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들었던 동화 같은 얘기. 할머니는 도연명의 '도원경(桃源境)' 얘기를 꺼내실 때마다 먼 산을 바라보셨다.
당신의 그 멀기만 한 시선만큼 복사꽃 만발한 들녘은 분명 이승의 풍광 너머에 있는지 모른다. 세상을 온통 뒤덮은 울긋불긋한 기운은 해서
예부터 어떤 미신과 함께 언급되곤 했다. 우리네 조상들은 복숭아 나무를 담장 안에 심지 않았다. 복숭아가 귀신을 쫓는다고 여겼던 조상들은
제사 때 혼령이 집안으로 못 들어올까 저어했다.
그래서 이름난 명당 근처에도 복숭아 나무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성적 욕망이 과하면 화를 입는다는 표현도 굳이 복숭아꽃을 갖다 붙여
도화살(桃花煞)이라 했다. 솔직히 심란하다. 연분홍 꽃잎 흩날리는 경북 영덕의 벌판을 다녀온 지금. 과실수의 꽃 가운데 가장 요란하다는
복사꽃에 폭 감싸였다 나온 지금. 귀신을 보고 온 듯 가슴은 두근거리고 맥박은 불규칙하다. 아무래도 화사한 복사꽃에 취해 춘정이 심히 동했나
보다.
>> 최대 복사꽃 동네 영덕에 가다
경북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으로 향한다. 30㎞쯤 달려 지품면사무소를 지나니 이내 천지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복숭아 군락지가 들불처럼 펼쳐진다. 국내 최대의 복숭아 산지는 예부터 영덕읍까지 20㎞나 이어진다. 34번 국도를 따라, 국도와 나란히
흐르는 오십천을 따라 모두 761농가가 370㏊에 복숭아를 재배한다.
복사꽃은 해마다 4월 중순께 만개한다. 복사꽃은 꽃잎을 피운 맨처음엔 연분홍이었다가 차츰 붉은 기운을 더해 열흘쯤 뒤 꽃잎이 떨어지기
전엔 다홍에 가까워진다. 해마다 영덕군은 복사꽃이 만개하는 시점에 복사꽃 축제를 영덕대게 축제와 함께 연다.
차에서 내려 꽃밭으로 들어갔다. 꽃밭은 길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산마루도, 들판도, 개울가도 모두 분홍빛 세상이다. 이쯤되면 사태다.
복사꽃 사태. 신양 삼거리에서 신애리까지 5㎞ 구간에선 차라리 어지럼증을 느낀다. 한껏 마음이 들뜬다. 복사꽃의 묘한 기운에 시나브로 홀리는
기분이다. 그때 꽃밭 복판에서 한 농부와 마주쳤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꽃잎을 따고 있었다. 이 천상의 절경을 해치는 까닭을 물었다.
"꽃이 많으면 알(과실)이 잘아 못 씁니더. 한 가지에 서너 송이 빼고는 다 쳐야 합니더."
농부의 무뚝뚝한 대답엔 복사꽃을 꽃놀이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상춘객을 향한 불신이 묻어났다. 상춘객의 볼은 순간 발그레 달아오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농부는 유독 객에게 심드렁한 표정이다. 장사꾼이 다 된 다른 관광 명소의 농부와 사뭇 다르다. 군청에 들어가서야
연유를 알았다.
영덕은 원래 복숭아 천지가 아니다. 1959년 태풍 사라가 논밭을 휩쓸고 간 뒤 이곳의 농민들은 오로지 생계를 위해 복숭아를 심고
가꿔 내다 팔았다. 7, 8월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아가며 복숭아를 따왔지만 지금은 그마저 신통치 않다. 당분 높고 자극적인 열대 과일이
대거 수입되면서 복숭아 판매량이 해마다 급감한 탓이다.
지난해만 해도 영덕의 복숭아 재배 면적은 430㏊였다. 일년만에 60㏊가 줄었다.
80년대 말엔 700㏊가 넘었다. 농민들은 지금 평생을 함께 늙어온 복숭아 나무를 뽑고 그 자리에 배와 사과나무를 심는다.
군청에서 나와 다시 복사꽃 단지로 돌아왔다. 분홍 복사꽃 사이에 흰 배꽃이 핀 걸 보고 한 관광객이 "기막힌 조화"라며
연신 카메라 셔텨를 눌러댔다. 기자도 셔텨를 눌렀다. 하지만 이유는 달랐다. 앞으로 5년만 지나도 이 천상의 풍광은 사라질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더 컸다. 지금 영덕의 복숭아 세상이 1600년 전 중국 무릉의 복숭아 들녘처럼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축제 정보 : 영덕군청 054-734-2121, 영덕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yd.go.kr
가는 길 : 영덕은 서울에서 참 멀다.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5시간은 족히 걸린다. 방법은 두가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안동 나들목에서 나온다. 거기에서 34번 국도를 타면 영덕읍까지
70㎞ 거리. 가는 중간에 복사꽃 군락지가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길. 6시간은 각오해야 한다.
숙소 : 영덕 축제가 열리는 강구항 근처에 몰려 있다. 영덕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모두 53곳의 호텔.모텔.여관과 504곳의 민박집에 대한 정보가 있다. 민박집 대부분이 모텔급 시설을 갖췄다.
요금은 주중 3만원, 주말 4만원(4인 1실 기준). 모텔은 주중 4만원, 주말 8만원(2인 1실 기준). 대게가 물린다면 물회를
추천한다. 잡다한 생선회를 갖은 야채와 함께 고추장에 비빈 뒤 물을 부어 국처럼 떠마신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
1인분에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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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놀이만 하고 가기 아쉽다면
꽃놀이하러 그 먼길을 떠난다지만 꽃구경만으로 여정을 다 채울 수는 없는 노릇. 영덕이 자랑하는 다른 명소를 소개한다.
■ 해안도로 드라이브
: 강구항에서 병곡까지 30㎞나 이어지는 7번 지방도로는 소문난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다. 해맞이공원을 지나
대게 원조마을인 경정리, 축산항, 대진항을 거쳐 대진해수욕장에서 고려불해수욕장까지 명사20리 길이 펼쳐진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시골 어항의 정겨운 모습이 동해와 함께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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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산 : 7번
국도를 타고 울진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칠보산 진입로가 있다.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도록. 경사와 굴곡 모두 심한 산악도로가 8㎞나
이어진다. 최고속도 20㎞ 구간을 한없이 오르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으로는 칠보산 자연휴양림이, 오른편으로는 신라 때
지었다는 유금사가 있다. 두 곳 모두 갈림길에서부터 2㎞쯤 자갈길을 거쳐야 한다.
특히 유금사가 있는 금곡3리는
산골 깊숙이 박힌 오지마을이다.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경험이다. 자연휴양림은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전국 휴양림 가운데 가장
고도가 높고, 유일하게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시설도 우수하다. 워낙 인기가 좋아 주말에 숙박을 하려면 최소한 한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054-732-1607, www.huyang.go.kr |
■ 기타 :
7번 국도를 타고 포항으로 넘어가기 직전 경보화석박물관이 있다. 한 개인소장가가 20여년 동안 20여개 나라에서 수집한 화석 2000여점을
전시한다. 국내 유일의 화석 전문 박물관이다. 054-732-8655, www.hwasuk.org
강구항 바로 아래의 삼사해상공원은 유명한 해맞이 명소다. 34번 국도상에서 영덕읍 진입 5~10㎞ 사이의 오천솔밭.삼화리(옛 삼협마을)는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복사꽃 사진 명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