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시선____
보릿대춤 출까요?
오강석
■보릿대춤 시연회
머리카락 한 올이 툭 떨어진다. 세월의 고랑들이 꿈틀, 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잠시 침묵. 살풀이장단 잔가락이 청보리밭에 고루 깔리기를 기다려 어깨가 가볍게 들썩인다. 기의 이동이 유발하는 미세한 몸짓. 50년 먹은 꽁보리밥 정기가 세상에 나오려 용틀임하고 있다. 아직 노인의 몸짓이 마그마 분출의 전조임을 아무도 모른다.
야외무대 주변 푸르디푸른 보리 물결 위로 농요가 흐르고, 무대에서는 들독놀이 경연이 펼쳐지고 있다. 장정들이 들독을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젊은 아낙들은 행주치마에 사잇돌을 담고 오래 버티기를 겨루는 중이다.
들독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 쓰는 동네 장정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노인. 마주친 손바닥에서 부싯돌처럼 일어난 스파크가 노인의 신명에 불을 붙인다. 박수 소리를 신호로 관객들이 앉은걸음으로 물러서며 공간을 만들어준다. 자리를 박차고 오금질로 무대로 나서는 노인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한다. 천신과 로그인하는 제천의식이다. 신을 즐겁게 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오늘의 행사를 고하는 것이다. 노인의 치켜든 손에서 미끄러져내린 광목 옷소매가 팔목 중간에서 멈춘다. 고개를 치켜드는 노인. 하늘을 향한 노인의 시선이 펼친 손끝을 거둬들이며 서서히 대지를 향한다. 하늘을 향한 경외심이 땅에 대한 애착과 만나는 순간,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청보리 새싹이 피어난다. 우쭐거리는 어깨와 천천히 들어 올리는 손이 연출하는 넘침도 부족함도 없는 정과 동의 안배. 공동의 염원을 축원하던 고구려 무용총의 발랄한 춤사위. 우리민족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전자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몸짓이다. 숨이 멎는 ‘맺음’의 고요. 아슬아슬한 기울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어르기와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펼침. 노인이 나비 날갯짓으로 손바닥을 뒤집는 순간 공기의 파장이 웅건한 장풍이 되어 관객들의 가슴으로 밀려간다. 발을 땅에 박은 굳건한 직선과 살랑살랑 하늘거리며 하늘로 비상하는 곡선의 절묘한 만남. 맺고 푸는 보릿대춤의 정수가 펼쳐지고, 차지고 맛깔스런 동작에 관객들이 침을 삼킨다. 시각적 인지 작용이 기억의 필터에 여과되어 관객의 내면으로 서서히 스며들며 오랜 기억 하나를 불러낸다. 아직 푸른 보리밭에서 목 늘여 익기를 기다리던 갈급증. 한 걸음 내딛어 허리를 접고 펴며 손끝을 힘차게 내뻗는 역동적 동작. 사설이 덩 덩 덩더쿵 자진모리 자락을 끌고 보릿고개를 넘어간다.
가네, 가네, 넘어가네. 보릿고개 넘어가네. 뭣이 중허다, 중허다 해도 아, 식량이 중허제. 아이구 배고파, 꼬로록 꼬로록, 뱃속에서 구라파전쟁이 났구나.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아니 허였으니 이 노릇을 어찌 헐거나.
워메! 이게 뭔 일이다요. 지나고 보니 그 웬수 같던 보릿고개가 다 그리워지요 잉. 저기 얼굴 허연 미국 사람들도 왔으니 내가 영어로 한 마디 해야겠구나. 겟 오버 더 바를리 험프 보릿고개를 넘어간다~ 이말이여. 인자 알아듣겄소?
1960년대. 모심고 보리 베는 노동을 오롯이 손으로 해야 했던 오리지널 아날로그 시대. 자지러지는 보리피리 소리에 맹물로 허기를 채우던 보릿고개의 전설이 그리워지는 관객들.
‘덩 기덕 쿵 다르르’ 고창보릿대춤의 고유한 가락이 굿거리장단으로 바뀌자 조금씩 빨라지는 날갯짓. 몸짓이 바뀌는 고비마다 “얼씨구” “잘 한다” “얼쑤” 추임새가 나온다. 허공에 흐느적이던 손과 손이 마주 향하고 발이 솟구친다.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노인의 현란한 춤사위. 관중들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어르는 작은 선과 풀리는 큰 선. 맺고 어르다 푸는 동작이 두세 번 되풀이 되는 동안 소리꾼의 사설이 늘어진다.
