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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출 3: 1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일입니다. 나 자신만큼 나를 아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저 유명한 철학자중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의 대표적 명제를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느 고등학교 현관에는 아주 큰 거울이 걸려 있어 오고가는 교사와 학생들이 그 거울로 자기의 모습을 한번쯤 보고서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 거울 밑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급해도 그 거울 앞을 지나가며 자기의 겉모습을 큰 거울에 비춰 보는 가운데 진짜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나타난 내 모습이 정말 참 나입니까? 키가 몇 cm이고, 체중이 몇 Kg이며,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거울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속사람은 결코 그 거울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제일 기본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를 바로 알고, 바로 진단하는 일입니다. 나를 바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으며, 더욱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평가하는 소리에 아주 예민합니다. 자기가 보는 자신의 모습보다 남이 보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나 자신도 바르게 모르는데, 어찌 남이 나를 바로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할 수 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보는 내 모습이 참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남이 나를 향해 "당신이 잘났습니다."하면 그 평가가 진짜 자신인줄 알고 우쭐합니다. 정말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착각합니다.
또 남이 나보고 "당신 못났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이 진짜인줄 알고 심한 열등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나를 향하여 우월감을 갖거나 열등감을 갖는 마음은 건강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우월감을 갖는 사람은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갖는 사람은 자기를 무시하게 되고,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한국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진 사람보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허풍도 많고, 쉽게 자격지심을 가지거나 오해를 잘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컴퓨터를 통해 세계의 모든 정보를 한 눈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은 모르는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다른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살고, 잘못된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요, 고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난 후, 자기 사명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자기 사명을 발견한 모세는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모세 나이가 80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자기를 똑바로 안 나이가 80세이고,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때가 80세였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모세는 자기를 똑바로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헛된 인생을 살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내 나이가 어떠하든 나 자신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면, 열심히 여기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헛되게 산 것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마라톤 선수가 열심히 뛰었는데 나중에 그 곳이 원코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가 지금까지 땀흘리고 애써서 뛰어온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양아들로 애굽 궁중에서 젊은 나이 40세까지 호화롭게 지내 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배경이나 학문, 자기의 잘난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애굽 사람이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무시하고 싸우는 것을 보자, 그의 핏속에 있는 히브리 민족성이 발하여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이스라엘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애국심이요, 애족심으로 한 행동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밖에서 같은 이스라엘 민족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 그는 뛰어가서 그들의 싸움을 말렸습니다. 같이 노예로 있는 처지에 동족끼리 싸우는 것이 안타까워서 말렸더니, 이들은 모세를 보고 어제는 애굽인을 죽이더니 이제는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모세는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애굽 궁중에서도 견딜 수 없는, 하루아침에 도주하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의 화려한 애굽 궁중에서의 생활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양치는 목자로서 다시 40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애굽 사회에서 양치는 목자는 아주 천한 계급의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애굽의 왕자 모세가 하루아침에 천민의 자리로 곤두박질치게 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 생활로 10년, 20년도 아닌 40년간을 해 왔습니다
. 드디어 모세가 80세 되던 해에 모세는 호렙산 기슭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꽃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불타고 있는 그곳에 가보니, 가시 넝쿨에서 불은 타는데 그 불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를 발견하게 되어 자기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 속에서 모세가 자신을 바로 깨닫게 된 것을 통해, 오늘 여러분 자신을 바로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언제 자기를 바로 알게 됩니까?
첫째로, 자신이 연약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자기를 바로 깨닫게 됩니다.
