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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0월
드레프스는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고 프랑스 장교였지만
프랑스 군부에 의해 치밀하게 조작된 반역죄
(적국에 일급 비밀을 팔았다는 혐의)로 종신형 을 선고받고
12년간 감옥생활을 함.
그 이유는 그가 단지 유대인이였기 때문이었다.
전 유럽에 이와 같은 반유대주의 정서가 일어났다.
그것은 나라없이 떠돌았던 유대인들은 돈 밖에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보석세공, 시계수리, 구두 수선 등으로 먼 돈을 고리대금업을 하여 많은 부를 쌓게 되었으나 수전노처럼 인색한 것이 차별과 박해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유대인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 민족의 우울성, 음식, 문화, 결혼등에서 독특한 율법주의의 삶을 살았게 때문에 극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하였다.
단 유대주의자들로 하여금 유대경전과 율법서를 태우는 반 유대주의의 과격한 행동을 하게 했다.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라없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씌웠기 때문에
신문기자였던 데오로드 헤프첼이 시온주의 운동을 하게 하였다.
시온주의는 조상의 땅에 유대국가를 재건하자는 이념으로 대규모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유대국가를 재건하지 않는 이상 침된 유대인들의 해방은 있응 수 없다." - 1896년 헤르첼이 쓴 유대국가 중에서 -
이 책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의 유대인들에게 신속하게 전해졌다.
헤르첼은 스위스 바제에서 시온주의 총회를 준비하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1897년 8월 29일 시온주의 총회를 갖은 이후 전 유럽을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국가건설을 위한 조직적 이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가려고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척박하고 버려진 땅이었다.
그러한 척박함 불모지에서는 이스라엘 재건을 이룰 수 없게 생각되엇으며 시온주의는 이상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1903년 팔레스타인의 점령국 영국은 통치하에 있는 적당한 기우,풍부한 자원이 있는 매력적인 땅
우간다나 아르헨티나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 이스라엘 재건의 당의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부했다.
예루살렘이 있는 곳 그들이 고향이기에 팔레스타인이어야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아랍토착민의 땅 아랍국가의 땅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영국은 무연화약의 부족으로 곤경해 쳐했을 때
유대인 하임바이츠만이 새로운 폭약을 제고하여 도왔고
로스차일드는 돈과 무기로,
그밖의 수많은 유대인들은
영국군에 자원하여 영국의 전쟁을 도왔다.
이때 도움으로 영국 외상 벨프어는 1917년
" 영국 정부는 팔에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수립을 지지하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행한다"고 약속하였다.
팔에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숫자가 늘어갔다.
그러나
모든 아랍국들은 항위 시위를 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반대하고
영국의 유대인 이민정책에 위협을 가하여
1939년 영국은 유대인의 이민 제한 정책을 쓰게 되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차세계대전의 실패를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국주의 야심에 의해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유대인의 말살정책이 시작되었고
이유없는 폭행과 학살을 자행해 유대인들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은 1940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치게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기차에 실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되었고
유럽전역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이 600만명이었다.
목숨을 부지한 유대인들은
자신을 보호해줄 국가의 소중함을 뼈져리게 느끼에 되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스겔 3: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예레미아 30:7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렘24 : 9 - 10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전세계인들은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경악을 금치못하며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만큼
독립할 자격이 있다'는 국제사회 여론이 조성되었다.
대재앙 홀로코스트가 아닌
이스라엘 독립의 기적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1947년 11. 29. 이스라엘 독립국가 안이 유엔총회에 상정되었다. 아랍국가들은 석유 이익권을 제한하겠다고 협박하였으나
개표결과 찬성 33 반대 13으로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하여
이스라엘이 독립을 할 수 있는 국제적 명분을 얻게 되었다.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 수상이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선언을 하였고
65만명의 유대인들은 1900년 동안 영토없이 떠돌아 다닌
유대인들에게 몇 천년만에 한번 밖에 올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독립선언과 동시에 독립전쟁을 선포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유대인 대학살)는
절망의 재앙이었지만 유대인들의 희망을 싹틔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벤구리온 수상의 독립선언은
전세계에 주님을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24:32 -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2000년만에 이스라엘이 조국을 건설한 일은 기적이며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러한 기적을 이루신 일은 예수님의 재림을 임함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나팔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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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던 헤르즐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어린이는
교실 벽에 걸려있는 헤르즐의 초상화를 보며 자라난다.
나는 이스라엘 우표에 그려진 수염이 난
그의 초상화를 처음 접했다.
헤르즐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그의 사진을 본적은 없었다.
우표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신중하고 긍지가 있어 보이는 그의 선지자 같은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헤르즐은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립자이며
이스라엘 국가의 아버지이다.
비록 그가 첫 번째 시온주의자는 아니더라도
그는 시온주의의 모델로 대표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위대한 시온주의를 전파했고
시온으로 돌아가야 하는 꿈을 나누어주었다.
데오도르 헤르즐(Theodor Herzl)은
1860년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의 중산계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감독이며 목재상인이었다.
1878년 헤르즐의 가정은 비엔나로 옮겨온다.
그는 비엔나대학에 다니면서 1881년
'알비아'라는 학생단체에 가입하지만
대학 내에 반셈족주의가 거세게 일어나자 이 단체에서 탈퇴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일년간 공무원으로 일을 하지만
작가가 되려는 생각으로 직장을 그만둔다.
1891년 스페인을 여행 중에
그는 비엔나 Neue Freie Presse 신문사로부터
파리 특파원을 제안 받고 기자가 된다.
대학재학 중 헤르즐은 1881년에 출판된 듀링(Eugen Duhring)의 '인종, 도덕, 문화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라는
책을 읽고 충격을 받는다.
