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시몬 신부
연중 제31주일
말라키 1,14ㄴ-2,2ㄴ.8-10 1테살로니카 2,7ㄴ-9.13 마태오 23,1-12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자기 삶의 체험을 통해 이웃과 형제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또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형제들의 소리를 통해 자기 삶의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신이 받은 삶이 어떤 것이든 소중하게 여기며,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들과 삶을 나누는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주어진 우리의 소중한 삶을
형제들과 나누며 살아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과 약속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약속을 잊고 살기에 형제들로부터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형제를 위선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형제들을
받아들이기보다, 사랑을 강요하고 받은 은총을 저버리고, 자신은 더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분수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는 자부심이 없으면 세상 살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남을 혼자서만 인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남도 이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남들도 역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있기에 각자 자신의 잘남을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에 좀처럼 다른 이의 잘난 점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나아가 남이 나보다 잘난 것을
인정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값을 깎는 것 같아 남의 잘남을 인정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애써 찾아낸 것이 어리석은 자기 자랑입니다. 세상에 자랑을 위한 자랑거리가 안될 것이
없습니다. 때로 자랑할 것이 없을 때 대신 자랑할 것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그 사람 나름의 장점이 있고, 그 장점도 그 사람으로는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거리로 삼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인격을 자랑하면 그의 인격은 보잘것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인격은 하느님과 맺은 삶의 계약을 성실하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늘 노심초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자랑함으로써 갈망을 풉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그의 자랑이 지루하게만 여겨지고, 남의 험담에 마음이 개운치 않으며,
여기에는 하느님의 책망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부드럽고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춘천교구 이동주 시몬 신부
2023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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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현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31주일
말라키 1,14ㄴ-2,2ㄴ.8-10 1테살로니카 2,7ㄴ-9.13 마태오 23,1-12
거울 속의 한 사람
"잔칫집에서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6-7).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람을 매일 만납니다. 어디에서 만날까요? 바로 거울 속에서 입니다.
거울 앞에 설 때면 '많은 교우들의 스승으로, 아버지로, 선생'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거만해지고
교만해지는 저를 여과없이 비춰주는 것 같아 정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갓 사제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할 줄도 아는, 패기 넘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승과 아버지,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책임과 의무도 거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스승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 그리고 선생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그 답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스승과 아버지, 선생의 자리와 권위만을 원하며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을 섬기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들을 높여주며,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진
교우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참 스승, 참 아버지, 참 선생으로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분명낮은 곳에 있는 우리를 찾아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존재는 이름에만 있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목소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1살 2,13)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거울 속의 한 사람'도 다시 한 번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께 이만 줄이겠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 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
2023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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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남 미카엘 신부
연중 제31주일
말라키 1,14ㄴ-2,2ㄴ.8-10 1테살로니카 2,7ㄴ-9.13 마태오 23,1-12
내게 맡겨진 주님의 일을 합시다.
“이번에는 네가 회장해봐! 내가 도와줄게”, “이번에는 네가 담당해봐,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라는 문자를 사용합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라는 그 말은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인데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정작 자신에게 그런 일들이 다가올 때에는 “나는 다 해보았으니까 다른 사람이 해야지”
라는 회피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맡으면 한결같은 비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또한 사람들과 대화의 시작이 항상
“그게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라는 말을 하면서 부정으로 시작하여 긍정으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지 않을 일이라면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을 거면서
“네가 먼저하면 도와줄게”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의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야지”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기도해주는 모습이 더 좋은 모습입니다.
더 좋은 모습이라면 책임을 맡고 있는 이가 부탁을 했을 때 단 한 번의 거절 없이
“알겠어, 내가 한번 해볼게”라는 긍정의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셔도 되고, 우리는 무거우니 그 옆에만 따라가든지, 아니면
바라만 보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 말씀은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이 지금의 우리네 삶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미사 참회예절 때에는 내 탓이고, 미사 후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너의 탓입니다.
미사 때에는 내 가슴을 치며 내 탓이고, 미사가 끝나자마자 너의 가슴을 치며 네 탓이라고 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율법과 바리사이의 모습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부터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젠 너의 차례이다”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차례가 되어야 합니다.
“너니까, 너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처럼 떠넘기지 마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 자녀의 모습입니다.
광주대교구 박대남 미카엘 신부
2023년 11월 5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