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야기[488] 진년보이차 강성호(江城號)
2019년 3월 4일 미세먼지(황사)가 마치 대한민국의 현 상황같이 앞을 가린 날, 49재 염불과 법문 등을 두 시간 이상 하고나니 목도 눈도 따갑고 아팠다. 이런 날은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하여 그동안 아끼던 강성호(江城號)를 우리기로 했다.
강성호는 1940년대 운남성 강성현(江城縣)의 강성차장(江城茶莊)에서 야생의 대엽종 교목(大葉種喬木)의 찻잎을 따 생차(生茶)로 만들어 건창(乾倉) 보관된 차이다.
1992년 가을 처음 강성호를 만나 첫맛에 반해 들어오는 대로 구매 보관했으나, 워낙 소량이 들어왔기에 대중다회에서 자주 우리지는 못했다. 둥근 떡차(餠茶) 7편에는 내표(內票) 한 장이 들어 있고, 차의 표면에 붙이는 내비(內飛)는 없다.
[강성호 한 통(7편)에 한 장 들어 있는 내표(內票)]
25년 전에 진공 포장했던 강성호를 열어 사진을 촬영하고 다른 차와의 비교를 위해 8g을 다호에 넣었다. 떼어낸 면을 확대 촬영해보니 80년 가까운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진년보이차 강성호의 앞면. 사진이 실물을 따라가지 못함]
[진년보이차 강성호의 뒷면]
[강성호를 쪼갠 면을 확대 촬영한 것. 오랜 세월이 보임]
강성호를 우릴 다기로는 청(靑) 가경(嘉慶, 1795~1820) 시대에 만들어진 이피자사호(梨皮紫砂壺)로, 28년간 사용해온 이 다호의 표면은 마치 배의 껍질과 비슷한데 보이차를 우리기에는 최적의 자사호이다.
[강성호를 우린 다호. 청(靑) 가경(嘉慶, 1795~1820) 시대에 만들어진 이피자사호(梨皮紫砂壺)]
**아홉 잔까지는 100도의 물을 부어 바로 따르는 방식을 택했다. 다호에 물을 붓고 다호의 찻물을 잔에 따르기까지는 약 20여초가 걸렸다.
(01)찻물은 진갈색. 맑게 삭은 짚의 향과 한약재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여느 진년보이차(陳年菩茶洱茶)보다는 맑은 맛으로 깔끔한 것이 거슬림이 전혀 없으며, 복원창과 흡사하나 약간 부드럽고 두터운 맛.
(02)찻물은 진갈색. 코가 뚫리는 시원한 진년보이차의 맑게 발효된 향과 맑은 한약재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약간 새콤하면서도 세월이 녹아난 미세하고 기분 좋은 떫은맛이 단맛을 끌고 옴. 입안이 완전히 평정되어 초가을의 맑은 분위기. *기분 좋은 차 트림.
(03)찻물은 진갈색. 앞의 잔보다 조금 맑아진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거슬리지 않는 맑은 보약을 마신 느낌. 맑은 회감(回甘-목젖 뒤에서 올라오는 향기로운 단 맛)으로 입안이 깔끔해짐. *기분 좋은 차 트림. 단전이 따뜻해지고 장운동이 활발해짐.
(04)찻물은 맑은 진갈색. 맑게 발효된 진년보이차의 향(짚 삭은 향)과 부드러운 한약재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오래 발효된 진년보이차의 기분 좋게 떫고 시원한 맛. 묽은 보약 같은 맛. *기분 좋은 차 트림. 몸이 뜨거워지더니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소통.
(05)찻물은 맑은 홍갈색. 맑은 한약재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맑으나 입을 꽉 채우는 오래 발효된 야생 보이차의 맛. 미세한 타닌 맛이 입을 가득 채우며 멋진 회감. 숨을 쉬면 코로 향이 뿜어져 나옴.
(06)찻물은 홍갈색. 부드러운 한약재의 향기와 풋풋함을 감추고 있는 발효된 진년보이차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넉넉하고 너그러운 진년보이차의 맑고 부드러운 맛. 맑은 타닌의 맛과 맑은 단맛.
(07)찻물은 맑은 홍갈색. 은은하고 부드러운 한약재의 향과 삶은 팥의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맑으나 자신의 골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맛. 깔끔하고 은근하며 시원함. *맑은 차 트림.
(08)찻물은 레드골드색. 잘 삶긴 팥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가을바람의 맛. 맑은 가을하늘 같은 발효된 진년보이차의 맛. 떫다고 표현하기 어려운 타닌과 달다고 하기 어려운 단맛.
(09)찻물은 맑은 레드골드색. 부드러운 삶은 팥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가을바람의 맛. 맑디맑은 타닌의 맛과 뒤따르는 맑은 단맛.
**이어서 100도 물도 1분간씩 우림.
(10)찻물은 레드골드색. 푹 삼긴 팥 향이 피어오름. 머금으니 (09)보다는 조금 두터워진 맛.
(11)~(13)찻물과 피어오르는 향과 맛이 (10)과 비슷함.
잔을 놓으니 몸도 마음도 비어버린 심신탈락(心身脫落)의 경지가 되었다.
[강성호를 우린 탕색 비교.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1시 방향으로 안쪽 원을 시계방향으로 돌고 다시 12시 방향의 바깥 원으로 진행]
퇴수기의 물에 잠긴 찻잎을 살펴보니 오랜 세월 숨죽이고 있었던 자세를 완전히 풀지 않은 채로 짙은 갈색과 탈색이 좀 진행된 듯한 어두운 녹갈색의 찻잎이 조용히 나를 보고 있었다.
[퇴수기의 물에 잠긴 강성호 우린 뒤의 찻잎]
강성호는 복원창과 흡사하긴 하지만 복원창이 더 맑고 강한 듯이 느껴진다. 그것은 복원창이 더 칼칼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강성호는 조금 부드럽게 느껴지나 두터운 맛이다. 하지만 그 기세에 있어서는 결코 복원창에 지지 않는 차가 강성호이다.
강성호를 마실 때마다 나는 늘 스승님 한산당(寒山堂) 화엄대선사(華嚴大禪師)를 생각했다. 처음 뵙는 사람은 스승님의 선기(禪機)를 잘 느끼지 못했다. 스승님은 칼칼한 선기(禪機)를 쉽사리 곧바로 드러내시지 않았다. 늘 농담처럼 선문답을 하셨기 때문이다. 고함을 지르거나 죽비로 후려치는 방법을 거의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잘못 건방을 떨다가는 목이 달아나는지도 모르고 당한다. 그러나 정작 목이 달아난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시체가 된 줄도 모르고 잘난 체하며 돌아가곤 했다.
이전에 강성호를 자주 마실 때, 부드럽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이들이, 마시던 중간에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참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