시퍼런 보리싹이/ 대지를 뚫고 나오는디/ 시방 방구석에서 뭣들 허고 자빠졌어?(나와, 싸게 나와!)/ 논두렁 밭두렁/ 총각김치 새참/ 막사발에 막걸리요(카- 좋다!)/ 밭두렁 논두렁/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는디/ 아니, 이것이 무슨 춤이더냐/ 몽둥이춤, 절굿대춤, 덧배기춤, 거드름춤, 막대기춤, 황새춤에 살풀이춤, 활개춤, 번개춤에 두레춤. 엉덩이춤에 깨끔춤, 지게목발춤~(어이구 숨차)/ 수건 들면 수건춤, 부채 들면 부채춤/ 금수저 들고 태평무, 흙수저 들고 보릿대춤이로구나~/ 망망대해 청보리밭/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 절씨구 어절씨구/ 맹물 한 사발로 보릿고개 넘어가네~/ 가진 놈은 양반춤/ 없는 놈은 보릿대춤(나와, 다 나와. 아, 싸게 싸게 나와!)/ 찢어지게 가난헌 놈들은/ 보릿대춤이 제격이여/ 보릿대춤이나 춥시다요
사설이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이 무릎을 친다. “좋고” “얼쑤” “암언” 쏟아지는 추임새에 객석이 바람난 보리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흥 오른 남정네 몇 사람이 일어나 무대로 달려나간다. 들독놀이 경연을 하던 장정과 아낙들도 돌을 팽개치고 합류한다.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가 대지를 울린다. 노인과 들독놀이 남정네 그리고 여인들의 춤판이 한바탕 걸쭉하게 펼쳐진다. 대지에 뿌리박은 하체의 직선과 팔과 손목이 만들어내는 가늘고 굽은 사상선. 무수한 선과 선이 교차하며 넘실댄다. 치받음과 감싸줌의 내밀한 조우. 마주한 남녀의 몸짓에 관능의 속살이 언뜻언뜻 비치고 고명처럼 얹히는 병신춤 동작이 엇박을 타며 등장한다. “으라차차” 장정 하나가 짐짓 용을 쓰며 몸통만한 바윗덩이를 들어올린다. “짝퉁이네.” 턱도 없는 힘자랑에 돌덩이가 가짜였음이 금방 들통난다. 작은 일탈에 살 떠난 시위처럼 긴장이 풀리며 관중들의 폭소가 터진다. 소름 돋는 쾌감과 안도. 모든 맺힌 것들이 다 풀리고 풍년의 기대감이 청보리 물결 따라 끝없이 풀려나간다. 춤추던 남녀가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가며 서서히 줄어드는 춤판. 반만년 대물림한 서민들의 흥과 애환이 모두의 가슴에 새겨지는 것으로 보릿대춤의 시간적, 공간적, 시각적 상징성이 완성된다. 마침내 텅 빈 무대에 홀로 남은 노인. 대지를 뚫고 나오며 시작된 그의 몸짓이 대지의 품으로 서서히 잦아들다 마침내 멈춘다.
■보릿대춤에서 말춤까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고고의 성과 몸짓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노래와 춤의 근원이다. “춤추는 기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모든 기술의 원천”이라는 헨리 엘리스의 말처럼 소통 가능한 몸짓의 규범적 표현을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몸짓이라는 문화적 코드를 통해 의사와 정서를 소통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몸짓언어는 음성언어로 발전하고, 이어서 문자언어로 진화한다. 음성언어나 문자언어가 규범에 귀속되는 반면 몸짓언어는 인류의 천부적, 범용적 소통 수단이다. 인류는 몸짓의 부단한 수정 보완을 통해 동작에 의미를 담는 연습을 해왔다. 우리는 그 행위의 일부를 춤이라 부른다. 인간은 춤을 즐기면서 그것이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족의 리더는 생산성 증대를 위해 의식을 갖추어 신에게 감사하고 생산의 원천인 노동자들을 즐겁게 하는 춤을 장려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사에 보릿대춤이 등장한 것은 이 무렵 즉, 농경사회 초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시경』은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한숨을 지어 탄식한다. 한숨을 지어 탄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노래를 부른다. 노래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손과 발로 춤추게 한다.”라 기술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기원전부터 춤을 예술적 표현양식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의 체계가 공고해지면서 춤은 지배계급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새로운 소임을 부여받았다. 그 원활한 수행을 위해 춤에 장식적 기능이 더해지고, 전문 공연자와 관객의 역할이 구분되었다. 지배 계급은 화려하고 역동적인 춤을 간택하고, 탈락한 춤들은 민속춤으로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며 확고한 정서적 유대를 구축해간다.
