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욱 미카엘 신부
연중 제30주일
탈출기 22,20-26 1테살로니카 1,5ㄴ-10 마태오 22,34-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아름다운 잔치
지난겨울, 베를린에서 본 어느 자매님의 고희연은 감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어려웠던 시절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습니다. 짧은 어학과정을 거치고 병동에 투입된
파독 간호사들의 수고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가녀린 몸으로 육중한 체구의 독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파김치가 되도록 애쓰던 기억, 그러다 체력이 달려 닭백숙이라도 해 먹으려는데
독일어로 닭이 뭔지를 몰라서 달걀을 들고 가서 얘 엄마를 달라고 했다던 에피소드,
어떻게든 아끼고 모아서 고향 부모님께 논밭을 사드리고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보냈던 이야기들…. 듣다 보면 함께 울고 웃게 되는 사연들이 한아름입니다.
고희연의 주인공인 자매님도 수고 끝에 이제는 은퇴생활을 즐기며 성실히 본당에서 봉사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고희연을 해드리겠다고 세 아들이 계획을 세웠는데,
정작 주인공이 극구 사양하니 아들들이 꾀를 냈습니다.
성당 강당에 깜짝 파티를 준비해 놓고 어머니를 납치하다시피 모셔왔지요.
가족과 친지들이 각자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김밥이며 잡채며 요리로 상을 채운 가운데,
세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노래를 하고 시를 써서 읽었습니다.
어린 손녀가 비뚤비뚤 손으로 그려 만든 축하 카드를 받으며 환하게 웃는 자매님의 모습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잔치 다음 날, 어김없이 봉사하러 오신 자매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자매님, 어제 잔치는 너무도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좋은 잔치를 왜 안 하겠다고
고집 부리셨어요?” 자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 은총으로 이렇게 가정을 꾸렸고 애들도 잘 커서 행복하게 지내지만,
같이 고생하던 언니들, 친구들 가운데는 그런 복을 못 누리는 분들도 계셔요.
그분들 마음 아플까봐….”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시는 자매님 앞에서 저도 말을 잊었습니다.
나는 누리지만, 또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분들 속사정을 헤아리며
자제하고 삼가는 마음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너희도 이방인이었다
오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시고
십계명을 주시는 대목(탈출기 20장)에 이어지는 법전의 일부입니다.
20장에서 23장까지 이어지는 이 법전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규율하는 다양한 규정이
등장하는데, 규정 전체를 관통하는 뜻은 네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안 겪도록 돌보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개구리 올챙잇적 잊지 말라는 가르침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강대한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덕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약한 이들까지 빠짐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돌봄과 인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나와 엮일 것이 없는 이방인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이 내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느님 덕분에 얻은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 사랑을 전해주고 물려주는 데 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전하는가
내가 겪은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시련의 경험은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 고통의 기억 속에 ‘나는 고생했지만 내 자식만큼은 고생 안 시키겠다’는 마음이
우리 사회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끼니 걱정에 시달리거나,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놓치거나, 일만 하느라 옆도 돌아보지 못했던
어려움을 미래 세대가 겪지 않도록 애쓴 결과,
오늘의 한국사회는 물질적인 면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십리 길을 걸어가던 세대가 값비싼 자동차로 막히는 거리를 물려주고,
끼니 걱정하던 동네를 미식가의 천국으로 만들어 준 것과는 별개로, 정작 중요한 것,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를 기억하고 전해주는 데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원하던 풍요는 얻었으되 이웃을 여전히 경계와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마음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거두고 이룬 것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점을 놓치기 때문에, 내 성공의 결실을 독점하고 남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못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학벌 사회의 폐해를 뼛속 깊이 체험하고 자란 사람들이
입시 경쟁의 광풍을 잦아들게 하는 대신, 더 지독한 경쟁의 프레임을 강요하는 학부모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요컨대 고통의 기억, 시련의 기억만 남은 사람은 그 자신부터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을 온통 경쟁자와 잠재적인 적으로 가득 찬 전쟁터로 인식합니다. 내 사람과 남들이라는
이분법에 갇혀서 남들이 도전할 수 없는 나만의 성벽을 쌓아올리는 일에 골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삶을 구가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나와 남 사이에 구별의 벽을 세우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메마르고 빈한한 마음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근본을 짚어주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계명은 의무이기 전에, 우리가 시련의 고통만 남기고 사랑의 기억을
증발시켜 버린 초라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지 돌아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가 남기고 전해야 할 것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입니다.
대구대교구 박용욱 미카엘 신부
2023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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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호 미카엘 신부
연중 제30주일
탈출기 22,20-26 1테살로니카 1,5ㄴ-10 마태오 22,34-40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가?
