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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나라, 경주 남산 답사(5) / 다시 나타난 부처...삼릉계 석불②
마애여래좌상에서 삼릉계 본류쪽의 길을 따라 50여 m 내려온 곳에는 최근에 복원된 석조여래좌상(삼릉계석불
좌상)이 있다. 잔설이 덮힌 핏줄마냥 드러난 소나무뿌리가 왜 그런지 애닯아 보인다.
1920년대의 석불좌상("경주 남산의 불적" 사진)
석불좌상 정면도. "경주 남산의 불적" 그림
이 불상의 1910년대 사진에는 광배 없이 불두가 잘라져 불상 하대석
우측에 놓여있었고, 불두의 코밑 부분이 많이 파손된 상태였으나
1920년대에 들어 떨어진 불두와 상부가 깨어진 광배를 올렸다.
근년에 불상의 깨어진 부분에 아무런 고증없이 시멘트를 발라놓아 불상의 얼굴을 대하기가
민망스럽도록 만들어 놓았다. 1960년 경까지도 윗부분이 조금 상한 채로 불상 뒤에 서 있던
광배는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에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채 2007년 3월 까지 대좌 뒤에 방치되었고,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불상의 대좌는 심하게 그을려 있었다.
광배에 가려 지금은 볼 수 없는 석불의 뒷모습이다.
편단우견으로 입은 가사는 양 허리로 유연하게 흘러내렸고 몸체는 풍만하다.
(사진출처:http://cafe.daum.net/ghkdgndmltkfkd/J2e4/718 )
2008년 10월... 2007년 3월부터 복원작업에 들어간 불상은 천막에 싸여 세상에 나타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2008년 12월 중순... 잔설이 남아 있는 산중의 스치는 바람끝은 차다.
다시 찾은 석불은 복원 후 최초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근접촬영을 청하였으나 완성된 단계가 아니라며 원거리 촬영만 허락을 한다.
불상의 얼굴에 흰 석고분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라 복원을 담당한 분들은 저 상태로 석불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에 경계 했음이다.
복원하는 저 분들처럼 몸전체를 덮은 위생복 차림을 보면 뜬금없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빠삐용"에서 스티브맥킨과 열연한 더스틴 호프만의 "아웃브레이크(Outbreak)"
라는 영화다. 원숭이가 한국 국적의 태극호를 타고 미국에 세균을 감염시킨다는 한국을 비하하고
왜곡한 사례로 회자된 영화다. 국내 모 회사의 참치 통조림도 화면에 비춰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꽤나 상했기 때문에 저런 옷차림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화재를 복원하는 현장에서 보는 느낌은 그와 사뭇다르다.
그 분들이 불상의 복원에 쏟는 심혈과 세세한 정성이 가슴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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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하순...불상 가까운 곳에 둘러쳐진 장막은 걷혀져 있었고, 외곽장막의 탐방로쪽에는 1910년 대 불상
의 목이 떨어져 있는 상태부터 오늘날 복원된 모습까지의 사진이 걸려있어, 보는 이들에게 문화재의 수난과정과
그에 따른 보호와 복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있다.
외곽의 장막을 철거하지 않고 존치한 이유는 올해에 불상 주변의 축대와 탐방로를 정비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666호
2007년 3월 부터 1년 9개월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과 정비를 맡아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불상을 대하니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석불좌상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불상이 원래 있었던 지점을 추정한 데 이어
불교미술사 등 관계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과학적 보존처리에 이은 원형 복원 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 시멘트를 덧발라 흉할 만큼 지나치게 길게 만들어놓은 석불좌상 얼굴을 원래 형상에
가깝게 되돌려 놓았고,깨진 광배도 보수했다. 총 높이가 2.38m, 광배 높이는 1.66m이다
광배는 10여개로 조각난 파편을 붙여 원형을 살렸고,없어진 부분은 새로운 돌로 조각해 넣었다.
특히 불상의 얼굴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 삿갓골 제1사터 석불입상과
남산 미륵곡석불좌상,안계리석불좌상,남산 용장계석불좌상 등 비교적 얼굴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불상의 사례를 참고하여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상호로 최대한 재현했다.
연화대좌는 하대석없이 땅에 있는 지대석 위에 직접 놓은 중대석 위에 얹혀 있다.
8각 중대석에는 면마다 안상을 새겼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平床)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寶相華)로 장식된
화려한 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 나라의 꽃송이인 것이다.
단정하게 솟은 육계(肉髻)며 둥글둥글하게 새긴 나발(螺髮)이며 아래 세계를 내려다보는
가느스름한 눈, 꼭다문 입술과 살결이 풍만한 턱에서 엄격함과 자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얼굴 표정이다.
목에는 부드럽게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고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입은 가사는 얇다.
옷주름은 가늘고 몸체는 풍만하다.
광배는 특히 아름답다. 원형에 가까운 신광과 보주형(寶珠形) 두광으로 된 넓고 큰 광배다.
