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째 여름에는 승리를...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안녕하세요.
제가 지부장이 되고 나서 요즘 제가 맨날 거짓말 친다고... (웃음) 다섯 번째 해부터 꼭 마지막이다. 그리고 송전탑 앞에서는 여섯 번째 겨울로 끝을 내겠다 그랬는데, 다시 일곱 번째 여름에 끝내겠다는 얘기를 이 자리에서 드립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끝내겠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저희가 왔는데, 쉽지 않습니다.
아침에 되게 걱정을 했어요. 아침에 비가 온다 하고, 습도가 상당히 높고, 그리고 날씨도 불쾌지수가 상당히 높게 그런 날씨여서 많은 분들이 함께 못할 거라 생각을 했는데, 우리 신부님들, 수녀님들, 교우 여러분들, 생계 때문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우리 조합원 동지들, 지역에 함께 하시는 분 등 많이 계십니다. 해고자들을 대표해서 지부장 김득중,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미사 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제가 미사에 참석한 게 꽤 오래된 것 같아요. 왜 그런가 생각을 해 봤더니 지난 유월 달 미사에 제가 참석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날짜를 물어보니까, 6월 8일 날 했다고 합니다. 그날이 저희가 해고 통보를 받은 지 만 6년이었고, 그날 이곳 정문 앞에서 저희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지난 6년의 삶 속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변화가 어떻게 바꿨는지를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 팀하고 함께 우리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우리 해고자들의 72,5%가 우울과 불안장애를 겪고 있고, 91%가 아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정말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문제는 우리가 지난 29일부터 교섭을 15차 같이 진행하고 있으니, 회사가 조속하게 결단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개인적으로 미사에 두 달 만에 참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날 기자회견을 하고 오후에 제가 못 올라왔던 것은 최종식 쌍용차 신임 사장과 공장 안 김규현 위원장과 만났습니다. 정말 처음으로 3시간 이상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6년, 7년의 이 시간들을 스스로 돌아보며 제가 하고 싶던 얘기들, 우리 조합원 동지들이 하고 싶던 얘기들을 다 했고, 회사도 그리고 공장 안 기업 노조도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 쟁점이 된 쌍용차 문제를 이제는 뭔가 해결 하자는 이런 의견을 좀 모은 바가 있습니다. 근데 벌써 이제 7월 하고도 중순이 왔죠, 아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해고자 문제를 풀자 라는 것 까지는 서로 인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187명에 대한 해고자 복직과 47억에 대한 손해배상 감내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저희가 교섭을 했지만 다시 그런 쳇바퀴 도는 얘기만 했고, 아직 추후 일정은 잡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난 1월부터 시작됐던 그래서 15차, 16차까지 왔던 실무 교섭의 첫 수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몇 개월 수개월이 지나면서 내용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회사가 이제는 입장과 계획을 가지고 이제 만나야 되는 거 아니냐’ 지난 두 번째 본 교섭에서 회사측 대표에게 이렇게 전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고심을 할지 아니면 다시 파국으로 갈지에 대한 모든 선택과 결단은 회사가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6월 지나고 저희 간부들 30여명이 멀리 전라도로 가서 수련회를 좀 했어요. 그 동안 교섭에 우리가 목을 메진 않았지만, 이 지지부진한 교섭에 우리가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다, 이 7월과 8월을 교섭도 하고 투쟁도 하는 계획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계획 속에서 그럼 함께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의견을 모은 것이 공장 앞 천막 농성입니다. 서울에서는 문기주 지회장과 정비지회가 끊임없이 연대 투쟁을 다니고 있고, 평택에는 24명이 15일차 24시간 천막 농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아침 6시에 기상을 해요. 기상을 하면 가장 큰 문제가 화장실입니다. 빠르게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다 큰 어른들이 함께 생활한다는데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모처럼 오랜만에 저희가 다시 합숙 훈련하던 그런 마음으로 저희가 임하고 있습니다.
