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멸망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몇 가지 원인만을 가지고 그 국가의 멸망에 대해 전부 말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동방의 강국으로서 중국의 통일 제국인 수, 당과 당당히 맞섰던 고구려의 경우 그러하다. 그러나 필자는 장수왕 시절부터 잉태된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과 같은 정치적 이유와 한수 유역상실, 서요하 상류지역의 패권 상실 등과 같은 군사적 이유를 조명해 봄으로서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부족하나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정치적 이유
665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병사 이후 고구려의 지배층은 분열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연개소문 독재 정권의 붕괴가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고구려의 최 전성기였던 5세기 초반(장수왕 통치기)부터 이러한 분열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장수왕 15년(427년) 평양 천도와 그후 있었던 대규모 구 귀족층에 대한 숙청이 바로 그것이다.
『위서』<백제전>에 나오는 백제가 북위에게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자는 국서(472년)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많이 지어 나라안에 죽은 시체가 넘쳐나며, 대신들과 귀족들의 죽음은 끝이 없고,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어 지금은 멸망의 시기라고 하는 기사가 있다. 비록 장수왕대에 북연을 멸망시키고, 북위를 압박하고, 백제를 한수 유역 남쪽으로 밀어내는 등 그야말로 최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소수림왕 시절부터 신장되어온 왕권과 기득권 세력인 구 귀족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기사이다.
위의 기사 이외에도 많은 사서에서 5~6세기 고구려의 정치적 내분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위서]와 [북사]에 보면 북위 현조(465~471)에 고잠, 북위 고조(471~499) 때에 고양 고고와 같은 고구려 귀족의 망명 기사를 볼 수 있다. 또한 [위서]에 보면 연흥원년(471) 9월 고구려 인의 대규모 망명 기사가 있는데 이들 개개인이 집과 농토를 하사 받았다는 내용을 보면 이들이 고구려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기사들에서 평양 천도이후 장수왕의 대규모의 구 귀족의 숙청이 있었고, 그것을 피해 지배층의 일부가 국외로 탈출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소수림왕 시절부터 고구려의 왕권은 꾸준히 신장되어 오다가 광개토 대왕의 정복 전쟁을 통해 비로소 구 귀족층을 누를수 있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이렇게 강화된 왕권으로 장수왕은 구 귀족의 본거지인 국내성을 떠나 평양성으로 천도를 했으며, 평양성 천도이후 새롭게 등장하는 신 귀족층과 구 귀족층의 권력 투쟁이 발생하자 장수왕은 기득권 층인 구 귀족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 것을 쉽게 추측할수 있다.
구 귀족층이라 볼 수 있는 모두루의 묘지명과 신 귀족층이라 볼 수 있는 남생의 묘지명에서 신 귀족층과 구 귀족층의 이질적인 면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모두루의 묘지를 보면 ' 선조가 성왕(추모왕)을 따라 왔으며 조 염모는 모용선비와 싸울 때 큰공을 세웠다. ' 라고 되어 있다. 이에 반해 남생의 묘지를 보면 ' 본래 연못에서 났다 ' 라고 되어있다.
이런 것을 보면 구 귀족층은 자신들의 시조를 고구려의 건국왕인 추모왕과 연결시키며 모용선비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선조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친 반면 신흥 귀족층은 자신들만의 시조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장수왕대 이후 등장을 반영하듯 모용선비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선조의 기록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수왕대의 구 귀족층과 신 귀족층의 권력투쟁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100여년을 더 끈다. [일본서기] <계측천황> 25년(531년) 12월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그 왕 안을 죽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때 안은 일반적으로 안장왕으로 보고 있다. 안장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안원왕 시절에도 고구려에 분란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사가 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6년~7년(544~545) 두 번에 걸쳐 고구려에 큰 난리가 났음을 [백제본기]를 인용하여 전하고 있다.
6년 기록에 보면 " 이해 고구려에 대란이 일어나 죽임을 당한자가 많았다. [백제본기]가 말하기를 12월에 고구려국 세군과 녹군이 궁궐문 앞에서 북을 울리며 크게 싸웠는데 세군이 졌다 이에 녹군은 3일 동안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세군의 자손들을 잡아 죽였다. 싸움이 일어난지 5일만에 향강상왕(안원왕)이 죽었다고 한다 " 7년 기록에는 " [백제본기]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정월에 중부인의 아들을 세워서 왕으로 했다. 나이 8세였다. 고구려왕(안원왕)은 세 부인이 있었으나 정부인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다. 그 사돈 집안이 녹군이다 소부인도 아들을 낳았다.