애굽 궁중에서의 좋은 여건과 환경에서 모세는 자신을 잘 모르고, 우쭐대는 가운데 자기 힘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을 믿고는 있었으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내 힘, 내 수단, 내 능력으로 모든 일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애굽사람들이나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자 그곳에서 더 살 수 없어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도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 속에서 지낼 때는 자기 꾀를 다 동원해서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도 탈취하고 아버지의 축복기도까지 가로채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고향과 어머니 품을 떠나 벧엘 광야에서 두려움 속에 떨다가 드디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애굽의 왕자가 아닌 천민인 양치는 목자의 자리로 떨어졌을 때,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라고 명령했을 때, 모세는 나는 할 수 없다고, 나는 말도 못한다고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아마도 모세가 애굽 궁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자신 만만하게 제가 가겠다고 우월감에 나섰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인기가 있을 때보다 배신당하고 고독해졌을 때, 나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제자일 때, 얼마나 장담했습니까? 주님을 안 떠나고,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도 달게 받는다고 장담했던 그가 예수님이 가야바 대제사장 뜰로 잡혀가시게 되자,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다음에서야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병원에 입원하고 병중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난 후, 다시 믿음으로 돌아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건강할 때는 자기 힘만 의지하다가 병들고 약해질 때, 하나님께 돌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연약한 자리에 놓여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 앞에 실패의 쓴 잔이 다가왔습니까? 지금 여러분 앞에 모든 것이 다 떠나고, 여러분 홀로 있습니까? 낙심하거나 비관치 말고, 이 기회가 내가 나를 똑바로 알고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모세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사명을 똑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중 호렙산 기슭에서 가시 덤불 속에서 불이 타는 것을 보고 호기심으로 달려갔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에서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모세는 자기의 정체를 똑바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궁중을 떠나 무려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사는 동안 자신을 잊혀진 존재로 느껴 왔습니다. 자신은 이곳에서 잊혀진 존재로, 하나님마저도 잊어버린 존재로 이 곳에서 덧없는 생활을 살다가 무명의 사람으로, 무용의 사람으로 인생을 끝낼 것으로 모든 것을 체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네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날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세상에서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더욱이 높은 사람이 자기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면 가슴이 뛸 만큼 흥분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날 기억해 주시고, 불러 주신다는 것은 너무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도 하나님이 맡기실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1장을 보면 나다나엘이 나사렛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는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내가 무익한 존재가 아니라 유익한 존재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한 하나님의 사명자로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눅 5장에서도 갈릴리 바다에서 시몬이 예수님 앞에 그분의 말씀으로 섰을 때, 그는 겸손해지고 사람 낚는 어부의 존재로 발견되었습니다.
지난 1년 2개월 동안의 기간을 거쳐, 34명의 성도들이 베델성서 6기생으로 말씀 공부를 마치고 오늘 오후에 수료하게 됩니다. 이 분들이 성서공부를 마치면서 느낀 점을 썼는데 모두가 말씀 공부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기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깨달았으며, 좀 더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작은 사명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음을 발견케 됩니다.
사람들의 도리나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존재를 바로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모세는 호렙산 기슭에서 타고 있는 불꽃 앞에서 모세의 자신과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호렙산 기슭에서 타고 있는 불이 바로 성령의 불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꽃 가운데서 부르시고 그에게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백성들을 이제 바로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도록 이 백성의 고통에서 건지게 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모세 자신에게 큰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시시하게 미디안에서 양치는 목자로서 숨겨진 도망자로 살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대지도자로 깨닫게 하신 것이 바로 성경의 불꽃에서입니다.
사 6장을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연기가 자욱하고 문지방이 요동하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을 때, 자기가 추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기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이사야는 불꽃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 주소서"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계속적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마다 자기는 부족한 죄인이요, 연약한 죄인 중의 죄수임을 발견하면서 자기 사명을 발견하여 위대한 전도자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모세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불꽃 속에서 모세는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 모세에게 본문 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모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고통과 실패와 시련 속에서 낙심치 말고 나 자신을 똑바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자신을 발견할 때만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며 여러분을 도와주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위대한 사명자로 큰 일도 감당케 될 줄을 믿습니다.
불을 일으키소서
출3:1-5절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 한해가 푯대를 바라보고 전진하는 한해, 그 푯대에 다다르는 성취가 있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푯대란 초병이 전방을 주시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초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바라봅니다. 그 시선에 아군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에 앞을 바라보는 그 눈에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새해가 새해가 되려면 우리안에 목표를 위한 결심이 만들어지고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열매를 거둬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새해 소망(비전)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만을 위한 목표를 세울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목표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삶이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올 한해 어떤 비전을 품으셨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품다는 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외가집에는 닭을 키우셨는데 할머니가 굵고 좋은 달걀을 골라 어미 닭에게 품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닭은 그 뜻을 어떻게 아는지 그 알들을 오래도록 품습니다.