듀링은 유대인이 해로운 종족이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십 년 후 프랑스에서 그는 반셈족주의자인 드루몽(Drumon)의 '프랑스 유대인'이라는 책을 읽고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는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헤르즐은 프랑스의 반셈족주의를 경험한다. 1892년 6월. 프랑스의 반셈족주의자인 프랑스인과 결투를 하다가 유대인 대위 메이어가 죽음을 당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드루몽의 추종자들이
'유대인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을 듣고
헤르즐은 반셈족주의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
1894년 헤르즐은 조각가 비어와
비엔나에서의 반셈족주의와
유대인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면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두문불출하고
'새로운 게토(The New Ghetto)'라는 희곡을 쓴다.
'새로운 게토'에서
헤르즐은 유대인들은 물리적인 게토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증오와 거절이라는
새로운 정신적 게토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게토'는 유대인 질문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접근법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였다.
1894년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장교 드레프스가 프랑스군의 군사기밀을 독일로 누출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드레푸스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독일 대사관에 기밀을 유출시킨 장본인은
프랑스의 에스떼라지 장교이며
드레푸스와는 무관하게 처음부터 군부의 조작에 의한 사건이었다.
헤르즐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프랑스의 반셈족주의 거센 물결을 실감하게 되었다.
1896년 드레푸스는 무죄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6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1895년 헤르즐은 '유대국가(The Jewish State)'를 저술한다.
'유대국가'의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은
유대인은 유럽을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국가'에서 헤르즐은 이상적인 유대국가의 정치제도, 법률, 노동, 여성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가 '유대국가'의 초고를 그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여주었으나 그의 친구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헤르즐 자신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그는 초고를 읽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유대인이므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나는 여겼다. 나도 저술하는 중에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다른 이유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나의 친구로서 나의 불행을 슬퍼한 것이다."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국가 건설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의 이 소책자는 큰 반응을 일으켰다.
그의 제안으로 전 유럽의 유대인 대표가 참가한
제 1회 시온주의총회가 1897년 8월 29일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는 모두 2백여 명의 유대인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헤르즐의 지도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헤르즐은 유대국가가
고대 유대와 이스라엘 왕국이 있었던
바로 그 땅에 세워지기를 고대했다.
반셈족주의에 대한 해결책은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그는 유토피아 소설의 형태를 빌린
'오래된 새 나라(Altneuland)'에서 강조한다.
'오래된 새 나라'의 타이틀 페이지에서 헤르즐은 말한다.
"만일 당신이 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동화가 아니다"
우울하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젊은 유대인 프레드릭은 부유한 프러스아 귀족 킹스코트와 함께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태평양에 있는 낙원의 섬으로 떠난다.
두 사람은 섬으로 가는 도중에
팔레스타인에 잠시 들려 황량한 땅을 본다.
그 땅은 버려진 쓸모 없는 땅으로
그곳에 정착해서 살고있는 유대인들의 생활도 비참했다.
이십 년간 세상을 등지고 섬에서 살던 두 사람은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하고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의 나라가 건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온주의는 현실로 나타나고
유대인은 고토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반셈족주의는 사라져 버렸다.
팔레스타인은 이제 인류의 정치적 문화적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훌륭한 국가가 되었다.
늪지는 개간되어 농지와 주택지로 바뀌고 옛 도시들이 재건되고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무상으로 대학까지 교육혜택이 주어지는 복지국가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아랍인,
유럽의 크리스천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헤르즐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마치 자신이 현실로 이루어진 유대국가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회복된 나라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헤르즐이 1898년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을 때
그는 습지를 메꾸고 도시에 건물을 짓는 비전에 가득차 있었다. '오래된 새 나라'에서 헤르즐은 말한다.
"천 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백년을 기다릴 필요도 아니 단 오십 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나는 헤르즐이 책을 저술했을 당시와
현재 이스라엘의 사진이 비교할 수 있도록 함께 실린 영문판
'오래된 새 나라'를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 하이파, 욥바의 현재 사진은
마치 헤르즐이 이 사진을 보고 기술한 것처럼
너무나 정확해서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헤르즐은 정치적인 외교활동으로
유대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터키(당시 팔레스타인은 터키 통치하에 있었음)와
영국을 대상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유럽에서 반셈족주의는
사그라지지 않을 기세였고 유대인들이 겪는 고난은 가중되었다. 헤르즐은 유대인들이 겪는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하여
1903년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에 유대국가 건설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헤르즐은
잠정적으로 팔레스타인보다는 우간다를 택한 것이었다.
헤르즐이 시온주의총회에 우간다 안을 제출했으나
참석자들은 헤르즐에게 강하게 반발하였다.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들은 그를 배신자로 취급했다.
1904년 시온주의총회에서
헤르즐은 우간다 안에 대해 사과했고
총회가 분열되는 위기를 넘겼다.
그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다음해에 만날 것을 약속하며 총회를 마쳤다.
그러나 헤르즐은 우간다 안 거부에 대한 충격과
그 동안 돌보지 않은 건강이 악화되어
총회가 끝난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되고
헤르즐의 시체는 예루살렘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묻힌 동산은 헤르즐 산으로 명명되었고
그곳에는 헤르즐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어서
헤르즐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헤르즐은
유대인이 유대국가를 재건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꿈이 정말로 실현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1897년 1차 시온주의 총회가 끝난 뒤 9월의 그의 일기에는
"나는 여기에 유대국가를 세웠다.
만일 내가 이 사실을 크게 소리친다면
모든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5년 적어도 50년 안에
모든 이들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 사람이 가진 작은 꿈. 불가능해 보이는 그 꿈을 그는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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