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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지혜서의 말씀 1,13-15; 2,23-24>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
2,23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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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풍요롭게 사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들을 채워 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8,7.9.13-15>
형제 여러분,
7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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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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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느 인질범이 할머니를 납치해서 인질로 잡아놓고 그 집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너의 시어머니를 내가 데리고 있다.
천만 원을 가져 오면 풀어 주마.”
그러자 며느리는 “천만 원이 누구 애 이름이야? 어림도 없어. 당신 마음대로 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질범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요.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말하자, 며느리는 곧바로
“계좌번호가 어떻게 되죠? 지금 당장 넣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어떻게 말했기에 며느리가 곧바로 반응했을까요?
“좋다. 그러면 너의 시어머니를 도로 데려다 놓겠다.”
설마 이런 며느리가 있지 않겠지요?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느는 것을 보면서
이런 며느리도 혹시 생기지 않을까 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기도 합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혼자서 잘 살 수 있다고 자신 있어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루 중에서 나 혼자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단 한 순간도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혼자 있는 것 같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을 떠올려 보세요.
이 모든 것을 내가 직접 만든 것일까요?
아니지요.
내가 구입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도움, 특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도움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도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주님이 이 세상에 공기를 거두신다면, 또한 빛과 어둠을 없애신다면, 온 세상에 비를 내리지 않으신다면….
이러한 상상을 해보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님께 받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즉, 주님과 내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또한 나 역시 주님처럼 이웃에게 사랑의 도움을 나누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웃는 사람들처럼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살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아이의 숨이 끊어졌음이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지요.
즉, 예수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윗자리에 올라서야 하고, 남은 내 밑에 있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들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며 “탈리타 쿰!”이라고,
즉,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면서 자기라는 죽음의 틀에 갇혀 있지 말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잡고 생명의 삶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내 손을 잡으시는 예수님의 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삶인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간석4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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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희망의 힘>
대단한 협상가이면서 특히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50년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랠프 존슨 번치 (Ralph Johnson Bunche 1904-1971, USA)’입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48년, UN의 협상 대표가 암살되자
그가 이 일을 이어 받아 탁월한 협상 능력으로 휴전을 이끌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은 없습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지도자들이 있을 뿐이지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화와 특히 유색인종을 위한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71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큰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그의 어린 시절에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고
1년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그의 평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열두 살 난 랠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랠프야,
너에게 물려 줄 것이 한 가지도 없구나.
그러나 엄마의 말을 잊지 말아다오.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알겠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잊지 마라.”
그 이후로 그는 로스앨젤레스에 사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그는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면서 힘겹게 공부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인종 차별과 가난의 어려움으로 수십 번 학교를 그만 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어머니가 최후로 남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유언을 떠올리며 극복하였습니다.
소아마비 장애까지 있었던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마치고
국제 기구를 통해 세계 평화와 소수 민족의 인권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은 모든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병들고 가난하고 천대받는 흑인이고, 게다가 어렸을 때 부모를 한꺼번에 여의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에너지였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랠프 번치의 어머니와 같은 힘을 주는 유언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12년간 하혈병을 앓던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죽어가니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러던 중에 당신의 몸에서 기적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시고 갑자기 서시더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쳐대는데 누가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가 자신의 병이 고쳐진 것을 느끼고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립니다.
그 여자는 의사들에게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쏟아 붓고 갖은 고생만 하여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희망하고 또 그것을 믿고 실행합니다.
그러자 병이 고쳐지고 예수님께 칭찬까지 받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믿음과 희망은 이렇게 하나입니다.
희망하기에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기에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희망 속에서 사랑이 피어납니다.
정말 믿음과 희망을 걸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금방 절망하여 자포자기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절망입니다.
그 이야기가 곧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회당장은 조금 전까지 가졌던 실낱같은 희망이 무너져 내립니다.
어쩌면 중간에 기적과 시간을 빼앗아 간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원망스러워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눈치 채신 예수님은 바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재차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죽음보다 무섭지만,
희망은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다다르니 역시나 곡하는 사람들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불고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는 죽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비웃을 뿐입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께는 족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내어 쫓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 제자 셋만을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절망에 주저앉아 누워있지 말고 일어나란 뜻입니다.