1908년 미국의 브롱크스 동물원은 콩고전쟁 때 미국으로 팔려온 오티 벵가라는 20세 피그미족 남자를 오랑우탄, 원숭이와 함께 유인원 우리에 전시했다. 인종차별 비난 덕분에 동물원 우리를 벗어난 오티 벵가는 1920년에 권총 자살했다. 그는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피그미족 전통춤을 추었고, 언론은 그의 춤을 ‘인간 선언’이라 보도했다. 오티 벵가는 민족의 춤을 최종적 자기표현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다. 유대 디아스포라들이 전통춤 호라를 추면서 망국의 한을 달랜 것도 전통춤과 민족 정서의 일체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꼽힌다. 반면 예술의 메카라 불리는 프랑스에는 이렇다 할 전통춤이 없다. 파랑돌이라는 프로방스지방의 선사시대 전통춤 등이 있지만 지역을 벗어나면 존재감이 미미하다. 프랑스는 원주민에 해당하는 켈트족과 브르타뉴인 바스크인 카탈로니아인 로마인 노르만인 게르만족 등이 융복합된 나라이다.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민족적 정체성이 서서히 붕괴되면서 전통춤이 화석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춤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가수의 노래에는 안무가 필수이고 무대에서는 무용가들의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에 공원 광장을 가득 메운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춤추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왜 춤을 추는가? 춤이 효율적 소통 코드이며 스스로 즐겁고 타인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투 트랙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취직을 위해, 친구나 애인을 구하기 위해,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가능하면 비싸게 팔아야 한다. 그리고 춤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효과적인 자기 판촉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12년. 인류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희한한 춤에 열광했다. 말을 타는 동작처럼 보인다 해서 ‘말춤’이라 불렀다. “오빠는 강남스타일” 인류는 지구촌 어느 구석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강남’스타일을 외치며 말춤을 추었다. 유투브 조회수 26억을 돌파했으니 인류의 반쯤은 말춤을 보거나 추고, “오빠는 강남스타일”을 듣고 외쳐댄 셈이다. 민족문화 역사상 김치에 비견할만한 대 발명이었다. 그런데, 5년 쯤 지난 지금 타국은 물론, 종주국인 한국인들도 더 이상 말춤을 추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수명은 81.8세이다. 과자의 수명은 6개월, 대학입시 제도의 수명은 1~2년, 음식점의 수명은 3년, 아이돌 가수와 인기 걸그룹의 수명은 5~7년이라고 한다. 말춤의 수명은 5년이었던 듯하다. 2003년경에 부비부비춤이 ‘홍대 앞’을 강타했었다. 착 달라붙은 바지를 입은 남자와 배꼽을 드러낸 탱크톱 차림 여자들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 끈적끈적한 리듬에 맞추어 몸을 부비며 흐느적거리는 춤이다. “기성세대에겐 충격일 수 있겠지만 신세대들은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익숙하다”고 인터뷰하던 청년은 2008년엔 이미 부비부비춤을 추지 않았다. 2003년 신세대들이 열병을 앓았던 부비부비춤의 수명도 5년을 넘기지 못한 셈이다.
이해구는 『무용강독』에서 ‘서양의 발레가 백조 같은 새를 주제로 삼은 사실이나, 한국의 정재춤이 제비 또는 나비의 나는 모양으로 형용된 사실은 동서양에서 다 같이 춤의 근본개념이 ‘나는 듯 가벼운 동작’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기준을 적용해 결코 가볍지 않은 동작을 중심 기호로 내세우는 보릿대춤을 ‘허튼춤’이라 재단했으리라. 동의할 수 없다. 현대 창작춤은 이미 ‘나는 듯 가벼운 동작’이라는 제약에서 탈피한 지 오래이다. ‘나는 듯 가벼운 동작’은 발레와 정재춤의 가능성이면서 동시에 제약이기도 한 것이다.
발레의 가장 큰 공헌은 춤에서 종교적 상징성을 배제한 것이다. 발레는 온전히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창안된 춤이다. 발레리나에게 고가의 출연료를 매개로 고난도 동작을 요구하는 것은 자칫 발레를 배금주의 ‘노예무용’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서양화가 오지호는 『한국적 무지』에서 “발레를 보면서 그 동작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반복연습이 있었을까 하여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백조의 호수. 애처로운 몸매의 나는 듯 가벼운 ‘강수진 백조’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발레 슈즈 속 기형적인 발가락이 연상되어 불편하다. 몰상식하다는 질타를 감수하겠다. 발레리나의 공연의 기쁨 대비 무리한 다이어트와 발가락이 짓뭉개지는 고통을 계량화해 과학적 언어인 숫자로 환치한다면? 끔찍하다. 이탈리아 왕실은 어쩌다 이런 비인도적인 춤을 발명한 것일까? 그에 비하면 화려한 의상도, 고액의 보상이나 갈채도 없지만 공연과 관람이 모두의 즐거움인 보릿대춤은 막사발에 담긴 막걸리처럼 청량하다.