잠깐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시간외에는 자기 품안에 알들을 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3주일이 지나면 그 알속에서 병아리들이 껍질을 깨고 세상을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전은 품는 것입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듯이 그렇게 올 한해의 비전을 품기를 바랍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를 통일한 후, 유럽 점령을 위해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며 자기의 소유를 장병들에게 다 나눠주자 한 신하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다 나눠주면 폐하는 가질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때 대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희망을 갖겠노라!” 올해가 희망을 품는 한해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의 첫 단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심을 기대하는 데서 우리의 비전은 시작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비전이 주님의 비전과 하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자녀들의 비전과 부모의 비전이 달라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는 기술자가 되고 싶은데 부모는 그래도 의사나 검사 뭐 이런 폼나는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 경우 말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깁니다. 아예 아이가 빗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비전이 다르면 인생에 낭비가 생깁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꺽을 수 없는데 자기 마음대로 고집하면 시간만 늦어질 뿐입니다.
인생 최고의 행복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이 찾아와주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본문의 모세는 40년동안 잊혀진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에서는 40년전에 현상수배가 된 사람입니다. 모세, 살인자, 이자는 애굽 사람을 주먹으로 죽은 자로서 잡는자에게는 현상금 금돈 10냥. 이런 포스터가 붙은 살인자였습니다. 그래서 미디안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애굽에서 광야길로 일주일이상을 걸어서 도망쳐야 하는 길이죠. 그곳에 가서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이드로라는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입에 들어가 데릴사위로 살았습니다. 40년동안 장인의 양을 치는 목동으로 숨어서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40년을 하면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도 양치기의 달인이었습니다. 어디 풀이 있고, 물이 있고, 언제 날씨가 좋고, 안좋고를 아는 데는 도가 튼 사람입니다. 그런데 별로 쓸데가 없는, 돈벌이가 안되는 전문가였습니다. 40년을 똑같은 일을 했으니 다른 소망이 있을 수 없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그런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40년이 다 채워지는 날 모세는 양을 치다가 신기한 현상을 보았습니다. 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다 타면 저절로 꺼져야할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날이 특별한 날, 그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뭐 대단한 날이 아니라 다른 날과 다름없이 양을 치던 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디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특별한 장소, 어떤 특별한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갈 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톨스토이는 구두수선공이 만난 하나님이란 짧은 이야기에서 그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성경을 늘 읽던 구두를 고치던 마틴 할아버지에게 하나님이 내일 그를 찾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신이 났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니 그래서 청소도 하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낧 밤이 되도록 하나님은 찾아오지 않고, 추위에 떠는 청소부 할아버지, 임신하여 먼 길을 가는 여인, 사과를 훔친 소년과 그 소년을 붙잡은 사과장수와 소년을 구해준 할머니가 다녀갔을 뿐입니다. 실망해서 잠든 그날 밤에 마틴 할아버지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그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음을 알았습니다.
40년동안 양만 치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주셔서 그의 삶에 새로운 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전 없이 살던 그의 삶에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놀라운 비전을 주십니다. 수십 마리 양이나 치던 목동에게 하나님은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서 우리의 비전은 시작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으신다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을 넘어 가보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셔서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비전을 주십니다.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찾아와주심으로 비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오시는 통로를 열어 놓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일, 예배의 자리에 기를 쓰고 참석하는 일, 은혜받기 위해서 사소한 자기 일을 포기하는 댓가의 지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귀하고, 그런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 자기의 삶과 물질로 헌신하는 일에 성실함으로서 하나님이 찾아와주심으로 새비전이 시작되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비전의 두 번째 단계는 현재 자신의 초라함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를 찾아가셨을 때 모세는 80세였습니다. 인생의 2/3를 산 사람입니다. 노인이죠, 40세의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구닥다리, 연식이 오래된 할아버지였습니다.
미디안 족속에게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젊은이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자기 양식을 빼앗길까봐 조심 조심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서 ‘큰 용사여!’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니까 삿6:1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그는 자신이 큰 용사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세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어떻게 큰 용사가 될 수 있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얘야, 내가 함께하면 그 미디안 놈들 한 주먹거리도 안된다.” 하나님이 뭐 조폭같이 말씀하셨죠. 내가 너를 찾아오지 않았니? 그렇다면 이제 네가 소심하고, 집안도 별 볼일이 없고, 너네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아무 상관없어, 왜?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거니까, 이제 너는 작은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용사가 되는거야. 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거에요.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 지금의 보잘것없고, 볼품없고, 무능력하고, 꾀죄죄한 것같은 모습 상관없어, 내가 너를 찾아가기만 하면 넌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예신교회가 작은 교회가 아니야, 내가 너를 찾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면 너는 이 땅에서 가장 큰 내 비전을 품는 교회가 되는거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삭이시는 거에요.
