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어느 읍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강경.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금방 다른 점이 발견된다. 근대에서 시간을 붙들어맨 건물이 곳곳에 서 있다. 일제시대 가옥과 인적이 뜸한 거리는 야인시대 세트장을 연상시킨다. 거리를 천천히 거닐고 있노라면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중앙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옛날 강경에서 가장 번화가였다. 하지만 강경역 앞 신시가지로 상권이 옮겨가면서 모든 게 어느 한 순간 멈춰버린 느낌이다. 그 전, 1914년 호남선 개통은 강경의 쇠락을 앞당기는 계기였다. 금강을 통해서 운송하던 물류를 철도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1990년 금강하구둑 완공은 강경포구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사실상 강경의 발전도 그걸로 끝이었다. 서창리 강경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과거 흥성거렸던 강경을 말해주는 듯하다.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로서 제법 규모가 큰 편이다. 해방 후에는 젓갈창고로 이용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텅빈 내부를 드러낸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하고 있다. (근대문화재 324호)
어느 한 순간 멈춰버린 강경
골목으로 들어서니 강원도 태백에서나 볼 수 있는 천정 있는 재래시장이 폐허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재래시장도 강경역 앞 신시가지로 옮겨가 상인도 찾는 이도 없는 이곳, 시간을 뒤좇지 못한 한 노파만이 두부 몇 모를 앞에 두고서 무료함과 벗하고 있다.
골목 이곳 저곳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을 본 동네 주민이 옛날 집은 저쪽으로 가면 있다면서 직접 안내를 맡는다.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면서 가리키는 곳은 남일당한약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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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을 열고 들어와 텃밭에서 본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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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가옥과 한옥을 합쳐놓은 듯한 ㄱ자형 2층 주택. 1923년 지은 뒤 30여년 전까지도 영업을 했다고 한다. 최근에 약간의 보수공사를 거쳤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텃밭으로 변한 마당에는 무, 배추, 가지 같은 채소들이 주택과 한데 어울려 가슴 뭉클한 정취를 자아낸다. (근대문화재 10호)
강경의 개는 입에 조기를 물고 다닌다
터벅터벅 걸어 강변 둑으로 올라섰다. 금강 지류인 샛강이 만나는 곳. 한때 나라 안에서 원산포구와 함께 가장 흥성거렸던 강경포구이다. 이곳으로 서해의 모든 수산물이 집산되었다. 오죽하면 '강경의 개는 입에 조기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나돌았을까? 넘치는 수산물을 감당 못해 염장을 하기 시작한 게 오늘날 강경젓갈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포구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금강 건너 부여 세도면으로 떨어지는 노을이 강경의 너른 들판을 누렇게 물들였다고 해서 '놀뫼'(황산)라는 옛 지명도 지녔다. 포구 뒤로 솟은 옥녀봉에 오르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삭을 대로 삭아 뼈만 남은 조기대가리처럼 속을 모두 비워내고 있다. 강경은 나무까지도 곰삭은 맛을 품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새로 조성한 봉수대가 서 있다. 이곳에선 강경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너른 들판 가운데로 지나는 금강의 물줄기가 산자락에 숨어드는 데까지 보인다. 옥녀봉에서 내려와 샛강을 따라 마을로 향하다 보면 일제 때 만든 갑문이 있다. 더 걸어가면 1925년 세워진 강경노동조합 건물이 나온다. 당시 조합원만 780여 명, 대단한 규모다. 이래서 '은진(논산)은 강경이 먹여 살린다'는 말도 회자되었나 보다. (근대문화재 323호)
이밖에 강경의 근대문화재로는 중앙초등학교 강당(60호),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322호), 북옥감리교회(42호)가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 문화재정보센터에서 검색해 주소를 적어가면 찾는데 도움이 된다.
겉으로 드러난 강경은 젓갈의 고장으로만 알려져 있다. 속을 들여다 본 강경은 근대 역사의 현장이자 박물관이라 할 만했다. 근대로의 시간여행, 강경여행의 참맛은 거기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