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시인 김 삿갓 시(詩)
삿갓 선생은 안변에서 백안(白岸)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고, 또 길을 떠나 함흥에 다다르니
벌써 눈이 나리는 겨울이 되었다.
산길을 타고 내려오니, 강이 얼어 있고 저 멀리 기다란 다리가 있었다.
함흥은 태조 이 성 계의 탯줄을 묻은 곳이라 신성 시 하고 있는 곳이었다.
냇가를 따라 길을 가는데 얼음 밑으로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늙은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뒤에 멈춰 섰는데,
산은 강을 건너고자 강어귀에 서있고/ 물은 돌을 뚫고자 돌머리를 감도는구나.
"山欲渡江江口立(산욕도강강구입)/ 水將穿石石頭廻(수장천석석두회)"라고 시 한 수를 읊고
있었다.
삿갓 선생은 장난 끼가 발동하여 그 노인의 시에 댓 구를 하였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해 강어귀에 서있고/ 물은 돌을 뚫지 못해 돌머리를 감도는구나.
"山不渡江江口立(산부도강강구입)/ 水難穿石石頭廻(수난천석석두회)"라고 하니,
노인은 낚시 대를 놓아버리고 뒤를 돌아보더니, "허! 허.욕(欲)자를 불(不)자로, 장(將)자를
난(難)자로 바꿔 놓으니, 장 닭이 봉황이 되었음메!"라고 반기며, 자신은 이 함흥 사람들이
崔 대人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젊은이의 대구(對句)를 보니, 시를 짓는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가서 술을 한 잔 하면서 시 문답(詩問答)을 하자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은 최 대인을 따라 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사랑 채에서 시 문답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댕기 머리를 한 처녀 둘 이 술 상을 받쳐 들고 왔다.
가만히 보니, 둘은 자매임이 분명하거늘 여종들도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딸들을 시켰을까?
좀 의문이 갔다,
의문은 다음날 해소되었다.
최 대인은 과년한 딸만 둘 인데 시집을 못 보내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시도 잘 짓고 풍채도 훤출 하며 더구나 안동 김 씨 가문이라고 하니,
사위 감으로 붙들려고 선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평안도로 가려는 계획이 어긋날 것 같아 3 일째 되는 날 새벽에 묘향 산 방향으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하루 종일 굶은 째로 추운 겨울 매서운 북풍을 맞으며 걸어 어느 산골 외딴집에 찾아들었다.
문을 두드리니 여인이 빼꼼 문을 열고 내다 보고는 "이 추운 삼동에 어드메 오셨습네까?"
"지나가는 과객 인데 날이 어두워 좀 쉬고 가려고 하니, 좀 쉬게 해 달라"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여인은 추우니, 우선 안으로 들어와 몸을 녹이라고 한다.
인심 좋게 뜨거운 물도 주면서 발도 씻으라고 하였다.
삿갓 선생은 고마워 눈물이 핑 돌았다.
더구나 옥수수와 감자를 섞은 밥까지 차려 주는 것이 아닌가!
밥을 다 먹으니 숭늉까지 주면서 인정을 베풀었다.
여인은 밥을 다 먹고 난 빈 밥상에 물 묻은 젓가락으로
<오늘 밤 새로운 사람을 만났네.> 신인결어금석(新人結於今夕)라고 썼다.
삿갓 선생은 이게 무슨 말인가? 문장은 구색이 안 맞았으나, 천자 문 반은 읽은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삿갓 선생은 이렇게 대구(對句)를 달았다.
<오늘 밤 두 사람이 정을 맺어봅시다.> 양인결어금석(兩人結於今夕)이라고 ...
삿갓 선생은 이 여인이 어떻게 나오나 반응을 살피는데, 갑자기
"무어이 어드래! 같이 잠을 자자고? 빨리 나가라우!"라고 소리를 꽥 질렀다.
처음에 인심을 베풀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삿갓 선생은 더 있을 수 없어 500 마장쯤 밑에 있는 외딴집으로 가서 겨우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잤다.
이튿날 눈을 뜨니, 밤새 눈이 더욱 쌓여 사람 키만큼 되었다.
삿갓 선생은 꼼짝 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밖으로 나가 주인의 제설(除雪) 작업을 도와주려고 나왔는데, 엊저녁에 혼이 났던 집 여인이
지붕의 눈을 쓸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허, 저 여자가 혼자 살면서 고생이 많네, "
함께 눈을 치우던 주인이 허리를 펴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여보슈! 삿갓 양반, 저 여인 네 집까지 통로를 뚫읍시다래! 저 아주마니래 집과 우리 집을
오가려면 통로를 뚫어 놓아야 합네."
삿갓 선생은 그러자고 동의를 하고 부지런히 눈을 치워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아침밥을 먹고 난 주인이 사냥을 가자며 활을 챙겨 들고 나왔다.
둘은 가까운 뒷산으로 가 바위 밑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있는 토끼를 잡기 위해 집에서 가져간
무 시래기를 굴 앞에 흐트려 놓고 기다렸다.
조금 있으니 과연 어미 토끼 한 마리가 굴에서 기어 나오더니 시래기를 열심히 주워 먹었다.
주인은 이 때 화살을 쏘아 잡았다.
내려오면서 는 꿩을 한 마리 또 잡았다.
저녁때가 되어 토끼 가죽을 벗기고 꿩 털을 뽑아 반찬을 만들고 있는데, 아래 마을에 사는
방(房)씨 부부가 오고, 조금 있으니 위 집 여인이 왔다.
방안에 둘러 앉아 함께 저녁을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이 집 안 주인이 미리 연락을 해 두었는지, 위 집 여인이 술 두 병을 들고 내려왔다.
삿갓 선생과 위 집 여인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서로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반주를 곁 드린 저녁을 먹으면서 술이 약간 올라서 그런지 삿갓 선생과 위 집 여인도
서먹서먹한 관계를 떠나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역시 술이 좋기는 좋은 것이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니, 위 집 아낙이
"아저씨 덜 이(蝨 :이 슬)와 벼룩(蚤 : 벼룩 조)을 넣어서 글짓기 시합이나 한번 합쎄(합시다)"
한다.
심판은 삿갓 선생의 차지가 되었다.
먼저 이 집 바깥 주인이 이(蝨)자를 넣어서 한 줄 읊었다.
"슬슬 인지방요( 슬슬 人之彷腰)하니, 人卽皆而片目(인즉개이편목)이라)"
*蝨(이 슬)
<이가 허리 춤을 슬슬 기어가면 사람은 대개 짝 눈이 되더라.>
이를 듣고 난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웃는다.
나도 빙그레 웃었다.
언문(言文)을 섞어서 시를 짓는 것도 신기할 뿐 아니라 이 산골짜기에서 글을 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다음은 방(房)씨가 나섰다.
"번쩍 장판거(번쩍 張板去) 하니, 인개삽화하곡수(人皆揷花下谷手)라."
蚤(번쩍 벼룩 조)
<벼룩이 장판위에서 번쩍 뛰어가버리니, 사람은 사타구니에 손을 넣더라.>
사람들은 또 웃어제꼈다.
마지막으로 위 집 아낙이 나섰다.
그녀는 "툭툭인지이방(툭툭人之耳彷)하니, 기수사 타기 이(己手以打己耳)라."
<벼룩이 귀밑에서 툭툭 튀니, 사람은 제 손으로 귀 때기를 때리더라.>
삿갓 선생은 심판 결과 세 분 모두 이겼다면서 자기 노자도 부족하지만, 주인 내외와 동네
사람들의 두터운 인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동전 한 냥씩을 상으로 주었다.
<김 원 춘 님의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