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613. 묵상글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 우리의 착한 행실은. 등 )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06.13 06:00
- 우리의 착한 행실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착한 행실이란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람들이 찬양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해도 그의 행실이
사람들 앞을 비추지 못한다면 착한 행실이 아니고,
그 행실로 인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해도 그의 행실이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가 찬양받기 위한 것이라면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착한 행실이
착한 행실임에도 사람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하고,
이웃 사랑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사람들은 즉시 그것이 자기 과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케 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웃 사랑을 할 때
그것이 착한 행실이고 그것이 이웃에게 빛이 되고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주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의 모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의 입에는 늘 ‘예’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또 아무 말에나 ‘예’하는 ‘Yes Man’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예’하고 하느님 말씀에만 ‘예’하는 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 사람들에게는
‘아니요’해야 할 때는 ‘아니’라고 할 수 있고,
‘예’해야 할 때는 ‘예’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빛이 되고,
하느님께는 찬양이 되는
그런 ‘Yes Man’과 그런 착한 행실의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오늘은 ‘참 행복’이 담고 있는 영성적 특징의 두 기둥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곧 ‘존재론적 영성과 실천적 영성’, ‘됨’(being)의 영성과 ‘함’(doing)의 영성입니다. 전자는 우리를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요,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성이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현실에서 육화 될 때 비로소 살게 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변화된 존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변화를 토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존재가 새로워졌다면, 그 새로워진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양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변화된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창조세계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영성, 곧 ‘됨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행복’에서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덕목들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됨’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행위가 이 둘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양식에서 있어서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며, 그것에 따른 영성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됨’의 영성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개선하거나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촉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전 존재에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참 행복’은 존재론적 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곧 존재 변화로서의 ‘참 행복’은 삶의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됨’의 영성은 ‘함’의 영성으로 육화하게 됩니다. 곧 존재의 영성은 실천적 삶의 영성으로 이어지고, 또 실천적 영성은 존재의 영성으로 맺어지는 과정으로 계속 순환, 반복하게 됩니다.
이를 ‘참 행복’에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로,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로, 그리고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채워짐,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을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러니 가끔은 스스로에게 ‘정신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 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들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게 됩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도 돌아보게 됩니다. 분노의 바람이 불다가도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오해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이 눈에 들어옵니다. 평온해야 할 마음에 거센 파도가 생기게 됩니다. 신부님들과 캠핑을 갈 때였습니다. 같이 가기로 한 신부님이 10시 30분에 떠나면 좋겠는데 11시에 가자고 했습니다. 11시에 맞추어서 가니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합니다. 짐을 정리해서 차에 옮겨 실었습니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짐을 옮기면서 조금씩 짜증이 났는데 허리가 아프다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왕 기다리는 것이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자는 생각에 라면을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파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허리가 삐끗했다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주일 미사에도 못 나갔다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저를 위해서 미사를 대신 해 준 것도 떠올랐습니다. 통증병원에 데려다 주면서 치료 잘 받으라고 했습니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다른 신부님들이 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아멘에는 4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순명’입니다. 성모님께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셉 성인께서도 남모르게 파혼을 하기로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다짐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결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가 되십시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청원’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 길을 찾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비록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길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아픈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멘입니다. 네 번째는 ‘찬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멘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을 살아간다면, ‘아멘’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샤워하는데 갑자기 눈이 아픕니다. 눈썹이 눈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손으로 비벼서 눈썹을 빼려 했지만 잘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실의 거울에 눈을 비추면서 눈썹 하나를 조심스럽게 뺄 수 있었습니다. 이 거울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제 얼굴이 보입니다. 이제 거울 앞으로 더 다가가서 거울에 얼굴을 딱 붙여보십시오. 더 가까이에 아니 완전히 붙어있는데도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즉,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자기에게 딱 붙어 바라보면 절대 알 수 없게 됩니다.
저 역시 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 말을 잘하지 못했기에 남들 앞에서 말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학창 시절에 과제로 글짓기를 하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칭찬받은 적도 그리고 상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역시 저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래도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 글쓰기입니다.
