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neither cold nor hot: I would thou wert cold or hot. —계시록 3:15. Barnes' Notes on the Bible I know thy works - notes on Revelation 2:2. That thou art neither cold nor hot - The word "cold" here would seem to denote the state where there was no pretension to religion; where everything was utterly lifeless and dead. The language is obviously figurative, but it is such as is often employed, when we speak of one as being cold toward another, as having a cold or icy heart, etc. The word "hot" would denote, of course, the opposite - warm and zealous in their love and service. The very words that we are constrained to use when speaking on this subject - such words as ardent (that is, hot or burning); fervid (that is, very hot, burning, boiling) - show how necessary it is to use such words, and how common it is. The state indicated here, therefore, would be that in which there was a profession of religion, but no warm-hearted piety; in which there was not, on the one hand, open and honest opposition to him, and, on the other, such warm-hearted and honest love as he had a right to look for among his professed friends; in which there was a profession of that religion which ought to warm the heart with love, and fill the soul with zeal in the cause of the Redeemer; but where the only result, in fact, was deadness and indifference to him and his cause. Among those who made no profession he had reason to expect nothing but coldness; among those who made a profession he had a right to expect the glow of a warm affection; but he found nothing but indifference. I would thou wert cold or hot - That is, I would prefer either of those states to what now exists. Anything better than this condition, where love is professed, but where it does not exist; where vows have been assumed which are not fulfilled. Why he would prefer that they should be "hot" is clear enough; but why would he prefer a state of utter coldness - a state where there was no profession of real love? To this question the following answers may be given: (1) Such a state of open and professed coldness or indifference is more honest. There is no disguise; no concealment; no pretence. We know where one in this state "may be found"; we know with whom we are dealing; we know what to expect. Sad as the state is, it is at least honest; and we are so made that we all prefer such a character to one where professions are made which are never to be realized - to a state of insincerity and hypocrisy. (2) such a state is more honorable. It is a more elevated condition of mind, and marks a higher character. Of a man who is false to his engagements, who makes professions and promises never to be realized, we can make nothing. There is essential meanness in such a character, and there is nothing in it which we can respect. But i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is openly and avowedly opposed to anything; who takes his stand, and is earnest and zealous in his course, though it be wrong, there are traits which may be, under a better direction, elements of true greatness and magnanimity. In the character of Saul of Tarsus there were always the elements of true greatness; in that of Judas Iscariot there were never. The one was capable of becoming one of the noblest men that has ever lived on the earth; the other, even under the personal teaching of the Redeemer for years, was nothing but a traitor - a man of essential meanness. (3) there is more hope of conversion and salvation in such a case. There could always have been a ground of hope that Saul would be converted and saved, even when "breathing out threatening and slaughter"; of Judas, when numbered among the professed disciples of the Saviour, there was no hope. The most hopeless of all persons, in regard to salvation, are those who are members of the church without any true religion; who have made a profession without any evidence of personal piety; who are content with a name to live. This is so, because: (a) the essential character of anyone who will allow himself to do this is eminently unfavorable to true religion. There is a lack of that thorough honesty and sincerity which is so necessary for true conversion to God. He who is content to profess to be what he really is not, is a man on whom the truths of Christianity are likely to make an impression. (b) Such a mall never applies the truth to himself. Truth that is addressed to impenitent sinners he does not apply to himself, of course; for he does not rank himself in that class of persons. Truth addressed to hypocrites he will not apply to himself; for no one, however insincere and hollow he may be, chooses to act on the presumption that he is himself a hypocrite, or so as to leave others to suppose that he regards himself as such. The means of grace adapted to save a sinner, as such, he will not use; for he is in the church, and chooses to regard himself as safe. Efforts made to reclaim him he will resist; for he will regard it as proof of a meddlesome spirit, and an uncharitable judging in others, if they consider him to be anything different from what he professes to be. What right have they to go back of his profession, and assume that he is insincere? As a consequence, there are probably fewer persons by far converted of those who come into the church without any religion, than of any other class of persons of similar number; and the most hopeless of all conditions, in respect to conversion and salvation, is when one enters the church deceived. (c) It may be presumed that, for these reasons, God himself will make less direct effort to convert and save such persons. As there are fewer appeals that can be brought to bear on them; as there is less in their character that is noble, and that can be depended on in promoting the salvation of a soul; and as there is special guilt in hypocrisy, it may be presumed that God will more frequently leave such persons to their chosen course, than he will those who make no professions of religion. Comp, Psalm 109:17-18; Jeremiah 7:16; Jeremiah 11:14; Jeremiah 14:11; Isaiah 1:15; Hosea 4:17. 