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안도 성은 강가에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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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22:32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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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강가에 있고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최자는 『삼도부(三都賦)』에서 대동강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못 물줄기 모였으니 강 이름이 대동이라 맑고 금실금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 평양을 부르는 옛 이름 중 하나)을 안고 풍수를 모아온 듯, 깨끗하기는 흰 비단을 깐 듯, 맑기는 청동 같은데, 닻줄을 풀고 화선(畵船)을 띄워 중류에서 머리를 돌려볼 양이면 황홀히 거울 속, 병풍 속에 놓여 있는 듯하다.
평양8경은 을밀상춘(乙密賞春, 모란봉 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 경치), 부벽완월(浮碧玩月, 부벽루에서의 달맞이 구경), 영명심승(永明尋僧, 해 질 무렵 영명사의 승려들이 찾아드는 풍경), 연당청우(蓮塘聽雨, 대동문에서 종로로 통하는 길 복판에 있던 연당에 비 내리는 소리), 보통송객(普通送客, 보통강 나루터에서 떠나는 나그네를 보내는 광경), 용산만취(龍山晩翠, 용악산의 사철 푸른 소나무가 늦은 가을에도 푸른 풍경), 거문범주(車門泛舟, 옛날 평양 외성의 남문이었던 수레문 앞 대동강에서의 뱃놀이 모습), 마탄춘창(馬灘春漲, 이른 봄 대동강의 여울 마탄에서 눈 섞인 물이 소용돌이치는 풍경)을 말한다.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은 강가에 있고, 절벽 위에는 연광정(練光亭)이 있다. 강 건너 먼 산이 넓은 들판과 긴 숲 너머로 멀리 둘러서 있어 명랑 수려한 것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고려 때 시인 김황원이 연광정에 올라 종일토록 깊이 생각하였으나 다만 “긴 성 한쪽에는 넘실넘실 강물이요, 큰 들녘 동쪽에는 띄엄띄엄 산이로다”라는 연구(聯句) 하나를 지었을 뿐, 시상이 막혀서 잇달아 짓지 못하고 통곡하며 내려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스운 일이며 시도 또한 아름답지 못하다.
대동강 일출
대동강 하류에 위치한 평양은 지대가 낮아 곳곳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 가로수와 대동강이 어우러진 풍경이 수채화처럼 애잔하다.
연암 박지원 역시 김황원의 시를 별것 아니라고 했는데, 『동인시화(東人詩話)』에는 그 내용이 이렇게 실려 있다.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고금(古今)의 제영(題詠)들을 보니 모두 제 뜻에 들지 않는지라. 그 현판들을 하나하나 불사르고 나서 온종일 난간에 의지하여 시를 지으려 애쓰다가 오직 이 하나의 시를 짓고 시상이 말라 통곡하고 갔네.
이 이야기는 1960년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대동강’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실렸다.
지금부터 약 850년 전, 김황원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여러 번 들었으므로 꼭 한 번 가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해 봄날 그는 마음에 그리던 평양을 찾아 부벽루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참 좋은 경치였습니다.
“물이 어쩌면 이렇게 맑을 수 있을까? 그 복판에 길게 떠 있는 능라도의 버들 빛도 아름답거니와, 그보다 강 건너 벌판의 넓고 아득한 경치는 가슴속까지 확 트이는 것같이 시원하구나! 멀리 동쪽의 산들이 조그맣게 점 찍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름답다!”
이 경치를 한참 내려다보던 그는 문득 정자 기둥에 여기저기 붙어 있는 수많은 글을 보았습니다. 제각기 이 경치를 글로 나타냈다고 써 붙인 것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 느낀 것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김황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 글들을 모두 떼어버렸습니다.
“내가 좋은 글을 지어 붙이겠다” 하고 그는 종이와 붓을 꺼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당장에 좋은 글이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좋은 글귀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는 단번에 써 내려갔습니다.
평양성을 끼고 흐르는 강물,
아! 넓기도 하여라.
강 건너 멀리 아득한 벌판 동쪽에는
점 찍은 듯 까맣게 산, 산, 산······.
그러나 이상한 일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이 떠오르고는 도무지 붓이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꽉 막혔습니다. 아니 생각이 막혔다기보다 말과 글로는 도무지 나타낼 수 없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온종일 그는 정자 기둥에 기대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을 좋은 구절은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대동강물이 더욱 아름답게 저녁놀에 물들었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을 글은 머리에 떠오르지 아니합니다.
그는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의 뜻을 말과 글로 나타내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하고 생각하니, 참 분하였습니다. 그는 슬펐습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기둥을 붙잡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사방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울다가 지친 그는 어둠 속으로 어디로인지 가버렸습니다.
김황원이 그날 대동강에서 체득한 것은 “위대한 아름다움이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라고 말한 프랑스의 작가 장 그르니에의 생각이나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라고 한 키츠의 생각과 동일했던 것은 아닐까? 계속하여 『택리지』는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 때 주지번이 사신으로 왔다가 연광정에 올라 큰 소리로 장쾌하다고 부르짖고 ‘천하제일강산’이라는 여섯 글자를 제 손으로 쓰고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
그러나 정축년에 청나라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던 날에 이 현판을 보고 “중원(中原)에 금릉(金陵)과 절강(浙江)이 있는데 여기가 어찌 제일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사람을 시켜 그 현판을 부숴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 글씨가 좋음을 아까워하여 ‘천하(天下)’ 두 글자만 톱질해 없애버리게 하였다.
평양 대동강
봉이 김선달이 팔아 먹었다는 대동강물 이야기는 우리에게 친숙한 설화다. 하지만 실제 대동강은 평양시내를 유유히 흐르며 푸른빛을 자아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연광정은 관서8경의 한 곳으로 중종 때 건립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대동강을 노래한 수많은 시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빼어난 시를 쓴 사람은 평양에서 태어난 정지상일 것이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문장」편에는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에서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김부식은 풍부하였으나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정지상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으며, 이규보는 눌러 다졌으나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인로는 단련하였으나 펴지는 못하였으며 (······) 이제현은 노련하고 기운찼으나 문채가 있지는 못하였고, 이숭인은 온자(溫藉)하였으나 기운이 단촉(短促)하였으며, 정몽주는 순수하였으나 요약(要約)하지는 못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균이 대동강 부벽루에 걸린 여러 시들을 철거했지만 유독 정지상의 시만은 남겨두었다고 한다. 다행히 천년세월 지나 임을 보낸 이의 슬픔, 애통함을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대동강 하류는 심한 침식을 받아서 평양의 동쪽에서도 모란대 부근과 같은 침식애를 비롯하여 많은 절벽이 하안에 나타난다. 합장강 합류점부터 재령강 합류점 사이에는 능라도ㆍ양각도ㆍ쑥섬ㆍ두루섬ㆍ벽지도ㆍ곤유섬 등이 자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은 강가에 있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