■단군 이래 최초의 보릿대춤꾼
보릿대춤 이수자도 전수자도 아니고 이렇다 할 스승을 모신 적도 없는 김지연 노인. 다섯 살 때부터 무동을 타며 농악판에서 소고춤을 추었고 지금도 농악대에서 소고춤을 추는 그가 홀연 보릿대춤 시연자가 된 것은 지난 해 여름이었다. 춤사위가 범상치 않다는 소문을 듣고 집으로 찾아온 고창보릿대춤보존회 회원들과 이야기 끝에 집 근처 무장읍성으로 자리를 옮겨 직접 춤사위를 보여주었다. 손목이며 손가락들이 예사롭지 않은 곡선을 그려냈다. 담론과 시연이 거듭된 끝에 그가 보여주는 춤사위가 고창보릿대춤의 원형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맞네.” “맞아.” 감정위원(?)으로 초치되어 온 김회숙 태평무 이수자와 동네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맞다.”는 판정을 내린 순간 노인은 엉거주춤 보릿대춤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근디 보릿대춤이 뭔 대수라고 이 난리여.” 한 촌로의 일갈. 그렇게 느낄 만도 하리라. 지천에 널린 보릿대춤이요. 노인의 명성이란 게 매년 군에서 주최하는 농악대회에 면 대표로 나가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노인은 “농사꾼이 죽으면 ‘보리사리’가 나온다”는 동네에서 태어나 젖 떼면서부터 꽁보리밥을 먹고 자랐다. 수십 년 오장육부 구석구석에 보리의 정기를 차곡차곡 쟁여온 셈이다. 노인의 고향인 고창의 백제시대 지명은 보리모자를 쓰는 ‘모양부리현’이었다. 모양성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전국 최대의 청보리축제와 ‘보릿골로’라는 도로명으로, 지역 특산품인 ‘보리된장’이나 지역 고등학교의 상징물로도 남아있다. 노인은 다섯 살 때부터 농악대의 무동으로 아버지 어깨 위에서 농악대 주변에 으레 등장하는 보릿대춤을 보며 눈썰미를 단련했고 소고춤을 추면서 춤사위를 담금질했다. 그가 힘든 농사일 속에서도 소고를 놓지 않았던 것은 마을 농악대 상쇠였던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은 때문이라고 했다. 거슬러 오르면 조상들의 감성이 그의 디엔에이에 간섭했으리라.
“옷만 번지르르하면 춤이요?” 전통무용이 허튼춤을 하대하는 것에 대한 노인의 항변이었다.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는 법. 요즘은 보릿대춤이 전통무용 잔치에 더러 초청되기도 하니, 흥부가 놀부 부엌 기웃대다 밥알 실하게 붙은 주걱으로 뺨 맞은 격이요.” 했었다. 후회막급. 위로랍시고 꺼낸 ‘밥알 붙은 주걱’의 비유는 너무나 치졸했다. 지난해 일제강점기에 메꿨던 연못을 복원하자 100여 년 땅속에 묻혀있던 씨앗이 발아하여 연꽃을 피웠다. 우리가 만난 곳이 바로 그 옆이었다. “저 연꽃처럼 수십 년 허튼 것이라고 버려두었던 보릿대춤이 이제 언 땅을 뚫고 피어나게 되었다”고 했다면, “당신이 그 싹을 틔울 보리알”이라고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처용무나 태평무의 명인이 된 뒤에 살풀이춤이나 학춤 같은 허튼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으니 기실 허튼춤이 한 수 위요.” 했더라면 자부심을 갖게 되지 않았겠는가. 자신이 사용할 소고며 장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허튼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리라. 밥알 붙은 주걱으로 자긍심의 뺨을 때린 나야말로 얼마나 ‘허튼인간’인 것이랴.
노인은 “한 번만”이라는 조건으로 시연회 무대에 설 것을 수락했다. 그를 뭐라 부르면 위안이 될까? ‘기능보유자’ ‘시연자’ ‘전수자’ 백가쟁명 고심 끝에 그냥 ‘춤꾼’이라 부르기로 했다. 결코 보상이 되진 못하리라. 이렇다 할 지원을 해줄 궁리가 없는 나는 내친김에 ‘단군 이래 최초’라는 공허한 말치레를 더했다. 정말 그러리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얼쑤” 졸지에 ‘단군 이래 최초의 보릿대춤꾼’이라는 훈장을 달고 농사꾼으로 돌아가는 그의 등을 향해, 그 옛날 머슴 밥그룻처럼 찬사를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추임새를 보냈다.