6시에 일어나면 공장 안 동료들, 야간작업하고 퇴근하는 동료들한테 수고하셨다는, 그리고 다시 수고하라는 얘기를 아침 7시부터 8시 15분까지, 이곳 정문과 아니면 남문, 후문 저 뒤쪽에도 상당히 문이 많거든요. 저희가 4곳에서 인사를 합니다. 동료들의 표정과 손짓, 말 이런 것이 상당히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과 다르게. 그래서 저희가 좀 힘들고 고되지만, 또 회사는 우리 문제에 대해서 아직까지 진전된 안을 내놓고 있지는 않지만, 공장 앞 동료들의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아침과 퇴근시간에 받을 수 있어가지고, 힘들지만 힘 받고 진행합니다. 공장 앞이 그런 훈훈함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저희가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아시겠지만, 저희가 천막을 기존에 있던 거에서 한 동을 약간 더 넓혔거든요. 왜냐하면 숙소개념이었습니다. 우리 24명이 기존 천막에서 다 잘 수가 없으니까, 저희가 천막을 좀 넓히고, 사무실 바닥과 방 등에 나눠서 자고 있는데요. 평택 시청과 경기 경찰청이 천막을 철거하라는 계고장을 지난주와 지 지난주에 보냈고, 그리고 금요일에는 철거하겠다고 경찰 병력을 동원하였고, 송탄 칠성소의 용역 철거반을 이끌고 왔다가 큰 충돌 없이 가긴 했지만... 하여튼 끊임없이... 저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현재 노사가 교섭중이다, 65개월 만에 해고자라는 것을 인정을 받았고, 또 해고자를 대표하고 있는 금속 노조 쌍용차 지부를 인정받았다, 이미 실무 교섭을 진행하고 있고, 대표인 자를 포함해서 노노사 대표가 교섭을 두 번 하고 있다, 이것을 좀 지켜보고 그리고 이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도 그 이 역할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쪽에서는) 상당히 곤욕스럽다는 얘기를 하면서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희가 지난 6년 7년 동안 어떤 수많은 탄압들을 받아왔던 것처럼 저희도 굽힐 수 없다, 너희들도 알아서 해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평택시로부터 연락이 와서 평택시장이 목요일 날 2시에 면담을 좀 하자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분명히 얘기 했습니다. 천막 철거를 전제로 한 면담이거나 간담회라면 저는 응하지 않겠다, 다만 이 쌍용차, 이 지역의 현안의 문제를 함께 풀기 위한 자리라면 저희도 충분히 그 자리에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저희들 차분하게 함께하는 동료들과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나아가고 있고요.
오늘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인데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훈훈한 마음, 따뜻한 마음 가지고 한 주를 좀 힘차게 시작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번 주와 다음 주까지가 상당히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 같아요. 지금 공장 안 노동조합은 회사와 임금 교섭을 하고 있고, 이번 주 오늘 내일 모레까지 집중 교섭을 통해 이번 주까지 교섭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거든요. 오늘 아침에 기자한테 엄청 많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매일노동뉴스에 ‘쌍용차 해고자 복직 구부 농성 넘었다’ 이렇게 기사를 써가지고요. 기자들이 막 난리가 나 전화를 했습니다. 저도 모르는 그런 내용이 나와 가지고요. 아마도 그 기자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본인의 바람을 조금 담아서 기사를 쓴 것 같습니다. 저희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려는 마음을 담은 것처럼. 아무튼 그렇게 언론의 힘과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의 힘을 받아서 지치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처럼 웃으면서 또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서 정말로 7번째 여름 안에는 승리하는 쌍용차 지부가 되어서 함께 승리의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저희도 차분하게 힘내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믿음과 기도가 꼭 현실에 닿도록 부단히 싸우겠습니다
이창근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반갑습니다. 이창근입니다.
미사 잘 참석하지 않았었는데, 계속 잘 듣기는 했습니다. 좀 전에 신부님 말씀 듣다 보니까 오늘이 20일이라고 말씀하셔가지고, 사람 제사 지내는 날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날이죠? 아마 오늘 밤에 아마 어떤 집에서는 제사가 있겠죠. 쌍용자동차 첫 번째 가족 희생자 사망 날짜가 내일입니다. 내일이, 2009년 7월 21일 날 공권력이 아침부터 밀고 들어온 날입니다. 이 날 아침 6시부터 YTN을 시작으로 많은 언론이 보도했고 생방송으로 중계가 됐습니다. 쌍용차 진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그 소식을 듣고 저희 간부 정책 부장 아내가 자살하는 사건이 2009년 7월 21일 입니다. 오전 7시경입니다. 공장 앞에 있다 보니까 저기 있는 도산 공장이 보입니다. 바로 앞에 공터가 있고 그 뒤가 도산 공장입니다. 저기에 걸터앉아있는 노동자들을 가끔 생각합니다.
2009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무더웠어요. 비도 안 오고 무덥고 후덥지근하고 습도 높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가끔 정문 앞서 보면 저기 걸터앉아 있던 우리 동지들 이젠 뭘 하고 있는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열심히 싸운다고는 싸웠지만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서른 몇 명 모여 있지만 어떨 때는 각각 시몬스 침대 포켓 스프링처럼 각각 따로 고민을 갖고 있는, 또 옆 사람에게 자기 생각이 전이되지 않는 그런 시간도 뚝뚝 끊기게끔 많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부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2015년 7월 달이 정말 국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기가 마련돼서 공장 복직에 단초를 마련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여러분께서 많이 기도해주시는 만큼 그 기도가 정말 현실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중에 하느님을 통해서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정말 우리 해고자들 몸을 관통해서라도 몸과 몸이 이어지는 이 믿음과 소망과 기도가 꼭 현실에 닿기 위해서 부단히 싸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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