사인 김성수 선생을 만나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이다. 그는 또 필암서원에서 발행하는 책을 한 보따리 주며 팔봉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을 하는 우리를 격려했다.
필암서원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홍살문이다. 홍살문 오른쪽으로는 은행나무 녹음이 무성하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인 확연루(廓然樓)가 있다. 확연루는 다른 서원의 누각과 달리 바깥쪽으로 문이 달려 있다. 이들 문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확연은 ‘한 없이 크고 넓은 하늘’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마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팔자지붕 건물이다. 확연루가 처음 세워진 것은 필암서원이 현재 위치에 자리 잡은 1672년이다. 그 후 불에 타 1752년 다시 세웠다. 확연루라는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확연루 안에는 김시찬의 확연루기(1760), 송명흠의 필암서원 확연루 중건상량문(1772) 등이 있다. 이들을 보면 확연루라는 문루명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청절(淸節)은 청풍대절의 준말이다.
확연루를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청절당(淸節堂)이라는 강당이 나온다. 그런데 강당의 정면이 아닌 후면이다. 그러므로 청절당으로 가려면 당우 왼쪽에 있는 문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청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세 칸이 대청이고, 양쪽에 방이 한 칸씩 있다. 강당의 앞쪽 처마 밑에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는 편액이, 대청 안쪽 벽 위에는 청절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필암서원은 윤봉구(尹鳳九)가 글씨를 썼는데, 필자에 대죽(竹)변이 아닌 초두(艹)변을 썼다. 현판에 임인(壬寅) 정월 사액이라고 썼으니, 1672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료를 보니 사액을 받은 것은 1669년(己亥)이고, 선액(宣額)을 받은 것이 1672년(壬寅)으로 되어 있다. 선액은 현판을 받아 걸었다는 뜻이다. 청절당이라는 당호는 송준길이 썼는데, 송시열이 지은 「하서김선생 신도비명 병서」에 나오는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따온 말이다. 비문에서 우암은 하서가 도학과 절의에서 백세의 스승(百世之師)이라고 존경을 표한다.
"그 밝은 지(知)와 통달한 식견이 어지러운 사물 밖에 초월하고
깊은 조예와 두터운 덕이 정밀 정대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청풍 대절(淸風大節)은 온 세상에 진동하여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해지고 겁 많은 자가 자립하게 되었으니,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其明知達識。超乎事物紛糾之表。
而深造厚積。進乎精密正大之域。
至其淸風大節。聳動震耀。
使之頑廉而懦立。
則雖謂之百世之師可也。
청절당 안에는 편액이 20여개 걸려 있다. 그 중 「백록동학규」, 「임금이 내린 전교(傳敎)」, 「문묘종사교서(敎書),」 「필암서원 중수기」, 「집강기(執綱記)」 등은 역사와 인물을 보여주고, 차운시는 서원과 하서 선생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추모를 담고 있다. 송강 정철, 서경(西坰) 유근(柳根), 청음(淸陰) 김상헌 등의 시가 보인다. 그리고 병계(屛溪) 윤봉구, 삼연(三淵) 김창흡은 청음의 시에 차운한 칠언절구를 썼다. 그 중 송강의 ‘하서를 생각하며’와 병계의 ‘하서선생을 추모하며’를 살펴보자.
하서를 생각하며 懷河西
동방에 그 출처가 없었는데 東方無出處
오직 담재옹 있었다네. 獨有湛齋翁
매년 7월이 되면 年年七月日
통곡소리 온 산에 들렸다네. 痛哭萬山中
하서선생을 추모하며 慕河西先生
선생은 백세의 으뜸 스승으로 先生百世爲宗師
출처가 유상하니 이상할 것 없도다. 出處惟常不是奇
일시에 강개하여 그리한 것 아니니 非若一時慷慨做
도의를 배워 알아 따랐기 때문이라오. 皆從道義學而知
이곳 청절당에서는 선비학당이 열려 한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청 필암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의 일환이다. 필암서원에서는 선비문화체험이라는 이름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필암서원은 전통적으로 강습례(講習禮)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청절당에 앉아 김성수 도유사를 통해 사당인 우동사(佑東祠)와 경장각(敬藏閣)에 대한 설명도 듣는다.
경장각과 우동사 이야기
우동사 앞에는 필암서원계생비(繫牲碑)도 있다. 계생비는 희생제물을 묶어두는 곳을 알리는 비석이다. 그런데 계생비 뒷면에는 필암서원 묘정비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제 청절당 북쪽에 있는 동서재, 묘정비, 경장각, 우동사를 살펴보러 간다. 필암서원 동재는 진덕재(進德齋)고 서재는 숭의재(崇義齋)다. 진덕과 숭의는 『하서전집』「구서(舊序)」 “惟以進德修業爲事 而常有忘身殉國之志 義理之勇剛大之氣”에서 나왔다.
“오직 덕으로 나가고 업을 닦는 것을 일로 삼고, 항상 자신을 잊고 국가에 봉사할 뜻이 있었다. 의리의 용기는 강하고 큰 기운이다.” 하서선생이 추구했던 ‘덕으로 나가고 의를 숭상한다’는 뜻을 담았다. 진덕재에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기일, 능호, 능의 소재지를 기록한 게판이 걸려 있다. 주자의 편지글을 널빤지에 쓴 ‘주희척독(朱熹尺牘)’도 있다. 이에 비해 숭의재에는 조헌(趙憲)의 시판이 걸려 있다. 숭의재는 현재 서원사무실, 서고, 산앙회(山仰會)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서원이 세워진지 200년이 지나 송병선(宋秉璿)이 쓴 묘정비문에는 서원의 역사와 배향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필암서원은 하서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후에 양자징이 추가 배향되었다. 서원은 세 번 이전했다. 경장각에는 묵죽도와 하서문집 판각이 있다. 당우로는 강당인 청절당, 동서재인 진덕재와 숭의재, 확연루가 있다. 필암서원은 하서선생이 이룬 도를 강학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선생은 도를 이루고 바르게 실천했다.”
