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로마 11,1ㄴ-2ㄱ.11-12.25-29 루카 14,1.7-11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보다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권고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겸손해야만 합니다.
교만한 지식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코린토 1서 8장 1절-2절).
겸손이야말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적지 않은 경우 윗자리를 선호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자세로 산다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계실 공간이 없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겸손하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고, 남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대하는 이를 만나더라도,
이마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나에게 서운하게 대한다면, 나 역시 그에게 무언가 서운하게 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또한, 상대방의 언행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마저 깨닫습니다.
따라서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이웃을 통해 전해 주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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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로마 11,1ㄴ-2ㄱ.11-12.25-29 루카 14,1.7-11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상을 3부분으로 나누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
뉴턴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두 번째는 빛의 속도와 같은 세상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양자역학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세상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는 세상입니다.
인드라의 세상이고, 홀로그램 우주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세상을 인간의 의식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감성, 이성, 오성으로 질문에 답을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깨달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타볼 산에 오르셨을 때 제자들이 보았던 놀라운 모습입니다.
무의식 또는 초의식의 세상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동굴 밖의 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모든 성인과 성녀들이 원했던 세상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앞에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걸어가면 좋은데
약간 주춤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저를 불렀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었고, 지갑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가려하는데 경찰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릇된 욕망, 헛된 욕망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사도행전에서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필립보 사도에게 질문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위로와 고독’을 이야기합니다.
악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있고, 선으로부터 오는 고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로와 고독이 어디에서 오는지 ‘식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릇된 욕망, 헛된 욕망은 넓고 화려해 보여도 결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그것을 두 개의 깃발로 이야기합니다.
사탄의 깃발은 멋지고, 웅장하고, 강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야 할 깃발은 그리스도의 깃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였지만,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희망의 대답이었습니다.
생각하니 예수님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친구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회광이가 목을 잘 칠 수 있도록 협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의 때이니 믿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살의 삶을 사셨지만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5살의 삶을 살았지만 수선 탁덕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화려한 깃발이 아닙니다.
그릇된, 헛된 욕망이 아닙니다.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당당함입니다.
나는 어느 깃발을 향하고 있을까?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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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바오로 신부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로마 11,1ㄴ-2ㄱ.11-12.25-29 루카 14,1.7-11
‘윗자리’와 ‘끝자리’, ‘영광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이루는
강한 대조가 오늘 복음을 이끌어 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윗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부끄럽게 되고,
끝자리를 찾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논리에서는 윗자리가 영광을 주고,
끝자리는 부끄러움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당연하고 자명한 논리를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세상 논리와 예수님 말씀이 충돌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초대한 이에게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밀려나더라도, 또다시 윗자리를 고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 논리를 더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옷을,
예수님 말씀의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움이 아닌 영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