신광에는 어깨의 선을 강조하여 두 줄기의 넝쿨을 새기고 한 쪽에 네 잎씩 새긴 넓은 나뭇잎들이
안쪽으로 나부끼는 활기찬 도안으로 되어있다, "경주 남산의 불적" 조사 그림에는 두광에 백호를
중심으로 원을 돌리고 그 둘레에 보주형 꽃잎을 배치하여 칠보 연꽃을 피워 놓았는데, 복원된
두광에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으니 어느 것이 잘 못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길(화염:火焰)을 새겼는데 불꽃들이 춤추는 듯 약동하는 모습
이다. 이렇게 화려하고 생기에 넘치는 석불광배는 경주 남산에서 뿐 아니라 전 신라시대 불상
에서도 예가 드문 걸작이다.
이 불상은 어느 방향에서 보나 아름답다. 곁에 있는 바위들이며 계곡의 여울 등에 잘 조화되도록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 위에는 집을 지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노천불이었던 모양이다. 주위 환경에 조화롭지 않은 건축물은 설령 불상이 비바람을
맞더라도 편리성때문에 참된 미(美)를 파괴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 여래상의 존명은 아미타여래라 생각된다. 서쪽을 향해 앉아 있기 때문이다.
불상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세월에 깍이고 깍여 보는 방향에 따라서 갖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위 무리가 있
다. 1926년 조사 때에는 이 바위 인근에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이 있었는데. 1변 72.3cm 되는 4각 대석 위에
지름 54.5cm 되는 연꽃을 새기고 가운데 간석(竿石)을 끼우는 구멍이 둥글게 패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유물은 문화재 도적들에 의해 지금은 없어졌다.
또한 석불 앞 이 곳 근처에 석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삼릉계삼층석탑(좌)과 승소곡삼층석탑(우)
국립 경주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어느 누구의 눈에라도 먼저 띄는 것은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이다. 에밀레종에 머문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면 도로변 얕은 언덕 앞에 서 있는 탑이 삼릉계
석불좌상 앞에 있던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삼릉계곡에 무너진 상태로 있던 것을 1930년경 일제가 남산유적조사를 할 때 경주
박물관에 옮겨놓았으나 이후 그 확실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석조아미타여래불의 복원 발굴 조사 때인 2008년 7월에, 석불좌상 남서쪽 아래의 추정
절터에서 이 탑의 기단부와 탑신부의 떨어져 나간 파편을 찾음으로써 위치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높이가 216cm이고 1층 옥개석(석탑이나 석등의 위를 덮는 돌)의 한 변 길이 98cm, 1층
탑신 높이가 53cm의 소형석탑으로 복원된 이 석탑은 3층 옥개석과 노반(불탑 꼭대기에 있는
상륜(相輪)의 가장 아랫부분)이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특히, 옥개석의 2층 받침이 1층과 2층
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으로, 추녀마루의 곡선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하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층 탑신석을 괴고 있는 기단부 받침돌은 한 개로 사용하고 그 이하를 생략한 형식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석탑은 남산 비파계곡(琵琶溪)의 잠늠골사지 석탑이나 포석계곡
(鮑石溪)의 늠비봉석탑, 용장사지(茸長寺址) 삼층석탑과 같은 것으로 남산에 조성된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석탑이다.
약사여래불이 경주 남산에 있던 모습 공진회 마당에 옮겨진 약사불과 감산사지석불상
석조여래좌상의 동쪽 등성이는 여러 개의 바위 무리들이 있는데 서 있는 바위,누워 있는 바위,포개져 있는
바위들로 웅장하게 어울려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이 바위들을 남면에서 보면 두 개의 절벽바위가 수 십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데 그 밑으로 여울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흘러 내린다.
서쪽 것은 허리에서 단을 이루어 다시 둥글둥글 솟아 올랐으므로 그 모양이 기괴하다.
서쪽 절벽바위 높은 곳엔 선각여래상을 새겼고 동쪽 절벽 허리에는 입체로 조각된 석조약사여래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석조약사여래상의 대좌가 놓여있던 자리 뒤에 약 3m의 간격을 두고 지름 30cm 크기의 기둥자리 같은
것이 패어져 있다.
그리고 기와조각들도 흩어져 있었으니 이 불상은 지붕이 덮여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약사여래불은 지금 이 곳에 없다.
다음은 약사여래불이 이 곳을 떠난 연유를 설명한 글이다.