경장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은 인종이 하서에게 내린 묵죽도 판각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경장각이라는 편액 글씨까지 직접 써서 내렸다. 왕명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경장각은 작은 규모에 비해 장식과 단청이 화려하다. 건물의 처마도리에 장식된 용과 봉황 조각이 인상적이다. 경장각 안에 있던 묵죽도 판각은 현재 국립 광주박물관으로 이전 보관되고 있다.
우동사는 필암서원 사당으로, 우동(佑東)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1957년이다. 우동은 「하서김선생 신도비명 병서」첫 구절 천우아동(天佑我東)에서 따 왔다. “본조 인물은 도학 절의 문장에 각기 차등이 있어서, 모두를 겸하여 치우치지 않은 이가 거의 드물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보우하사 마침내 하서 김선생을 보내주셨다. 國朝人物道學節義文章忒有品差 其兼有而不偏者無幾矣 天佑我東 鍾生河西金先生”
우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측면 1칸은 실제 반 칸 크기로 툇간을 내었다. 사당 안에는 주향으로 하서 선생이, 종향으로 양자징(梁子澂)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양자징은 하서선생의 제자이자 사위다. 그는 또한 창평에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동사 동쪽 장판각에는 『하서문집』구본과 신본 판각과 책, 『노비보(奴婢譜)』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자료 중 일부는 현재 유물전시관으로 이전 전시되고 있다.
유물전시관에서 만난 김인후 선생의 유산
필암서원 유물전시관인 원진각(元眞閣)이 건립된 것은 2008년이다. 원진이라는 이름은 하서의 시 ‘문인에게 보여주다(示門人)’라는 칠언절구에서 나왔다. 첫 두 구절이 “천지간에 두 인물 있으니, 중니는 원기이고 자양은 진기라네(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이다. 여기서 중니는 공자를 말하고 자양은 주자를 말한다. 공자와 주자의 두 기운 원기와 진기를 이어받은 집이라는 뜻에서 원진을 당호로 선택했다고 한다.
원진각은 전시실, 관리실, 수장고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하서선생과 관련된 유물 29종 3천 7백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유물이 『노비보』, 『봉심록』, 교지 같은 책자와 고문서다. 그리고 하서선생이 사용하던 유품이 있다. 신발, 붓, 벼루 등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중요한 유물이 인조가 세자시절 하서에게 내린 묵죽도다. 전시된 도판에는 하서가 쓴 시가 그림 왼쪽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묵죽도 판각은 진본이 아닌 복제본이다.
필암서원의 고문서와 책자: 전시된 고문서는 하서 선생의 교지와 유묵이다. 실제 관직을 역임한 교지는 없고, 사후에 받은 증직과 증시 교지만 있다. 교지 일부는 국립 광주박물관에 있다. 하서는 1796년 9월 영의정을 증직 받았고, 10월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고쳐 받았고, 11월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곳에 있는 서원관련 문서들이 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1624년부터 1900년까지 자료들로 책자가 14권이고, 문서가 54매다.
그 중 특별한 것이 『노비보』와 『봉심록』이다. 『노비보』는 1745/46년 2년에 걸쳐 작성한 것이다. 필암서원에 소속된 노비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였다. 노비의 이름, 아버지, 신분, 사는 곳을 기록해 놓았다. 1846년애 작성한 『노비안』도 있다. 『봉심록』은 1624년부터 1701년까지 필암서원을 방문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관찰사, 현감, 유학 등 직책과 이름을 기록했다. 구체적으로 방문한 날짜를 기록한 경우도 있다.
『필암서원적(筆巖書院籍)』은 서원에 적을 둔 유생들의 명부다. 모두 4책으로 1702년부터 1802년까지 발행되었다. 1-3권에는 유생들의 명단이, 4권에는 노비를 포함한 서원의 재산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1권(1702)에는 유학 심기서 등 146명의 원생 명단이 있다. 2권(1717)에는 378명의 원생 명단이 있다. 3권(1742)에는 유학 김치서 등 306명의 명단이 있다. 4권(1802)에는 입의, 절목, 서책, 제기, 책판, 전답, 노비 등을 기록하고 있어, 필암서원의 재산과 재정 상태를 알 수 있다.
유품과 유묵: 유품으로는 가죽으로 만든 갓신, 손잡이를 옥으로 만든 붓, 오석으로 만든 벼루, 나무로 만든 홀(笏)이 있다. 설명에 보면 하서선생이 이것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유묵으로는 초서체 글씨들이 몇 점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글씨를 찍어낸 목판은 경장각과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대표적인 목판은 《하서문집》《백년초해(百聯抄解)》《초천자문(草千字文)》《무이구곡》《하서유묵》이다.
인종대왕 묵죽도와 시문(詩文): 인종대왕이 세자 시절 자신이 그린 묵죽도를 하서에게 하사하였고, 하서는 군신의 예로서 시를 적어 넣었다. 이 시는 절의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돌 친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처럼, 제자이지만 임금이 될 세자에게 군신의 절의를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뿌리 가지 마디 잎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고 根枝節葉盡精微
돌 친구의 정신이 그 안에 들어 있네. 石友精神在範圍
조화를 바라는 임금님 마음 비로소 깨달으니 始覺聖神侔造化
천지를 아우르는 뜻 어길 수가 없어라. 一團天地不能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