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은 물로 돌아간다던데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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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일정이 여유로워 출근 전에 비스듬히 앉아 잠시 쉬었다. 그러자 용이가 몸을 붙이며 배를 드러내어 긁어주니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다본다. 10살인 용이에게 쿠싱이라는 질환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하여 얼마 전에 약 처방을 받아왔다.
지난 20년 동안 세 마리의 강아지를 키웠다. 시츄 종으로 모두 순했어도 타고난 그들의 성향은 다 달랐다. 첫 강아지였던 한이는 침울한 듯 고집스러워 그가 앞장서는 대로 따라다녀야 했고, 앙증맞았던 새침데기 방실이는 잔머리로 우리를 곧잘 웃겼으며, 용이는 유달리 감기는 강아지였다.
한이가 일찍 병들어 죽었을 때 나는 거의 한 달을 울먹였다. 그립고 딱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한참 뒤 방실이가 15살이 되어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는 늙으면 으레 병들어 죽게 마련이려니 하고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사람보다 수명이 짧은 탓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용이도 먼저 내 곁을 떠날 것이다.
용이의 배를 긁어주며 이런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것, 그래서 한시도 고정된 상태로 있지 못하다는 것, 이러한 것에는 불변하는 영원성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그토록 사랑스러워하던 강아지들을 하나하나 떠나보내는 과정을 겪었던 때문인지, 그렇게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모습이 선연히 보이는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 또한 그러한 과정에 있을 거고, 내게 소중한 대상들도 그러한 도상에서 점점 스러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 순간 심호흡을 하며 어느 날 갑자기 마주치게 될 어떠한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원래 삶이란 그렇게 덧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뭘 놀라겠느냐 해서다.
우리의 삶을 바닷물에 비유하는 글이 있다. 바람에 잠시 솟아오른 물방울은 이내 바닷물로 돌아가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다고 하였다. 그 잠시의 과정에서 어떠한 형상을 보였든 바닷물로 돌아갈 때는 개별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렇게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착을 두어 뭣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자아 자체가 물방울처럼 한시적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게 모순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이 덧없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망하여 극구 초월을 꿈꾸는 게 아닐까 싶다.
나 또한 한때는 불변하는 것만이 참되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어디를 목표로 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눈높이에 따른 스펙트럼을 이루기 때문에 어떤 게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인지 점점 불교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산다는 자체가 고달픔이고, 그것을 넘어서려면 탐진치(貪瞋痴)에 기초한 갈애(渴愛)를 벗어던져야 하고, 그러려면 실상을 직시하는 수행을 해야 한단다. 특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들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상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애착을 두면 두는 만큼 괴로움이 생겨나기 때문이란다.
사유는 이렇게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달리 행동하고 있는 나, 용이를 연실 쓰다듬으면서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바라니 말이다. 그래서 여간 힘이 갖춰지지 않으면 몸 따로 마음 따로라고 노는 것인가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마는지 용이는 꿈틀거리며 더욱 몸을 내게 찰싹 붙인다. 어쩌자고 이 부실한 내게 그토록 의지하는지! 그 믿는 모습이 딱해 뭉클해지는 이 마음은 또 무엇인지!
사랑이란 그렇게 옳고 그름도 모르게 하는 독약인지 그냥 한숨을 쉬고 만다. 그러자 용이는 무슨 일인가 하고 그 특유의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다본다. 그렇게 하여 출근 시간을 앞두고 용이와 나는 순간을 영원인 양 그렇게 즐겼다.
첫댓글
추석명절을 잘 보내셨기 바랍니다. 저는 집중 명상수행을 다녀왔습니다. 나름 유익한 시간을 가졌고, 그러한 청복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