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한 환제(東漢桓帝) 때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주도하자, 사대부였던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 곽태(郭泰), 가표(賈彪) 등과 연합하여 환관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은 오히려 그들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난했다고 무고하여 이응 등 200여 명을 체포하여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을 받게 하였고, 영제(靈帝) 때에 이응 등이 다시 기용되어 대장군 두무(竇武)와 모의하여 환관을 주벌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는 바람에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사실을 당고지화(黨錮之禍)라고 불렀는데 『통감절요(通鑑節要)』 21卷 後漢紀 建寧2年(己酉 169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처음에 이응(李膺) 등이 비록 금고(禁錮)당하였으나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그의 도(道)를 높이고 숭상하며 조정(朝廷)을 더럽게 여겨서 이응 등을 바라는 자가 행여 미처 만나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이하 한자번역 생략>
그리하여 번갈아 서로 標榜하여 호칭할 때에 竇武‧陳蕃‧劉淑을 三君이라 하였으니 君이란 온 세상이 높이는 바를 말한 것이요, 李膺‧荀翊‧杜密‧王暢‧劉祐‧魏朗‧趙典‧朱㝢를 八俊이라 하였으니 俊이란 사람 중에 英傑을 말한 것이요, 郭泰‧范滂‧尹勳‧巴肅‧宗慈‧夏馥‧蔡衍‧羊陟을 八顧라 하였으니 顧란 德行으로 남을 인도하는 자를 말한 것이요, 張儉‧翟超‧岑晊‧范康‧劉表‧陳翔‧孔昱‧檀敷를 八及이라 하였으니 及이란 사람을 인도하여 따라 높이는 자를 말한 것이요, 度尙‧張邈‧王孝‧劉儒‧胡毋班‧秦周‧蕃嚮‧王章을 八廚라 하였으니 廚란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구제하는 자를 말한 것이다.
陳蕃과 竇武注가 권력을 잡게 되자 다시 李膺 등을 들어 발탁하였는데, 陳蕃과 竇武가 죽자 李膺 등이 다시 폐출당하였다.
宦官들이 李膺 등을 미워해서 매번 조서를 내릴 때마다 번번이 黨人의 禁錮를 거듭하였고 侯覽은 張儉을 원망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侯覽과 같은 고을 사람인 朱竝은 평소 아첨하고 간사하여 張儉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侯覽의 意向을 받들어 글을 올려서 誣告하기를 ‘張儉이 같은 고을 사람 34명과 별도로 호칭을 만들어서 함께 部黨을 결성하여 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張儉이 괴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조서를 내리되 고발한 사람의 姓名을 깎아서 지우고 張儉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曹節이 이로 인하여 有司에게 넌지시 사주하여 鉤黨(서로 끌어 모아 同黨을 만든)한 자로 前 司空 虞放과 李膺‧杜密‧朱㝢‧荀翊‧翟超‧劉儒‧范滂 등을 지목하여 州郡에 회부시켜 고문해서 죄를 다스리도록 주청하게 하니, 이때 主上의 나이가 14세였다.
上이 曹節 등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鉤黨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鉤黨이란 곧 黨人입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黨人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에 죽이고자 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그들이 모두 서로 결탁하여 不軌를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不軌를 도모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社稷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그제서야 그 주청을 허락하였다.
혹자가 李膺에게 이르기를 “도망갈 만하다.” 하니, 李膺이 대답하기를 “일을 함에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고, 죄가 있음에 형벌을 피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절개이다. 내 나이가 이미 60세이며 죽고 사는 것은 天命이 있으니, 도망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詔獄에 나아가서 고문을 받아 죽으니, 그의 門生과 옛 官屬들이 모두 禁錮를 당하였다.
● 汝南의 督郵인 吳道가 詔勅을 받고 范滂을 체포할 때에 范滂의 집이 있는 征羌縣에 도착하여 객사의 문을 닫고서 詔勅을 안고 牀에 엎드려 우니, 縣 사람들이 어찌할 줄을 몰랐다.
范滂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반드시 나 때문이다.” 하고는 즉시 스스로 獄에 나아가니, 縣令인 郭揖이 크게 놀라서 달려나와 印綬를 풀어버리고 范滂과 함께 도망가자고 하며 말하기를 “천하가 넓으니 그대는 어찌 이곳에 있으려 하는가.” 하였다.
范滂이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화가 그칠 것이니, 어찌 君에게 죄를 연루시키며 또 老母로 하여금 流離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范滂의 어머니가 아들과 永訣하며 말하기를 “네가 이제 李膺‧杜密과 명성이 같으니 죽는다 한들 무슨 한이 있겠으며, 이미 훌륭한 명예를 얻고 또다시 長壽까지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니, 范滂이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받고는 재배하여 하직하였다.