그러자 소녀는 곧바로 일어나 걸어 다닙니다.
다시 삶의 힘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사가는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고 덧붙입니다.
숫자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열두 광주리 등을 보면 아시듯이
이스라엘에서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즉, 하혈병을 앓는 여자와 이 소녀는 똑같이 12년 동안 충분히 절망하며 살아왔던 것을 의미합니다.
12년은 이들이 인생의 의미를 포기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절망적인 일만 있었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희망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혈병을 고친 여인은 자신의 희망과 믿음으로 스스로 주님께 다가올 줄 알았지만,
야이로의 딸은 이미 자신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일어설 힘이 없었는데
그의 부모의 희망과 믿음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정말 삶의 에너지를 하느님으로부터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혈병을 앓는 여인을 고쳐 줄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의 힘은 저절로 나갔습니다.
이는 원하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은총을 퍼부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고 희망하지 못하여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 “건강하세요!”하고 할머니 등을 문질러주면,
할머니가, “어머나, 몇 달 동안 등이 뜨거웠었는데, 신부님의 건강하세요라는 말씀과 손으로 문질러주니까 금방 그 고통이 사라졌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더 문질러 달라고 손을 잡아끕니다.
저는 그 할머니가 아프셨는지도 몰랐습니다.
그 할머니는 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믿음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저의 본당 후배를 오랜만에 길에서 만났는데
다짜고짜 안수를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결혼했는데 몇 년 째 아기를 못 낳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안수를 해 주었더니 바로 임신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신기합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해 주면서도 믿음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저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으로 은총을 흡수해 버린 것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바람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불게 마련입니다.
어쨌건 믿음만 있다면 옷깃만 잡아도 아무도 못 고치는 병이 고쳐지는데,
하물며 그 분의 몸을 영해 그 분과 한 몸이 되는 우리들이야
믿음만 있으면 얼마나 큰 은총을 얻어 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야이로의 예에서는 바로 주위에 있는 우리들의 믿음과 희망으로
다른 사람에게 은총을 전달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고 완전히 죽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 확실하더라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를 사랑하여 하느님께 희망하고 믿는 사람만 있다면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통해 죽은 사람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한 가지 확실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본인이 아니면 반드시 ‘누군가라도 믿고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주실 수 없으십니다.
절망이라는 것, 당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매일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들에게 무어라 말해 주어야 할까요?
또 내일을 알 수 없는 우리 삶도
희망을 잃게 하는 일들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겨 둔 것이 희망인 것처럼
결코 그 분께 바라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고 희망하고 또 믿지 않으면
정말 매일 죽고 싶은 일들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바라보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옵니다.
힘들어하시는 분들께 오늘 복음이 정말 ‘복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로마 유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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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광하 치리아꼬 신부님의 묵상글 *
<또 다시 희망을 살아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한 귀부인이 소시마 수사를 찾아와 슬픈 눈빛으로 묻습니다.
“‘영혼의 불멸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사람들은 말합니다.
‘네가 죽으면 무덤에 묻히고 그 무덤에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너는 세월 속에 잊혀져 버린다.’
그런데 어떻게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요?”
소시마 수사는 부인의 슬픈 눈동자를 읽고 심오한 권고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당신이 한 사람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면
그의 영혼이 죽지 않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때 영혼의 불멸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는 비록 죽었으나 영원히 나에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그 사랑이 그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면,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살아남게 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 지혜서의 저자는 그 옛날 하느님의 계시와 예지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지혜 2,23).
하느님의 인간 사랑은 실로 끝이 없으십니다.
유한의 인간이, 그것도 인생살이의 여러 고난에서 허덕이는 가엾은 인간이,
끝내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그야말로 비참함의 말로일 것입니다.
때문에 집회서의 저자도 일찍이 이렇게 한탄한 바 있습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는 날부터 만물의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몹시 힘든 일이 맡겨졌고 무거운 멍에가 아담의 아들들에게 지워졌다.
그들의 고민과 마음의 두려움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 그것은 바로 죽음의 날이다”
(집회 40,1-2).