■허튼 것들의 역습
보릿대춤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며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시대적으로는 보리가 주식이던 시절. 경남지역에도 보릿대춤을 추는 분이 있지만 전라도지방에서 특히 성행했다. 일제강점기에 왕실의 그늘로 숨어든 처용무, 태평무 등과 권번으로 피신했던 검무, 승무 들은 해방과 함께 화려하게 귀환해 ‘예술 인증서’를 받고 무대로 진출했다. 이들은 이후 ‘전통무용’이라는 카르텔을 형성하고 서민들의 춤을 ‘허튼춤’이라 부르며 천대해왔다. 속칭 허튼춤 가문에서는 살풀이춤과 부산의 동래 학춤이 자수성가했을 뿐, 나머지는 지리멸렬 명운이 다하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보릿대춤은 흥춤이다. 장소, 환경, 추는 사람의 정서적 상태에 따라 흥의 태동과 운용이 다르고 신명이 이동하는 궤적과 표출되는 형태도 달라진다. 따라서 개별 공연자의 몸짓을 규범화하거나 동작의 우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제 흥에 겨워 휘뚜루마뚜루 추는 춤이니 자연 춤사위가 달라지고 춤맛도 다를 수밖에 없다. 발은 장단을 따라 가고, 손은 리듬을 따가 간다는데 동네 악사의 부실한 장단으로 격조 있는 음악을 갖출 수 있으랴. 바람에 살랑이는 보릿대의 즉흥을 오리지널리티 몸의 언어로 표출할 뿐.
우리 민족은 논두렁 밭두렁에서, 마을 정자에서, 잔치 집에서, 유원지에서, 심지어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 속에서도 위험을 감수하며 과감하게 보릿대춤을 추었었다. 그것은 다소 거칠고 소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원초적인 데다 ‘고성방가’를 수반하기 일쑤여서 먹는 문제를 해결한 교양인들 보기에 민망한 점이 없지 않았다. 보리가 전기밥솥에서 쫓겨나던 무렵. 장구한 세월 숙성되어온 보릿대춤은 1인당 국민소득 1만 불의 국격을 훼손한다는 죄명으로 몇몇 허튼 것들과 함께 사회에서 격리조치 되었다. 주변이 조금 깔끔해진 듯했고, 나 또한 분명 정부의 시책을 지지했었다. 세월이 그 기억을 거의 지워갈 때쯤 나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보릿대춤을 만났다. 무교동의 새로 개업한 식당 앞이었다. 발을 땅에 굳건히 박고 삶의 애환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접음’. 어르고 어르다 고통의 응어리를 한줌씩 덜어내는 ‘펼침’…. 보릿대춤의 지문 같은 춤사위가 가슴 가득 바람을 가두고 고객을 부르는 풍선의 손짓으로 남아있었다. 길 가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이 모르는 사람에게 악수하자고 손 내민 머쓱함으로 바뀌었다. 춤사위의 기억과 풍선의 반복 동작이 허탈하게 헝클어지며 ‘잊혀진 것’이 ‘잃어버린 것’이 되었다. 정신적 부재가 물질적 부재로 환치되고 역순으로 재현되는 혼란. 오래 전에 버렸던 허튼 것들의 역습이었을까?
관객들이 보리밭 사잇길로 바람처럼 빠져나간 텅 빈 무대 위에 노인은 마지막 동작 그대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탈진한 걸까? 체내의 남은 흥을 갈무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10여 명의 아마추어 출연자들이 2주밖에 안 되는 짧은 연습기간 동안 꽤 열심히 준비했다. 결과는 딱 기대만큼 이룬 듯했다. 첫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라는 아쉬움에 출연자 몇 명이 함께 했다. 조동화가 우리 춤의 명인에게 절정의 감정을 물으니 “… 글쎄 눈물인가?”라 답하고, 몰입 경지의 심정을 물으니 “…울고 싶은 거죠”라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똑같은 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모두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리라. 시연회의 기획자이자 연출가로서 모두를 대신해 시연자인 노인에게 물었다. “보릿대춤 출까요?” 최초의 보릿대춤꾼이 되어 공연을 계속하자는 뜻을 에둘러 전하는 물음이다. 답은 보리가 익기 전에 듣기로 했다.
오강석 / 200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추사 평전 『길에게 길을 묻다』 소설집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행기 『아, 사하라』, 『다시 가 본 베트남』 사진집 『20세기의 증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