范滂이 자기 아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惡을 행하게 하자니 惡을 해서는 안 되고, 내가 너로 하여금 善을 행하게 하자니 내가 惡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다.” 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무릇 黨人으로서 죽은 자가 1백여 명이고 처자식을 모두 변경으로 옮겼으며, 천하의 호걸과 훌륭한 행실이 있는 유학자를 宦官들이 일체 黨人이라고 지목하여 죽거나 귀양가거나 폐출당하고 禁錮된 자가 또 6, 7백 명이었다.
● 郭泰는 黨人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詩經》에 이르기를 ‘善人들이 죽음에 나라가 다하고 병든다.’ 하였으니, 漢나라 황실이 멸망할 것이다. 다만 ‘저 까마귀가 앉는 것을 보건대 누구의 지붕에 앉을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郭泰는 인물을 평가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위험한 말과 과격한 의론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지러운 세상에 처하면서도 원망과 화가 미치지 않았다.
● 張儉이 亡命하여 곤궁하고 절박하므로 人家를 보면 들어가 투숙하니, 그의 명망과 덕행을 소중히 여겨 집안이 망하는 후환을 무릅쓰고 그를 용납하여 숨겨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중한 벌을 받아 죽은 자가 열로 헤아려지고 연좌되어 체포되고 고문을 받은 자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으니, 그의 宗族과 친척들이 모두 죽고 가문이 멸망하였으며 郡縣이 이 때문에 殘破되었다.
張儉이 魯나라의 孔褒와 옛부터 사귄 교분이 있었다. 도망하여 孔褒에게 갔다가 만나지 못했는데, 孔褒의 아우 融이 나이 16세에 張儉을 숨겨 주었다.
뒤에 이 일이 탄로 나자 張儉이 도망하여 달아나니, 魯國의 相이 孔褒와 孔融을 체포하여 감옥으로 보내어서 누구에게 죄를 씌워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孔融이 말하기를 “보증하여 張儉을 받아들이고 집에 숨겨 준것은 나이니, 내가 죄를 받아야 합니다.” 하니, 孔褒가 말하기를 “저 張儉이 나를 찾아온 것이니, 아우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였다.
獄吏가 그 어머니에게 묻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家事는 家長을 따르는 법이니, 첩이 그 죄를 담당하겠습니다.” 하여 한집안 사람들이 서로 죽기를 다투었다. 郡縣에서는 猶豫하고 결정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정에 아뢰니,조서를 내려 孔褒를 죄주었다.
黨禁이 풀리자 張儉이 비로소 鄕里로 돌아와 뒤에 衛尉가 되었다가 죽으니, 나이가 84세였다.
● 夏馥은 張儉이 망명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재앙이 자기로부터 일어났는데 부질없이 선량한 사람들을 관련시키는구나. 한 사람이 죽음을 피함에 화가 萬家에 미치니, 어찌 살려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수염을 깎고 모습을 바꾸고 林慮山속에 들어가 姓名을 숨기고는 冶家(대장장이의 집)의 머슴이 되어서 그를 알아보는 자가 없었는데, 黨禁이 풀리기 전에 죽었다.
● 처음에 범방(范滂) 등이 조정을 비방하니, 공경(公卿)으로부터 이하가 모두 허리를 굽혀 그에게 몸을 낮추었다. 태학생(太學生)들이 다투어 그의 풍모를 사모해서 문학(文學)이 장차 흥성하고 처사(處士)가 다시 등용될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신도반(申屠蟠)만은 홀로 탄식하기를 “옛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처사가 멋대로 의논하니 열국(列國)의 왕이 (선비를 위하여)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며 앞에서 인도하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선비를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책을 불태우는 화(禍)가 있었으니, 지금을 말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양국(梁國)의 탕현주(碭縣注) 사이에 자취를 숨기고 나무에 기대어 집을 짓고서 스스로 머슴처럼 생활하였다.
2년이 지난 뒤에 범방 등은 과연 당고(黨錮)의 화(禍)에 걸렸으나 오직 신도반(申屠蟠)만은 초연히 논평(評論)을 면하였다.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천하에 道가 있으면 君子가 왕의 조정에서 드날려 小人의 죄를 바로잡아서 감히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천하에 道가 없으면 君子는 주머니의 주둥이를 묶듯이 말을 하지 않아서 小人의 禍를 피하더라도 오히려 혹 禍를 면치 못한다.
당인(黨人)들은 혼란한 세상에 태어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온 천하가 혼탁할 때에 입과 혀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인물을 평론하며 혼탁한 것을 맑게 하고 깨끗한 것을 드날리다가 이무기와 뱀의 머리를 움켜쥐고 범과 이리의 꼬리를 밟아서 자신은 혹독한 형벌을 받고 화가 분우(朋友)에게까지 미쳐 사류(士類)가 섬멸되어 나라가 멸망함에 이르렀으니, 슬프지 않은가. 오직 곽태(郭泰)는 이미 밝고 또 지혜로워서 자기 몸을 보전하였고 신도반은 기미를 보고 일어나 하루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갔으니, 드높아서 미칠 수가 없다.” <출처: 동양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