“신은 죽었다.”는 주장으로 시대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던 니체가 떠오른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고,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가 익숙함에 젖어 본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 의미도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은 알아듣기 쉽지 않다. 오늘 말씀에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라고 가르치신다.
도대체 이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수님의 사랑은 분열되지 않은 참되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통합적 존재 곧 온전한 존재이니 통합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말은 거룩하나 몸은 불경스럽고, 몸은 거룩하나 말이 거칠다. 이것은 분열된 상태다.
그래서 복음서는 신앙인이 통합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을 하라고 선포한다.
분열된 상태에서의 ‘사랑’은 거짓이고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쉽게 말해 겉은 웃고 있지만
속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에 몰두하는 것과 같다.
형식주의적 신앙에 익숙해져 위선으로 깨져버린 통합을 세상과 교회에서 많이 경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수많은 담화문에서 통합을 강조하신다. 생명 앞에서는 중립이 없고,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 나라를 떠나온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통합의 정신을 권고하신다.
지금 우리의 몸과 정신이 소진되어 지쳐있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삶이 행복과는 멀고,
신앙생활도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 익숙함에 젖어 점점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라고 물어보면, 모두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행복을 방해하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가?”라고 신자에게 물으면,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면서도 절대 자기 뜻은 버리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했고, 교황님도 말씀하셨다. 통합적인 온전한 사랑은
모든 것을 쏟아야 가능하다. 결
국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버려야 한다.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알고 있는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술에 관한 학술적인 논문을 읽었다고 해서
술에 취하는 것은 아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쏟아 사랑하자. 통합적이고 온전하게 행동하자.
광주대교구 황성호 미카엘 신부
2023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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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렬 요셉 신부
연중 제30주일
탈출기 22,20-26 1테살로니카 1,5ㄴ-10 마태오 22,34-40
사랑의 시작점, 공감 능력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매년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라디오에서 한 번은 듣게 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오늘,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이번 주간 묵주 기도 성월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노래 가사를 떠올리다 보니) 세상을 향해 쉼 없이 외치는 성모님의 간절한 메시지를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묵주 기도 성월과 헤어지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저는 올해, 교회의 귀중한 선물인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제 20년 차,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모자란, 덩치만 큰 어른으로 살아왔음을 성찰하고 고백하며 지냅니다.
안식년 동안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책자에 수록된 167곳의 순례지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평신도가 이 길을 완주하고 축복장을 받는 걸 알게 되면서 사제인 저도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한 달 전, 100번째 순례지 방문 후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완주한 선배들이 얼마나 대단한 수고와 체험을 했을지 존경스러울 만큼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순례 중에 ‘나 홀로 미사’를 드리지만, 그래도 주일이면 그날 머무는 곳의
가까운 성당을 찾아 신자석에서 ‘함께하는 미사’의 소중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미난 경험도 합니다. 어느 본당의 수녀님은 저를 성가대에 데려가고 싶어 했고,
어느 본당의 자매님은 성경 공부반에 들어오라 권유했고, 어느 본당의 신부님은 미사 후에 먼저 나와
인사를 하면서 ‘혹시 우리 쪽 사람 아니냐?’며 미사 중에 제가 이쪽 사람인 걸 감으로 눈치채셨다는 등,
사제 복장을 갖추지 않으니 여러 상황을 겪습니다.
주일헌금도 매주 봉헌하는데, 제단에서 공지할 때는 몰랐던 2차 헌금이 왜 그리 자주 돌아오는지
가끔 헌금의 액수를 줄일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어느 날은 성당과 거리가 멀어 여유 있게 출발했는데도,
길을 헤매거나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해 미사에 늦어 신부님에게 꾸중 듣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면으로 다 공유하지 못하지만,
신자들의 불편한 마음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제가 그동안 제단 위에서, 그리고 본당 신부로서 우리 신자와의 공감 능력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은 주님의 공감 능력에서 시작됨을 배웁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과부, 고아, 가난한 이를 포함한 모두의 상황을 공감했기에 그들을 지키고
사랑해달라고 계명으로 남깁니다.
이는 누군가가 당신 자녀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계명을 배우고 가르친 제가, 지금까지 하느님이 맡기신 어린 양들을 제단 위에서만
내려다봤으니, 요즘 제단 아래에서 깨우친 계명의 시작점(평신도와 공감)을 놓쳤던 겁니다.
제단 아래로 내려가 눈높이에 맞춰 형제자매를 깊이 들여다봐야 공감할 수 있고,
그제야 제대로 사랑하게 됨을 매주 신자석에서 배웁니다.
여러분도 서늘해질 차가운 공기 속에
이웃들과 공감하며 따뜻한 가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마산교구 김형렬 요셉 신부
2023년 10월 29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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