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부(兪應孚)장군의 서예
왼편 글씨
長安道(장안도) - 儲光義 - ※ 儲 : 쌓을 저
西行一千里(서행일천리) 暝色生寒樹(명색생한수)
暗聞歌吹聲(암문가취성) 如是長安路(여시장안로)
서쪽으로 천리 길을 가니 어둠속에 나무들도 추운데
은히 노래 소리 들리는 것 보니 여기가 장안길임을 알겠네.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티닷 말가
(간밤에 불던 몹쓸 바람에 눈과 서리까지 몰아쳤단 말인가?)
落落長松 다 기우러 디닷 말가
(곧고 푸르던 낙낙장송도 그리하여 다 쓰러졌단 말인가?)
하믈며 못다 핀 고지야 닐러 무삼하리오
(그러할진대 다 피지도 못했던 꽃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메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兪應孚(?-1456) 호는 碧梁 조선조 세종.문종에게
중용된 무인으로 死六臣의 한사람.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스러
워서 세조에게 악형을 받으면서 “나으리 한칼에 없애버리고 단종
임금을 복위시키려 햇는데 간사한 무리의 배신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할말이 뭐있겠소 빨리 죽여주시오“ 하니 세조가 대로하여 살가죽을
벗기는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자세한 전말을 말하라 하자 옆에 같이 고문받던 성삼문등을 바라보며
“저런 애숭이 서생들과 일을 도모하다가 필경 이꼴이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저 서생들에게 물어보라“ 하고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세조가 더욱 노하여 단근질을 하니 배꼽을 찌른 빨갛게 달군 쇠꼬챙이가
식은것을 다시 달구어 오라 호령하였다 한다..
해설:
지난 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가 쳤단 말가
크나큰 소나무들이 다 기울어 가는구나
하물여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눈서리 치다: 눈서리가 치면 모든식물이 다사그러지고 만다
모반하던 사람들이 다잡혀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말한다
눈서리는 세조의 포악함을 비유한것‘
못다핀꽃; 아직 다 피지도 못한 꽃 거사를
하려던 지사들을 말한다.
감상 :
어제밤에 모진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눈서리가지
쳤단 말인가 정정한 큰소나무가 다넘어져 버렸으니 하물며 아직다
피지도 못한 곷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수양 대군이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김종서 등
중신들을 죽이고 단종을 영월로 폐위시킨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각 장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순서에 의하여
배열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은유적 수법으로 처리하여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을 풍자하고 있다.
이 시조는 자신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연 현상에 빗대어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수양 대군으로 인한 정치적 시련으로 인해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마저도 흔들리고, 일반 관료나 선비는
이미 모두 충심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세조를 쓰러 트리고 단종복위를 하여 세종의 遺敎를 지키려 하였던
충신지사들이 잡혀 처형당하는 상황을 표현한 시조다
유응부는 文士가 아니고 한낱 武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서 그런 작품이 나왔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얼마나 점잖으면서도 迫眞한 은유인가.
죽을을 앞한 무시무시한 고문앞에서도 자신만만하고
여유자작한 그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통해서
이런 시조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수 있다
그래서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유응부 (兪應孚 [?~1456])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소중히 여겼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유응부가 죽던 날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의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서,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三主役)으로 부각시켰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 등 6인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적에도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