내가 다윗을 찾아갔을때 그 아이는 아버지가 손님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워서 들에 내보내서 양을 치게 만들었잖니? 하지만 일곱명의 형들이 아니라 그 양치기 옷을 입고 빨리 달려와 숨도 뺨은 빨개지고 숨을 헐떡거리는 그 막내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지 않았니?
내가 베드로를 찾아갔을때 그 볼품없는 못난이는 다른 동생들을 부추켜서 글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지 뭐냐? 그런 한심한 놈이 어디에 있니? 3년이나 내가 가르치고, 기적도 보게하고, 자기 손으로 병자도 고쳤으면서도 어떻게 하루 아침에 옛날 고기잡던 어부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그래서 내가 찾아갔더니 면목이 없어서 저만치 떨어져서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더라구, 그래서 내가 밥부터 먹였지, 그리고 내 양을 먹이고 치고 돌보라고 말해줬더니 이게 금방 기가 살아서 만찬때에 내 품에 기대어 ‘누가 주님을 팔자 입니까?’라고 묻던 요한을 시기해서 ‘이 제자는 어떻게 되겠냐?’고 묻잖아? 그 한심한 놈한테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니? ‘넌 상관하지 말고 나를 따르기나해라’ 그런데 그 놈이 내가 승천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설교했더니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나를 믿게 되었고, 나중에 십자가에 가꾸로 매달려 죽었단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보잘것없는 스펙 때문에 비전을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초라함을 보시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위대함을 꺼내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비전의 세 번째 단계는 주님의 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불이 붙어서 열심히 살때가 있습니다. 사랑도 불이 붙으면 뜨겁습니다. 식으면 언제 그랬나는 듯하죠. 열정을 품을 때는 힘이 나고 신나서 살다가 식으면 냉랭해집니다. 모세의 40년의 목동생활 어디서 그의 마음에 불이 붙을 일이 일어났을까요? 추위 피하려고, 음식해 먹으려고, 밤에 짐승 쫓는데 불을 썼겠죠. 40년동안 단 한번도 그의 가슴엔 불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왔는데 불과 함께 찾아오셨어요. 2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잘 읽어보세요. 나무가 다 타면 그 불은 꺼져야 하는데 이 불은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는 거에요. 하나님의 불이죠.
성경에 하나님을 불이라고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4: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하나님은 태우시는 불이란 뜻입니다. 오래도록 냉랭한 모세의 가슴에 하나님은 불을 지펴주셨습니다. 잠깐 타오르다가 꺼지는 불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의 남은 삶에 타오를 수 있는 불을 질러주신 겁니다. 그 불이 다윗의 가슴에도, 사무엘의 가슴에도, 다니엘의 가슴에도, 느헤미야의 가슴에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불같은 성령이 내렸습니다. 불을 받은 그들은 닫힌 문을 박차고 성밖으로 나가서 담대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고 그 불이 온 예루살렘을 태우고,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태우는 불이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비전을 이룰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가슴에 불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불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바뀌고, 인생의 목적이 바뀌고 그래서 세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자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학교와 직장과 세상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불 때문에 새로운 비전이 성취되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속에 주신 불을 꺼뜨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헨리 포드는 의사를 부르러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 그는 말보다 더 빠른 것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품고 결국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디트로이트 자동차 기념관에 가면 헨리 포드의 사진 밑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The Dreamer(꿈꾸는 자)”
우리 주님의 열정을 품고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새해가 되길 축원합니다.
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엘리야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다
출애굽기 3: 1-5
1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제사장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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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라 목사님들 46분과 함께 성지순례는 아직까지도 잊지 못 하는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시내산에 갔을 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가시떨기 앞에서 가이드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다.>
거룩한 삶을 살아간 선지자들은 광야와 갚은 관계가 있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 신을 벗으라.>
거룩은 장소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봅니다.
칼타코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가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앉아서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삼류기차입니다.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사람들은 바글바글댔습니다. 술마시고 취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온통 시장바닥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테레사는 조용히 묵상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게 들려 왔습니다.