그 사돈 집안이 세군이다. 고구려 왕이 병들어 세군과 녹군이 각각 그 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므로 세군의 죽은자가 2천명이나 되었다. 또한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양원왕 시기에 눈여겨볼 기사가 있다. '왕 4년(549) 9월 환도가 가화를 진상 했다.' '왕 13년(558) 환도성에서 간주리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했다. '
위의 기사들은 안장왕-안원왕-양원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기를 담은 기사들이다. 그럼 하나하나 분석해 보자. 장수왕대의 평양 천도와 구 귀족층의 숙청으로 고구려의 왕권은 강화되었고 정치 역시 왕을 중심으로 안정되었다. 그러나 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안정기에 약화되었던 귀족 세력은 안장왕 시절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이들 귀족 세력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그 권력 투쟁 속에서 안장왕은 피살당한다.
바로 [일본서기] <계측천황> 25년조의 기록이 이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알려 주는 기록이 또 있다. [주서] 에서는 고구려 최고 관등이며 귀족회의 의장인 대대로의 자리를 놓고 귀족들이 서로 치열하게 싸워 힘으로 그 자리를 쟁취했으며 이때에 왕은 두려워 궁궐문을 잠그고 싸움을 제지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귀족들의 권력 투쟁은 안원왕때에 이르러 신-구 귀족 전체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안원왕 시절 녹군과 세군은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데 이때 세군의 죽은자가 무려 2천명이나 났다는 기록을 볼 때 그 수를 보아 귀족 전체가 이 왕위 계승을 둔 권력 투쟁에 참여 했음을 추측할수 있다. 또한 그런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왕위에 오른 양원왕 시절 '환도가 가화를 진상했다' 라는 기록을 볼 때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구 귀족층과 세군과의 어떤 연관이 있으며 싸움에 진 국내성 구 귀족층이 양원왕 등극 이후 복종의 의미로 가화를 바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복종도 오래가지 못하고 양원왕 13년 환도성의 간주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 구 귀족과 신 귀족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100년 이상을 간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고구려 멸망시기로 가서 보자.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지배층은 분열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배층의 분열의 씨앗은 고구려 최 전성기인 장수왕 시절부터 잉태되어 왔던 것이다. 안장왕-안원왕-양원왕 시절의 귀족층의 권력 투쟁은 신-구 귀족 전체가 휘말린 극도의 혼란기였다.
비록 평원왕-영양왕 시대 귀족 집단 지배 체제로 그 혼란이 봉합했지만 신-구 귀족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연개소문의 쿠테타에 의한 정권 탈취와 대규모 숙청에서 그런 갈등이 보여지며, 또한 남생과 그의 아우 남건 남산의 권력 투쟁때 남생이 국내성을 기반으로 평양성을 기반으로 둔 두 아우와 싸운 사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는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신-구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함으로서 멸망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니발은 " 신체가 커지면 내장 역시 그 커진 신체만큼의 기능을 해야 한다" 고 했다. 고구려는 5세기 제국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외형상의 제국일뿐 효율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하지 못했기에 200년을 못 버티고 멸망했던 것이다.
2. 군사적 이유
고구려가 지배한 지역중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 3곳 있다. 첫 번째가 바로 서요하 상류 지역이고, 두 번째가 한수 유역, 세 번째가 바로 요동반도 남부 해안 지대이다. 이 세 지역은 고구려라는 성의 성곽 그 자체였다. 고구려는 이 세 지역의 패권 상실로 멸망의 길로 간 것이다.
1. 서요하 상류 지역
강대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구려로서 이 지역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다. 수,당 전쟁기에 중국 군대의 진격로 산해관-조양-요하로 이어지는 길이 주로 사용되었다. 바로 요서 남부 지역의 일반적인 교통로를 이용해 고구려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중국군을 측면에서 기습공격 하거나 병참선을 교란하기 위해서는 요서 남부 지역의 바로 위에 있는 서요하 상류 지역의 패권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광개토 대왕의 정복 전쟁을 통해서 확실히 보여진다. 광개토 대왕은 당시 최대의 적이였던 후연을 치기 전에 사전 작업으로 영락 5년(395) 거란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 전쟁을 단행한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보면 " 태왕은 비려를 친히 정복하여 부산(富山)과 부 산(負山)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부족과 6-7 백개의 영(營-유목민이 모여사는 마을 또는 군대 단위)을 깨뜨리고, 소와 말, 양 등을 사로잡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라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서요하 상류 지역에 사는 거란족에 대한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기록한 기사이다. 이후 영락12년 후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친 곳이 숙군성으로 후연의 수도였던 용성 부근의 위치한 후연 수도의 관문인 성이였다. 이 정벌의 성공 역시 영락 5년 수행한 거란 정복을 통한 서요하 상류지역의 패권 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적의 정면을 치기보다는 강력한 기마대를 동원 서요하 상류지대를 우회해서 직접 숙군성을 기습 공격했기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나라와 전쟁 시절 수 군대 상당수가 요하를 건너지 못하고 요서에 머물고 있었다.