1915년 가을에 서울 경복궁에서는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가
열렸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년간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개최했던 대규모 박람회였다
이 바람에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일대의 전각들은 마구 헐어지고 그 자리에는 이국적인 서구식 전시
공간들이 속속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많은 구경거리가 있어야 했던 까닭에 조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특산물과
전시물품의 수집이 이뤄졌고, 여기에 문화재나 미술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공진회장의 야외전시구역을 장식할 목적으로 전국에 흩어진 빈 절터에서 모두 18점에 달하는 전시유물들
을 한꺼번에 수집해온 것도 바로 이때였다. 여기에는 지금 국립 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있는 개성의 남계원
칠층석탑, 원주의 영천사보제존자사리탑과 천수사오층석탑, 그리고 이천의 안흥사오층석탑과 같은 석조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물의 수집은 해체운반의 편의성 탓인지 주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개성과 이천, 그리고 강원도 원주와
충북 충주 등지에서 이뤄졌지만, 멀리는 경북 경주에서 옮겨진 것도 셋이나 되었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에서 발견된 약사석불좌상 한 구와 괘릉 인근의 감산사지에서 찾아낸 석조보살입상 및 석불
입상 두 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감산사지에서 옮겨진 석불상 두 구는 광배의 뒤쪽에 제작시기와 연원을
소상하게 적어놓은 명문이 남아 있다 하여 현재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조선총독부는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수집대상유물을 선정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멀리 떨어진
경주의 유물까지 수집대상에 포함했던 것일까?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해체이전작업에 편리한 것을 우선하여 수집대상을 골라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옮겨진 남산 삼릉계 약사불과 감산사지 석불상과 같은 경우에는 비록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해체분할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쉽사리 서울로 옮겨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표면상으로 드러낸
유물수집의 목적이 박람회장을 치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 이상의 조형미를 지닌 것들이 선정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계명대신문 제940호, 2005년 2월 28일자 발췌. 작성자: 이 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이순우 선생은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와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의 저자다.
서울로 옮겨져 지금은 국립 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301호에 안치된 약사여래불은 불상의
명칭을 설명하는 박물관 내부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모델로도 활약 중이시다.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은 왼손에 약 그릇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을 표시하고 이중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불상만의 높이는 145cm,대좌는 135cm,배광의 높이는 197cm이니 전체 높이는 332cm이다.
몸체는 정사각에 가까울 만큼 키가 작고 무릎 너비가 좁은 까닭에 부처의 활동력은 느낄 수
없고 그 대신 안정감이 잘 나타나 있다. 풍만한 얼굴에 두 눈은 가늘고 길다.
약간 치켜올라간 두 눈꼬리를 따라 눈썹도 약간 치켜 올라갔다. 턱은 군턱이 지고 두 볼이
아래로 쳐져 얼굴표정은 엄격하게 보인다.
나발(螺髮)로 표현된 머리 위에 육계가 나지막하게 솟아 있고 두 귀는 어깨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짧은 목에는 세 주름(三道)이 그어져 있고 통견(通肩)으로 입은 가사에는 옷주름이 질서있고
간결하게 새겨져 있다.
연꽃잎 모양으로 된 배광(背光)에는 신광과 두광이 새겨져 있는데,신광은 두 줄의 원으로 나타나
있다. 원과 원 사이에 화불과 영락(瓔珞)을 새겨 두광을 장식하였고,신광에 화불과 연화당초를
새겨 배광을 장식하였다.
배광 둘레에는 불길(화염:火焰)을 새겼으나 활기가 없다.
대체로 이 불상은 활동적인 기상이 없고 균형미에 치중한 느낌이 든다.
이 불상은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못하는 절벽 허리에 안치되었던 것이므로 파손없이 보존이 잘
되어있다.
하대석은 8각으로 16잎의 꽃잎이 새겨져 있는데,꽃잎 끝은 두 개의 둥근 곡선으로 마무리되었고
꽃잎마다 두 개의 돋을새김으로 입체를 강조하여 힘차게 보인다. 지름은 1.45m이다.
중대석도 역시 8각인데 면마다 안상을 나타내었으며 앞면과 뒷면엔 햘로를 새기고 양 옆으로
각각 3면에는 보살입상을 새겼다.
중대석 위에는 연꽃송이를 사실적으로 나타낸 상대석을 얹어 놓았다.
16잎씩 두 겹으로 핀 연꽃인데 하대석에 비해서 아주 부드럽고 고운 사실적 꽃잎이다.
연꽃은 흙탕물에서도 때를 타지 않아서 깨끗한 정토(淨土)라는 뜻으로 불상대좌에 나타나지만
향로와 보살은 무슨 뜻일까?
이 꽃 위는 여러 보살들의 축복을 받는 향기로운 동방유리광세계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웅대한 절경 속에 하늘 높이 앉아 계시던 이 부처님 자리에는 지금 지대석 밑에 괴여 놓았던
자갈돌들만이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다.
답답한 박물관 진열실 안에 갇혀 있는 이 불상은 본래 있던 고향인 경주 남산 삼릉골(냉골)을
얼마나 그리워 할까?
참고자료: 윤경렬 著 "경주남산/ 겨레의 땅 부처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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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 그 어느곳에서든지 부처님은 모든것을 다 받아드리시지요~근데 지금의 세상에선 그러하지 않는것 같습니다~보고.듣고도 말하지 않으려니 말입니다~오늘도 눈감고 묵묵히 입다무시고 계시는 부처님~하루도 나의 아름다운 부처님을 위해 공손히 합장 드립니다~나무관세음보살~~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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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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