<테레사야! 여기에서 5마일만 가면 50만명의 거지들이 길거리에서 나서 길거리에서 살다가 길거리에서 죽고 있다. 너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살아 있을 때에는 잠자리를 주고, 죽으면 무덤을 주거라.>
테레사는 조용히 수도원을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1948년 8월 8일 그는 로레토 수녀복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등에 나무로 조그만 십자가를 달아 놓은 수녀복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수도원을 떠나면서 일기를 남겼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밤 어디에서 잘 지 모르고 떠납니다. 주님! 나는 내일 아침 무엇을 먹을 지 모르고 떠납니다. 주님이 떠나라고 하셔서 떠나니 지금부터 내 일생 주님이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리고 칼타코로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야곱을 보려고 합니다.
형 에서가 죽으려고 할 때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창 28;10-11)
한 곳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곳 땅 바닥위에서 땅을 요삼아 하늘을 이불삼아 돌을 베게삼아 누웠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닥다리가 나타나더니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창 28;19)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기차안이든지 광야 들판이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되면 거룩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거룩입니까?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과 관계입니까?
1. 만남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면 거룩하여 집니다. 거룩하여 지면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집니다.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기차안도 됩니다.
광야도 괜찮습니다.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도 좋습니다. 모세가 가시 떨기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거룩은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곳이 거룩입니다.
고급 부폐 음식점이 있습니다. 아주 비싼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놓고 아주 비싸게 받는 고급 음식점입니다. 싱싱한 연어 회를 놓고 그 앞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먹을 만큼만 가지고 가십시오.>
조금 떨어진 곳에 더 비싼 요리 로브스터 요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 장난으로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마음껏 가지고 가십시오. 하나님은 연어를 지키시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연어앞에도 계시고 로브스터 앞에도 계십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서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거룩하여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에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입니다. 중대한 전쟁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면서 전쟁을 치루면서 성경을 100독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전쟁터이든 숙소이든 관계없이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읽었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또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명령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17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확신을 받았습니다. 상륙작전을 명령하였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였습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군목이었습니다. 나는 코스비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10명 가량이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를 안아 주셨습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나를 꼭 끼어 안고 오래동안 기도하여 주셨습니다.
전쟁터에서 코스비는 늘 기도하였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17시간의 대통령의 기도와 군목의 기도는 큰 전쟁도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2. 버림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40년간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양을 치던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러면 모세는 그 곳에서 신고 다니던 신발을 벗었을 가요?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신었을 가요? 아니면 평생 모세는 40년 동안 신발을 신지 않고 살았을 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을 신는 때는 언제이고 신을 벗는 때는 언제일가요?
신을 신고 있다는 말은 갈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신을 벗고 있다는 말은 갈 곳에 없습니다. 방향이 없고 목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라고 할 때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신발 벗어!>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나 요즈음에 힘들어.> 상대방은 말합니다.
<신발벗고 하나님께 맡겨.> 신발벗는다는 말은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를 버림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80세에 신발을 벗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민족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도망쳤습니다. 광야에서 자기 의지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네 생각대로 살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살아. 네 생각을 포기해. 신발벗어.>
나의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면 거룩의 관계가 생깁니다. 가시떨기 앞 땅떵어리가 거룩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는 상태가 거룩입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 대학교 앞에 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두 분 목사님이 함께 개척을 했습니다. 그 중 한 분 목사님이 보스턴을 복음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동안 10가정이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지난 4년 동안 훈련시킨 가정들에게 보스턴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다른 목사님과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 가정 모두가 그 목사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 중 두 형제의 결단이 충격적이었습니다.
한 형제는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버클리 대학교의 조교수로 발탁되었습니다. 이는 큰 명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 함께 기도하고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을 따라 보스톤으로 떠나서 일하겠습니다.> 또 다른 형제의 이름은 에드워드 강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합격하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도 집에 가서 기도를 하고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을 따라 가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각 주마다 법률이 다릅니다. 다른 주로 가면 그 곳에 가서 다시 자격증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두 형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요청하신다는 그 확신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떠났습니다.
내려놓음이 거룩입니다.
모세도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애급으로 떠났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세상 모든 것을 내려 놓으면 거룩한 관계가 됩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내려 놓음의 관계입니다.
어느 교회 젊은 집사님이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심하다가 여름휴가를 철원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담배를 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원에서도 숲속으로 몰래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곤 하였습니다. 담배를 피우고는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처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왕에 결심하고 올라왔으니 도중에 내려갈 수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데 이상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버려라. 내버려라.> 뭘 내버리라는 것일가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져보았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유유히 흐르는 한탄 강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바위 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그 후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날부터 담배냄새만 맡으면 구역질이 났습니다. 담배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내려놓음이 거룩입니다.