대릉하 하류 노하진(금주지방)과 회원진 지역에서 수의 대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4월 하순부터 6월 상순에 이르는 요동성 공격에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요서 지역에서 죽은 6군 사령관 단문진의 유언을 받아들인 양제의 명을 따라 평양으로 쳐들어가는 별동부대가 되는데 이들은 부병으로 수나라 최 정예 부대로 수가 30만 5천명이나 되었다. 왜 이들은 본격적인 요동성 공격때에도 요하를 건너지 않고 요서지역에 머물르고 있었을까? 바로 고구려의 군대가 서요하 상류지역에서 끊임없이 병참선을 교란했으며, 요서의 수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바로 수나라 최 정예 부대는 서 요하 상류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 군대를 견제하고 병참선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들이 별동부대로 고구려 중심부로 옮겨가자 수의 병참선은 무너지고 살수에서 이들 별동부대는 전멸의 화를 당하는데 바로 그것이 살수대첩이다. 이런 중요한 지역인 서요하 상류 지역은 당과의 전쟁에서 당에게 패권을 빼앗기고 만다. 서요하 지역에는 거란 8부족이 있었는데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앞두고 서요하 지역 정벌에 나선다. 이때 거란의 4개 부족이 당에 항복한다.
이때 고구려는 서요하 상류 지역의 패권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로서는 주 전쟁터인 요동에 적의 대군이 있는 터에 서요하 상류지역의 패권을 지킬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당은 후방의 적을 제거했고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요동 반도 남부 해안 지대
이 지역의 묘도 군도의 오호도, 대사도, 구음도, 유도 등 연이어 놓여진 섬들은 산동 반도로 이어져 선사시대부터 중국 쪽과 왕래하는 뱃길이였다.또한 발해만과 요동만이 겨울에 얼어 붙는 것과는 달리 대련(고구려의 비사성이 있던 지역)만은 겨울에도 거의 얼어붙지 않고 수심이 깊어 천혜의 항구로 이용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주요 수군 기지를 건설했다. 요동반도 남단의 대장산도와 해양도 등에서 선박 유적지가 대장산도에는 고구려 성이 각각 발견 되었다. 요동 반도 해안 지대에는 적이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고성, 석성, 성산산성 등이 있었고 수군 기지로 비사성과 박작성등이 있었다.
이들 수군 기지는 고구려 안보의 생명줄과 같은 지역이였다. 요동 지역으로 쳐들어오는 중국 대군의 군수품은 대부분 수군에 의해 수송되었다. 이 중국 수군을 격멸하고 해상으로 보급되는 보급품을 차단하는 것이 바로 요동반도 해안지역의 고구려 수군의 역할이였다. 수 전쟁 시절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이 요동 반도 해안 지역의 고구려 수군 기지를 무시하고 직접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전멸 당하자, 더 이상 요동과 평양에 있는 수 육군에 보급품을 보급 할 수 없었으며 결국에는 수나라 군대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다가 패하고 만다.
훗날 당나라는 수나라가 요동 반도 남부의 고구려 수군 기지를 그대로 나두고 평양을 공격하다 수군이 전멸당한 것을 교훈 삼아 끊임없이 요동반도 남부 해안지대의 고구려 수군 기지를 공격한다. 비사성을 비롯한 박작성의 공격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650년경 고구려는 이들 기지의 상실 또는 파괴로 서해 재해권을 당에게 빼앗겼고 결국 당의 대군의 수군에 의한 보급품 보급을 허용함으로서 멸망하게 된 것이다.
3. 한수 유역의 상실
고구려는 사방으로 열린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다.다시 말해 국력이 강할 때는 강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국력이 약할 때는 주위 국가의 침략을 받기 쉬운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칠 수 있었고, 수많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의 위기도 맞기도 했다. 고구려의 적은 크게 북방의 유목 민족, 북서쪽의 중국 세력, 남쪽의 백제 신라 등을 들 수 있다. 그러기에 고구려는 이들 세력이 연합해서 고구려에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우렸다.