결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
하느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인 우리 인간의 끝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 우리가 끝내는 영혼이 불멸하리라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보이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치유될 수 없었던 하혈하는 부인이나,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도
불멸의 희망을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시며 희망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 5,34)
그리고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는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며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 5,41)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희망을 걸다가 끝내 이 세상에서 종말을 고할 슬픈 인생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떠한 역경과 고통에서도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명령은,
희망을 살지 못하고 세상살이에서 절망의 발걸음으로 쓰러져 허우적대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명령의 말씀인 것입니다.
“일어나라!”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으실 것처럼 보이셨던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도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같은 확신이 있었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7-19).
이제 우리는 또다시 일어나 희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도 희망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현세에 희망을 두고, 현세의 희망에 상처와 절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세의 영원불멸의 생명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이 결코 절망으로 다가올 수 없는 법입니다.
그같은 의미에서 브라질의 유명한 인권운동가인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할 때,
그 무엇보다도 내면적 해방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머릿속에 떠올리자.
자기 자신의 노예인 자가 어떻게 다른 이들을 해방시킬 수 있겠는가?
모든 이를 위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이다.”
자기 자신이 먼저 현세의 죽음에서 희망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오늘은 또한 교황주일입니다.
영원한 희망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와 교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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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하혈하는 부인>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여인도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부인이다.
이 부인은 어떤 여인인가?
복음이 이 여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었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느라고 고생을 하였고,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혈하는 부인의 절망적인 상황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이 부인이 처해진 상황이 곧 세례 받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즉 죽음의 병을 치유 받지 못한 채 죄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곧 세례성사이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죽음의 병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그리고 죄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오늘 이야기가 "12년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죽도록 고생만 하던 여인이 결국 죽었다."라는 이야기로 끝났다면 삼류 소설이야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만일 그런 소설이라면 "참, 안됐다. 불쌍하기도 하지!"라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은
불행했던 한 부인의 삶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졌을 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까지 받은 행복한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 부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으로 돌아설 수 있게 되었는가?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라고 복음은 적고 있다.
즉 부인이 깊은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그녀를 구하게 된 첫 번째 출발점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나서부터이다.
아마 "예수님"이라면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 분이시라는 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시라면 자기 병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생각했을 것이고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고 꼭 그분을 만나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던 참에
'예수님'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 부인이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과
일반 사람들이 듣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부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한가닥 희망을 갖고 마지막으로 매달릴 수 있는 분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이 부인에게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냥 지나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이름이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이 순간은
적어도 부인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고,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이처럼 이 부인에게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이고 급박한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부인은 그런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의 자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에 따라서 듣는 것도 다르며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오는 소문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다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 부인의 절박한 상황이
예수님의 소문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인은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뜨려야 한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면 이 부인은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 부인처럼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을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 10,14-15)
나에게 들려 오는 예수님의 소문은 어떤 소문인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갖게 하는가?
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전한 적이 있는가?
우선 이 부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마음 자세가 달랐다.
복음은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고만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지 그 목적이 분명하지가 않다.
하지만 부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간절한 생각으로 따라 다녔다.
부인의 자세는 맹목적인 따름이 아니다.
목적이 분명하고 자세가 진지하고 간절하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인지 아닌지 하는 의심이라고는
이 부인의 자세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은 한점의 부끄럼이 없이 순수했고 절대적이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그 믿음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이 부인의 마음은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그 부인의 발에는
힘이 들어 있고,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을 것이고, 가슴은 설레었을 것이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더욱 그녀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의 옷에 손댈 수 있는 거리에까지 왔을 때
이 부인은 온 정성과 설레임과 신뢰심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복음은
"과연 곧바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라고 극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과
직접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그 믿음의 행동이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낫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4-17)
라고 말한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이 아닐까?
이 부인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마르 4, 8)라고 말씀하신
대표적인 모델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읽어 보면
"손을 대다."라는 말이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손을 대다."는 말이 무엇일까?
"손을 대다"는 것은 하나의 표현 방식이다.
즉 마음의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 부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손을 대는 것에도 여러 상태가 있을 것이다.