모세는 가시떨기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았습니다.
3. 헌신이 거룩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는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애급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들 인도하여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떨기 앞에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모세는 거절하였습니다. 계속 거절하였습니다.
<도망가서 살던 내가 가서 말하면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는 입술이 둔합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출애급기 4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노를 내시며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지원병이 아니라 차출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차출하셨습니다. 모세는 강제적으로 헌신을 약속하였습니다. 가시떨기 앞에서였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만난 것처러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모세야! 홍해를 지금도 가를 수 있니?>
<한번 해보겠습니다.> 모세가 기도하고 지팡이를 홍해에 내밀었습니다. 역시 갈라졌습니다.
<지금도 그 때 영력이 그대로 있구나! 놀랍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아! 지금도 갈멜산 기적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할 수 있니?>
<해보겠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고 손을 하늘을 향하여 쳐들었습니다. 불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놀랍다.> 그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지금도 물위로 걸으실 수 있으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해보겠다.> 그리고 물위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속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두 명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왜 그러십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못자국으로 구멍이 나서 물이 샜다. 너희를 향하여 헌신한 증거다.> 예수님의 손발에 박혔던 못자국은 헌신입니다. 헌신은 거룩입니다.
우리 교회는 양화진 선교사 묘비 닦기를 두 번 실시하였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이 땅에 와서 생명을 바쳐 일한 분들의 묘지입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첫 번 묻힌 분은 헤론이라는 의사입니다. 헤론은 테네시 의과대학이 생긴 이래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수재였습니다. 대학의 교수회가 그를 교수로 남아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선교사로 처음 임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펜셀러, 언더우드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에 내한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렌의 제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알렌이 선교사직을 물러난 후에 그는 제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밤낮 없이 헌신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5년 뒤인 1890년 여름에 각종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 휴양지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폭염 속에서도 서울까지의 먼 거리를 드나들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더위와 과로에 지쳐 결국 자신도 이질에 걸렸습니다. 3주간을 앓다가 7월 16일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젊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놓고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 무덤앞에 서니 숭고함과 거룩함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 들었습니다. 헌신이 거룩입니다. 우리는 헌신앞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헌신앞에서 거룩을 맛보게 됩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어떤 곳에서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이루어진 곳이 거룩입니다.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 거룩하여 지는 것일가요?
1. 하나님을 만나면 거룩한 관계가 됩니다.
2. 포기하면 거룩한 관계가 됩니다.
3. 헌신하면 거룩한 관계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최 세웅 목사님이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1981년 3월 6일이었습니다. 최 목사님이 아는 병원에 들렀을 때 직접 본 이야기입니다.
50대 어느 남자가 신문지에 무엇인가 싸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두 뭉치였습니다. 그리고는 원장님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입니다.
4살 된 아들이 갑자기 목구멍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책망을 하였습니다.
<어쩌자고 이 지경까지 병원에 오지 않았습니까? 혹이 너무나 커졌습니다. 수술 불가능입니다. 데리고 가십시오. 집에 편안히 뉘워 두는 것이 편합니다.> 다른 병원에 갔더니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지금 이 병원으로 들어 와서 의사 선생님에게 아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죽어도 여기서 죽이겠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수술 한번만 해주세요.>
의사 선생님은 각서를 받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20일 만에 아들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원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아들을 업고 몰래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밥은 안 먹어도 술은 마셔야 하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그 후 계속 술을 마시며 방탕하였습니다. 그 동안 아들은 잘 자라 군대에 갔습니다. 교회에 나가 믿음 좋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문지에 싼 것을 그 때 펼쳐 보이는 데 아들이 군대생활을 잘 하여 지휘관으로부터 받은 상패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의 전도로 아버지도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모범적인 집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드릴 때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날이 환하게 밝는 것도 모르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벼락치듯이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회개하라. 20년 전에 죄를 기억하느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잘못 하였습니다. 나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사깃꾼이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이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을 속였습니다. 내 양심을 속였습니다.>
그는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마련하여 신문지에 쌌습니다. 다른 신문지 뭉치가 돈이었습니다. 그는 돈 뭉치를 원장님에게 내놓으며 닭똥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원장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원장님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의사 생활 수 십년에 당신같은 사람 처음 보았습니다. 당신 아들 제대하면 내게 데리고 오십시오. 내가 신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목사가 되게 기도하겠습니다.>
거룩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