지두우를 유연과 양분해서 중국 세력을 견제했고, 거란 정벌해서 서요하 상류 지역의 패권을 장악해서 중국 세력의 이 지역 진출을 막았다. 또한 강력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서해 재해권을 장악 백제가 북위와 통교해서 연합 전선을 형성 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특히 고구려가 신경 쓴 것은 백제와 신라가 직접 중국 세력과 통교하는 것이였다. 강력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서해 재해권을 5세기부터 7세기 중반까지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은 한때 해상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해상세력을 장악했던 백제조차 한동안 중국 세력과 통교하지 못하고 무녕왕대에 이르러 중국 양자강 유역의 한족 국가였던 양나라 겨우 통교 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수 유역은 매우 중요한 지역이였다. 당시 중국으로 가는 항로는 크게 두가지였다.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항해 하다가 요동 반도 근처에 있는 묘도 군도를 따라 산동으로 가는 연안 항해와 한수 유역의 당항성에서 중국 산동 반도로 직접가는 항로이다.
첫 번째 항로는 황해도와 요동 반도의 고구려의 수군기지가 많았고, 고구려 수군의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백제, 신라로서는 이용하기 어려웠다. 나머지는 한수 유역에서 중국 산동 반도로 직접 가는 항로인데 이것은 한수 유역을 장악해야만 가능한 일이였다. 한수 유역은 이렇게 중요한 지역이기에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 시절 서해의 요충 관미성을 처음으로 공격한 것이였고 장수왕 시절 한수 유역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장왕-안원왕-양원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기에 백제와 신라는 나제 동맹을 맺고, 한수유역을 공략했고, 이때 동궐의 침입으로 북방의 국경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한수 유역을 신라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남쪽 국경을 위협하는 나제 동맹을 깨기 위해 신라와 밀약을 한 것 같다. [삼국유사] <진흥왕> 기록에 보면 "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서 고구려를 치려고 했다. 이 때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라겠느냐 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그 말에 응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했다. " 이 기록은 돌궐의 침입으로 한수 유역까지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파악한 고구려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한수 유역을 차지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신라 역시 더 이상 고구려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밀약이 성립된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또한 백제가 대가야 군대와 연합해서 신라의 관산성을 공략할 때 이 백제-가야군을 격멸 시킨 군대가 한수 유역을 지키고 있는 김무력의 군대였는데 중요한 한수 유역을 지키던 군대가 한수 유역을 비우고 지금의 충청도 옥천 지역까지 내려와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있었음을 알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비록 한수 유역을 내 주었지만 나제 동맹을 신라와의 밀약으로 깨므로서 후방의 안정을 도모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통일 제국이 등장하자 상황은 변했다. 신라가 적극적으로 중국 세력과의 연계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수의 침입때에도 신라는 원광 스님으로 하여금 걸사표를 짓게 하고 사신을 수나라에 보냈을 뿐 아니라 고구려를 공격하여 500리 땅을 빼앗기도 했다. 또한 선덕여왕 재위 당시 신라의 실력자인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 원군을 청한 일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이렇듯 고구려가 그렇게 경계하던 한반도 남부 국가와 중국 세력과의 연계가 한수 유역의 상실로 인해 실현되었던 것이다.
당나라 역시 자체적으로 고구려 원정에 한계를 느끼고 고구려 후방에 동맹국을 만듬으로서 군량 및 보급품의 원활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잇점을 가지기도 했다. 이런 것은 소정방이 평양성 공략하다가 큰 눈을 만나 보급품 바닥으로 전멸을 화를 당하기 직전 김유신의 구원군의 보급품을 받아 무사히 후퇴한 사실을 봐서 중국 세력이 고구려 배후의 국가와 동맹을 맺는 것이 얼마나 고구려의 안보에 위협되는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6세기 중반 한수 유역의 상실에 이어 7세기 중엽 서해 재해권 마저 상실함으로서 중국 세력과 신라와의 연계를 허용하고 적의 대군의 보급품까지 차단하지 못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기사를 마치며...
우리 민족사에서 고구려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크다. 고조선 멸망이후 우리 민족은 동북아시아 역사의 주류에서 잠시간 밀려났으나 고구려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 우리 민족을 다시금 동북아시아 역사의 주역으로 끌여올렸다. 다물(多勿)이라는 고구려의 말이 있다. 이것은 구토회복(舊土回復)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인에게서 구토란 어떤 땅일까? 부여일까? 그러기에는 그 영토와 개념이 너무 작다.
바로 고구려인에게서 구토란 고조선을 말하는 것이다. 한무제에 맞써 당당히 싸웠던 강대국 고조선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존재하는 기간 다물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 나름대로의 문명을 만들어 냈다. 그런 고구려의 멸망은 민족사에서 크나큰 후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민족은 고구려 멸망이후 반도인으로 1500년간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동북아시아의 역사의 주역에서 밀려 조역으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구려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그리움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살펴보는 중국의 통일 제국과 당당히 맞섰던 그런 강대한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살펴보고 거기에서 현대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 문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 김용만 저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1999, 김용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