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을 누가 받는가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찬송가 197장(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191장(내가 매일 기쁘게)
오늘 본문 말씀은 주 예수를 믿을 때 주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 역시 성령의 감동 감화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는 일이 성령의 감동 감화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 인간의 이성적 깨달음과 인간의 의지적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영접하여 거듭나는 것은 성령께서 그 영혼에 찾아오셔서 감동 감화해주셔서 이루어지는 영적 대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이미 성령이 그 안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충만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 말씀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도 분명 사마리아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어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내린 일이 없다고 사도가 말하며 성령 받기를 위하여 안수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까요? 누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늘 자기를 돌아보며 죄를 버리기를 힘쓰는 자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합니다.
사도행전 2:37~39 말씀에 이르기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말씀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그 자리에 모인 회중들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면서 회개하라고 하면서 회개할 때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의 충만함의 역사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대체로 회개 운동이 선행하는 중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일어나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1907년 평양 대부흥도 회개의 역사 후에 성령의 강한 임재가 일어났습니다.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로님을 필두로 하여 그 자리에 모인 회중들이 자기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중에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자들이 성령의 강력한 충만함을 받았지 않습니까? 미국의 피니 목사님의 집회에서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성령은 정결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죄로 알고 철저히 회개하고자 몸부림칠 때 성령의 충만함이 그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아직도 버리지 아니한 죄는 예수님께 고백하며 죄사함을 구하며, 남아 있는 세상 미련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성령이 우리 속에 충만히 임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임합니다.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면, 성경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2절에 이르기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성령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파송하신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시요, 성령님 역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께 순종하시어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성품이 순종의 영이시기에,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시며, 거역하는 마음, 불순종하는 마음, 불평 원망을 품는 마음에는 충만히 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 우리 성령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이 가득한 자에게 성령께서도 충만히 임하시어 말씀하시며 교제하시며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랑하며 그 모든 계명과 경건의 교훈에 순종하려고 늘 힘쓰는 자가 됩시다. 이렇게 순종의 마음이 충만한 중에 성령을 간구할 때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실 줄 믿습니다.
셋째로, 성령을 충만히 주시도록 간절히 간구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11장 13절 말씀에서 보듯이, 기도하고 간구함으로써 받게 되는 성령은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간구하여 받는 성령 충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좋은 것 중에 좋은 것인 성령을 주시기를 누구보다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기도 한 이 성령 충만을 우리들이 달라고 구할 때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이 언약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누가복음 11장의 앞 단락에서 밤중에 멀리에서 찾아온 손님을 위하여 동네의 친구 집 대문을 연거푸 두드리면서 떡을 달라고 강청하였을 때에, 비록 친구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주님께서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충만을 달라고 간절히 간청하고 또 간청하고 또 간청하면, 좋으신 하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실 줄 믿습니다.
넷째로, 성령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종종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생각하여 그를 사람이 충만히 받아 자신이 성령을 부릴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 성령님은 그 능력이 한이 없고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그는 능력과 술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한 위격을 차지하고 계신 인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이 감정, 의지, 지성을 가진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항상 우리 자신의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경외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자기를 모독하는 자는 용서를 받거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오는 세상에서도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한 바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을 단지 힘을 가져다 주는 물리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물이나 불이나 전기나 번개 정도로 인식하고 자기가 성령을 마음대로 부릴 줄 알고 성령에게 감히 명령하고 자기 계획, 자기 비전을 이루는 도구로 생각했다가는 큰 일 나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삶의 보혜사 되신 것을 인정하며 그를 우리 삶과 신앙 생활의 인도자로 모셔들여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삶의 친절하고 자상한 상담자와 지도자로 모시고 언제나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 삶을 통하여 마음껏 그 뜻과 계획을 펼쳐나가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을 내 삶의 주인 자리에 모셔들이고 인정하면서, 우리 삶을 자세하게 아뢰며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내 삶에 자유롭게 충만히 임재하시고 자기를 나타내시어 일하시어 우리를 통하여 성령님의 뜻을 펼쳐나가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은혜는 이처럼 성령께 우리 자신의 삶 전체를 맡기고 위임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추구할 방향입니다. 성령 충만의 은혜는 누구에게 주어질까요? 성령 충만의 은혜는 간절히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 간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자신을 부지런히 살펴서 죄를 깨닫고 버리는 성결한 자에게 임합니다. 삶 전체를 성령께 내어놓고 주인 자리를 넘겨주는 자에게 임합니다. 이렇게 성령께 우리 자신의 삶을 다 맡김으로써 성령께서 우리 속에 충만히 임하셔서 마음껏 주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