자기에 관한 판단도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남 보듯이 나를 바라봐야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으며, 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그 안에서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아니라, 썩는 것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귀한 소금이기에 고대와 중세에는 화폐나 임금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빛도 아주 중요하지요. 어둠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통해 우리가 제대로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귀한 우리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힘과 재주가 없다면서 늘 뒤로만 물러서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드시는 주님이었습니다. 빵의 기적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작고 힘없는 우리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가 귀하다고 선언하셨기에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설마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진리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
현명한 사람이란 정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어제부터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시작입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어제 주제는 진복팔단의 참행복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덕의 여정”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결국은 살아야 할 성덕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참행복을 그대로 사셨던 예수님은 참행복의 중심中心이자 원조元祖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참행복을 살 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저절로 참행복을 살게 된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발적 기쁨으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사랑하여 자발적 기쁨으로 살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두차례 이를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참행복의 실천이요 성인입니다. 참행복을 살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감동깊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자 “아멘”이신 예수님을 닮아 참행복을 살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예스맨”이 “아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을 세례명으로 해도 기막히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의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살 때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의 삶이셨습니다. 세상의 원소금, 원빛이 예수님이기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일치의 삶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세상의 소금!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렇게 제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격리된 소금이라면 무의미합니다. 세상의 소금, 바로 선교가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나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세상 이웃의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니 부패로 변질變質, 변절變節됨이 없이 한결같이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듯, 제맛을 잃은 우리 삶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늘 제맛을 지닐 때 비로소 아름답고 향기로운 매력적인 삶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늘 제맛을 지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제맛을 지니고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 해도 곳곳에 이런 세상의 소금같은 성인들이 있어 유지되고 지탱되는 세상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 성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는, 세상을 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같은 사람들입니다. 소금은 녹아 세상속에 녹아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부패되지 않고 제맛을 지니니 얼마나 멋지고 겸손한 삶인지요!
“맛이 갔다!”
음식뿐 아니라 변질된 사람을 빗댄 말이기도 합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가도 버릴 수 없으니 참 난감합니다.”
언젠가 들은 말인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말씀하십니다. 부패의 변질을 막아주면서 세상의 소금으로, 제맛을 지니고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세상의 소금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세상의 빛과 같은 개인도 공동체도 있습니다. 세상의 빛! 역시 우리의 신원이며 선교는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빛이지 세상을 떠난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생생히 살아나고 환해지고 유쾌해지는 느낌이니 이런 이들이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분위기를 무겁게 불편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이들도 있으니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 결핍된 이들입니다.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도 똑같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가정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하며 부패로 변질되지 않고 제맛을 잃지 않고 있는가?”
제가 자주 성찰하는 주제입니다. 부패로 변질됨이 없이 늘 제맛을 지니고 살고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요 제가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바로 참행복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정말 변질되지 않고 제맛, 제빛을 내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기위한 유일한 처방이자 대책은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함으로 날로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닮아가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의 삶이요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이며 보람일 것입니다. 그 좋은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입니다.
성인의 파란만장한 짧은 삶이 불꽃처럼 강열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과 빛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이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에 입회하여 생활했으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삶에 매료되어 옮겼고, 이어 모로코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심한 병으로 포르투칼로 귀국길에 올라 회항중 배는 심한 폭풍우로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에 당도합니다.
성 안토니오는 토스카나에 도착하여 그곳 수도원에 들어갔고 후에 로마냐의 포를리에서 살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안토니오의 됨됨이를 파악한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에게 위임합니다.
이후 안토니오는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대 그를 능가할 설교가는 없었으며 어느 학자는 성인을 ‘그리스도교의 자랑’이라 했으며 교황궁에서 한 설교는 ‘성경의 보물창고’라는 칭송도 받았습니다. 어느 분은 안토니오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 있는 언약의 궤’등으로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리미니란 곳에서 영감을 받아 바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했고, 물고기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하니 정말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답습니다.
성인은 만35세 짧은 나이에 병사한후 선종한 다음해 1232년 5월 3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됩니다. 특히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믿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열렬히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했느냐, 그래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았느냐의 “삶의 질”입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아멘.
----------------------------------------------------
230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오늘 복음을 한 줄로 말하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빛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씩 잘 귀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즉, 우리 안에 있는 빛(그리스도를 닮은 마음들과 그 행실들)을 사람들이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발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동시에 그 안에 욕심을 채워 넣습니다.
그래서 빛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 합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기를 바라고 동시에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합니다.
이미 한참 전의 일입니다만 우리는 부활성야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빛을 따라 시선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빛입니다. 우리가 빛이지만 우리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비추는 빛입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이 참으로 친정하고 사랑 가득한 분임을 알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가 모두 겸손함 가득히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를 희망해봅니다.
이런 것이 사람다움 아닐까요?
‘회갑 잔치’라는 말이 순간 기억나지 않고
육순, .... 갑 이라는 말이 맴돌다 튀어나온 말
‘육갑 잔치 잘 치르셨어요?’
은행에 카드 재발급받으러 가서는
카드 재개발해 주세요.
친구 집에 갔는데 친구의 어머니께서
‘포크래인 먹어라.’하시기에
놀라서 가보니 콘플레이크였다는….
참으로 인간답다고 생각합니다.
실수하고 그 실수로 서로 웃는 여유 말입니다.
빈틈이 있는 것이 인간다운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참으로 인간다운 사람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