마음 없이 건성으로 만지는 것이 있을 것이고
이 부인처럼 온 마음을 다해 옷을 만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복음을 읽는다는 것은
이 부인이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온 정성을 다해 온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이 부인처럼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진다.'는 느낌으로 읽어야 한다.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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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느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를 얼마나 생생히 느끼고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라고
어디나 눈 들면 하늘입니다.
성무일도 때 마다 자주 눈 길 가는 창밖 풍경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며칠 전 쓴 글을 나눕니다.
늘 봐도 늘 좋고 새로운
창밖 풍경 하늘과 나무
참 단순하다
하늘은 하느님이고
바람은 성령이고
초록나무는 수도승이다.
하늘 배경
바람에 춤추며 노래하는
초록나무들처럼
하느님 배경
성령 충만하여
찬미 노래 부르는 수도승들이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들의 배경이 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평생 공부는 오직 하나 하느님 사랑 공부뿐임을 깨닫습니다.
먼저 하느님 자랑부터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우선적으로 할 일이 하느님 자랑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림으로
하느님을 자랑하는 일이 우리 수도자의 일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아침 일어나자마자 하느님 자랑의 찬미로 하루를 시작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1독서 지혜서의 하느님 자랑이 참 고무적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정의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의 본래 모습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마다 다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저마다 하느님의 좋으심을 반영합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게 축복 받은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 탐구는
끝내 자기를 발견 못해 허무와 절망으로 귀결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단절과 불통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지혜서는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잊음으로 자초한 화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과 불통은
이웃과의 단절과 불통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이 관계의 단절과 불통을 죄라 정의합니다.
바로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이 진리가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하와의 아담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 불순종 한 결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 불통되고
이어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연쇄적으로 파괴되어
단절 불통의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단절 불통의 사람이나 공동체는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사람이요 공동체입니다.
위의 하느님과 좌우사방의 사람들로 연결 소통되어야
사람도 공동체도 살아나고 자유롭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이나 병들의 원인을 추적하면
결국 단절과 불통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현실은 단절 불통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하느님을 잊은, 하느님을 떠난 업보입니다.
바로 이 단절과 불통의 그 중심 자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하느님과의 불통을, 이웃과의 불통을 소통으로 바꿔주시고자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는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대로 바로 이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이 미사 은총으로 인한 소통의 현실을
어떻게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현시키는가가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인들의 현실 참여는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관계를 깊이 할 때 샘솟는 내적 힘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관계의 회복이요 살아나는 영혼 육신입니다.
우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가 궁극으로 목적하는 바도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내적 변화에 치유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관계의 회복이요 원활한 소통입니다.
참 약하고 부족한 한계를 지닌 인간들입니다.
병과 죽음에 볼모로 잡혀 있는, 큰 인생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생명과 자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죽은 회당장의 딸과 열 두해 동안 하혈의 병을 앓던 여자,
바로 단절 불통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 단절 불통의 병과 죽음의 현실에서
회당장은 믿음으로 생명의 줄이신 주님을 잡았습니다.
생명의 주님을 향해 마음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이어 회당장의 딸이 죽었으니 올 필요가 없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한 마디로 일축하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은 믿음 약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침내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비단 죽었던 회당장의 딸뿐 아니라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죽어있는 모든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사랑으로 터치해 주셨을 때
죽음에서 풀려나 살아난 회당장의 딸이었습니다.
열 두 해 하혈 병을 앓던 여자는
최고의 의사인 주님을 만나 믿음으로 터치한 결과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만져줘야, 주님을 만져야 살아나는 우리들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주님과의 스킨십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어라.”
병과 죄와 죽음의 온갖 불통의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과 치유를 선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빛나는 태양 앞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밤의 어둠처럼,
생명과 빛의 주님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죄와 병과 죽음의 어둠의 세력들입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영혼의 죽음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마음의 눈을 밝게 하고
돈은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하여 제가 늘 강조하는 품위 있는 삶의 우선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믿음,
둘째는 건강,
셋째는 돈입니다.
하느님 믿음이 우선일 때 저절로 따라오는 건강과 돈이지만,
돈에 우선을 둘 때 욕심에 눈멀어 급기야 하느님도, 건강도 잃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살아계신 주님은 온 마음을 다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를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치유해주시고
원활한 소통 관계를 이루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아멘.
- 성베네딕토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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