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한 사도요한 신부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둘째미사
지혜서 3,1-9 로마 5,17-21 마태오 11,25-30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갑시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죽지 않으려거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러나 첫 사람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명했고 그 댓가로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들의 원죄 이후 그들의 후손들은 원죄의 결과인 죽음의 고통을 예외없이
겪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람들은 죽었고 현재의 모든 사람들도 죽고 있으며
미래의 모든 사람들도 앞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죽음의 때, 즉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죽고 나면 다 끝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이 한번 죽으면 끝이 나는데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성부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라고
불리고 주님이라고 불리며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주시는 이 멍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입니다. 또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계명은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이러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살기 위하여
그분의 법인 계명을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받들어 실천해 나갑니다.
이 멍에와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멍에와 계명은
예수님 당신이 먼저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예사로운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자
이웃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부께서는 목숨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시고,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육체를 영원히 살리시고
그분을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히 예수님이 주신 멍에와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생명을 성부께로부터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참된 행복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지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해 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도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멍에와 계명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지향하여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소요한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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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일 바오로 신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지혜서 3,1-9 로마 5,17-21 마태오 11,25-30
우리 교회는 어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냈고, 오늘은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그 이유는 ‘통공’ 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이렇게 믿음의 내용을 고백합니다.
“…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
여기서 통공은 산 이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죽은 이가 산 이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이와 죽은 이의 경계 없이 기도하는 것이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의 취지입니다.
얼마 전에 50년을 개신교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개종하신 분이 쓴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임승만 안토니오, 좋은 땅, 2014)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이 책에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 이후의 교리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는 부모님 생전에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고 또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굳은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에는 연옥교리나 통공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개신교에서는 죽고 나면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맙니다.
따라서 추모예배를 하지만 이는 산 자들을 위한 기념예배인 것이며,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것이며
죽은 이들에게 불필요하고 전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효자로서 그리고 부모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던 터에
가톨릭의 ‘연옥’ 교리와 ‘통공’교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아내와 함께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
개종할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연옥(煉獄: Purgatorium)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카베오 12,41-45 참조)
그래서 대죄를 지은 사람은 곧바로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 저지른 영혼이나, 소죄를 지은 영혼들은 연옥에서 잠벌의 정화과정을
통해서 정화되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잠벌(暫罰: Poenatemporalis)이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잠시 당하는 벌,
즉 연옥에서 잠시 받는 벌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비록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다고 해도 잠벌은 남아서
연옥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이 아직도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연옥영혼을 위한 이러한 미사나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문이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함께 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대구대교구 박영일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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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춘도 토마스 신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첫째미사
마태오 5,1-12ㄴ
본 고향을 준비하며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을 기억하고, 본 고향,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어느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석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급성 폐기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있는 자기 아내에게 조차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글을 남기고,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였습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만에 사르트르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프랑스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본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대서특필했던 것입니다.
그 본 고향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르트르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살았기에, 죽음이 두려운 존재였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 고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 본 고향으로 잘 돌아가기 위해 현세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진복선언도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3~10 참조)은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약속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현세만을 위해 살지 않고, 현세에만 희망을 두고 살지 않고,
하느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지금 칭찬받는 사람들’
(루카 6,24~26 참조)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세만을 위해 살고, 현세에 마음을 다 빼앗기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하느님은
함께 하실 수 없게 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하느님을 자기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유하고, 배부르고,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신앙인은 현세만을 위하여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본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묘지를 돌면서 묘비를 읽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묘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묘비의 글은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무슨 이런 묘비가 다 있는가’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줄을 읽고 난 뒤에 순간 ‘이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마음이 콱 찔려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본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지금부터 철저히 하며 살도록 다짐합시다.
현세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삶을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천상에서 누릴 참된 행복을 꿈꿔봅시다.
안동교구 허춘도 토마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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