반스의 성경 노트 내가 너의 일을 아노니 - 요한계시록 2:2에 대한 주석. 네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하니 - 여기서 “차갑다”는 말은 종교에 대한 가식이 없는 상태, 모든 것이 완전히 생명이 없고 죽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단어는 분명히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차갑다거나 차갑거나 얼음장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물론 '뜨겁다'는 단어는 그 반대의 의미, 즉 따뜻하고 열성적인 사랑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말할 때 열렬한(즉, 뜨겁거나 불타는), 열렬한(즉, 매우 뜨겁거나 타는, 끓는) 등의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바로 그 단어는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얼마나 흔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여기에 표시된 상태는 종교에 대한 고백은 있지만 따뜻한 경건은 없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공개적이고 정직한 반대가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고백 한 친구들 사이에서 찾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따뜻하고 정직한 사랑이 없는 상태다; 사랑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구세주의 대의에 대한 열정으로 영혼을 채워야 할 종교에 대한 고백이 있었지만, 사실 유일한 결과는 그와 그의 대의에 대한 죽음과 무관심뿐이었다.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차가움만을 기대할 이유가 있었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애정의 빛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무관심만을 발견했다. 나는 차거나 뜨거운 것을 원한다 - 즉, 나는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그 두 가지 상태 중 하나를 선호한다. 사랑이 고백되었지만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서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뜨거운' 상태를 선호하는 이유는 충분히 분명하지만, 왜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 없는 완전히 차가운 상태를 선호할까?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 (1) 공개적이고 공언된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상태가 더 솔직하다. 변장도 없고, 은폐도 없고, 가식도 없다. 우리는 이 상태의 사람이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지” 알고, 우리가 누구와 거래하고 있는지 알고,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런 상태는 슬프지만 적어도 정직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공언을 하는 상태, 즉 불성실과 위선의 상태보다는 그런 성격을 선호한다. (2) 그러한 상태가 더 명예롭다. 그것은 더 고상한 마음의 상태이며 더 높은 성품을 나타낸다. 약속에 거짓을 일삼고 실현되지도 않을 공언과 약속을 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한 인격에는 본질적인 비열함이 있으며, 우리가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단호하게 반대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며, 자신의 길에서 진지하고 열성적인 사람의 성품에는 비록 그것이 잘못되었을지라도, 더 나은 방향에서 진정한 위대함과 장엄함의 요소가 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다소의 사울의 성격에는 항상 진정한 위대함의 요소가 있었지만 가룟 유다의 성격에는 결코 없었다. 한 사람은 지상에서 살았던 가장 고귀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수년간 구세주의 개인적인 가르침 아래서도 배신자, 즉 본질적으로 비열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3) 그런 경우에는 회심과 구원의 희망이 더 크다. 사울은 “위협과 살육을 내뿜는” 상황에서도 회심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가 있었지만, 구주의 제자라고 공언한 유다의 경우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구원과 관련하여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람은 참된 신앙이 없는 교회 회원, 개인적인 경건의 증거가 없는 고백을 한 사람, 이름만 가지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이런 행위를 허용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성격은 참된 종교에 지극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회심에 꼭 필요한 철저한 정직과 성실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진리가 폭동의 인상을 남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b) 그런 상인은 결코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참회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말하는 진리는 당연히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선자에게 말하는 진리는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진실하지 않고 공허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위선자라는 전제하에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방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고안된 은혜의 수단을 그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교회 안에 있고 자신을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그가 저항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자신이 고백하는 것과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그것을 간섭하는 영의 증거로 간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판단 할 것이다. 그들은 그의 직업을 거슬러 올라가 그가 성실하지 않다고 가정 할 권리가 있는가? 그 결과, 종교 없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에서 회심하는 사람은 비슷한 수의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훨씬 적을 것이며, 회심과 구원에 관한 모든 조건 중에서 가장 절망적인 것은 속아서 교회에 들어올 때이다. (c)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덜 노력하실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호소가 적고, 그들의 성품에 고귀하고 영혼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적으며, 위선에는 특별한 죄책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교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그러한 사람들을 더 자주 그들이 선택한 길에 맡기실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비교, 시편 109:17-18; 예레미야 7:16; 예레미야 11:14; 예레미야 14:11; 이사야 1:15; 호세아 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