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몇 년 전부터 반재경 전도사님이 작성한 글로, 매년 교정 및 첨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
(요 20: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누군가 '믿음이 좋다, 신앙이 좋다'라고 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떤 뜻으로 사용합니까? 사실, 성경책 한 장 읽어보지 않고도 '신앙 좋다, 믿음 좋다'는 소릴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등등.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 그분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또는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이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롬 1:21).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말씀입니다.
도마의 믿음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증거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해하여 우리는 '무조건 믿으라'는 잘못된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도 자라면서 여러 가지 신앙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그것을 성경 말씀에 근거해 설명해 주기보다는 무조건 믿으라는 식의 답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성경적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잘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예수님의 선포된 말씀, 한 문장을 믿었던 백부장도 예수님께 놀라운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마디 말씀이라도 100% 믿는 것이, 성경 100독을 하고도 믿지 않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믿으려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여기까지 서론이고 이제부터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볼 때, 대체로 말씀보다는 감정이나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아, 오늘 은혜 받았다'라고 할 때, 그 말의 뜻은, 어떤 감정적 위로나 감동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감정이 몹쓸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도 보듬어 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저도 최근에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저의 감정까지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믿음의 잣대가 아니라, 나의 정신적 상태를 드러내 주는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말씀에 관한 지식 없이 이러한 감정적인 동요만을 좇는 신앙생활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두 번째 문제는 오감에 근거한 판단입니다. 미국에 유명한 치유 사역자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러이러한 느낌이 들면, 그 질병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고, 이러이러한 느낌이 들면 죄로 인한 질병이고, 아무 느낌이 없으면 그냥 자연적인 질병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역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이며 도마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 해 볼 때, 그렇게 오감의 감각을 따라가는 것은 믿음이 필요 없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만 해당한 경우이지 일반적인 말씀의 원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역을 받는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어떤 어떤 교회에 갔더니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느껴졌다'는 말을 주목해 보세요. 물론 분위기가 남다르고 평안이 흐르는 교회가 있고, 실제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님께서 나에게 강하게 역사하시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영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이 오직 "감각적 느낌"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느껴지든, 느껴지지 않든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에 근거해서 믿는 것에 더 큰 축복이 있음을,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추구합니까? 온몸에 따뜻한 기름이 흐르는 것 같아서 '아, 하나님이 나를 고치셨구나.'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을 원합니까, 아니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와 같은 말씀이 있으므로 아무런 느낌이 없어도 그 말씀에 더 큰 만족을 느낍니까? 예언의 은사가 있는 강사를 모신 특별 기도회에서 많은 사람이 예언을 받았는데 나만 못 받았을 때, 하염없이 무너질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책을 붙잡고, "이 예언의 말씀이 전부 나에게 주신 말씀이다(벧후 1:19)"라고 고백하며 믿음 위에 설 것입니까? 한바탕 울고 나야 기분이 후련합니까, (인간의 육체가 그렇게 기능하긴 합니다) 아니면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라고 찬양하면서 감정을 이기는 믿음 위에 서겠습니까?
물론 감정이 느껴진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느껴지지 않을 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오직 말씀만을 믿는지 보여주는 잣대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세계적인 현상이겠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 특별히 큰 문제입니다. 너무 느끼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막 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marvel)
'이상히 여기셨다'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marvel이라는 단어로 번역됐는데, 여러분, 너무 이상해서 놀랐던 경험 있으시죠? 너무 의아해서 말입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marvel입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너무 이상해서 예수님께서 놀라셨다는 얘깁니다. (마블 영화의 마블도 이 marvel입니다. 이상하다는 뜻 말고, 놀랍다는 뜻도 있거든요.) Marvel이 그런 뜻으로 사용된 구절이 있는데 바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marvel)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제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marvel하신 것이 두 번인데 한 번은 사람들의 불신에, 한 번은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셨습니다(marvel). 우리는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을 좇지 말고 오직 말씀만을 믿어서, 의심이 아닌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그러면 아마 다들 느끼려고만 하는 이 땅에서 주님의 눈에 금방 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