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성경'이 '오직 성경'이 되게 하려면:
종교개혁자들과 발도인들 간의 역사적 만남을 보며
16세기 초반 유럽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소식은 마침내 험준한 피에몽 지역으로 숨어들었던 발도인들의 공동체에도 전해진다. 발도인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로마교황이 사부아 공작 등이 가진 군사력을 동원해 벌인 수십차례의 무참한 학살극으로 인해 피에몽 계곡을 중심으로 고립된 생활을 해야먄 했다.
기독교 역사상 피에몽 계곡의 발도인들만큼 오랜 시간을 로마교회로부터 집요하게 핍박당한 공동체도 없을 것이다. 왜 로마교황과 그 추종자들은 오직 성경의 진리를 따르려 한 저 발도인들을 그토록 죽이지 못해 안달했는가? 로마교회는 도대체 무엇때문에 무려 30차례가 넘는 대규모 군사 작전, 아니 발도십자군을 사칭해 저 발도인들을 말살하려 했는가? 이 피에몽 계곡 일대의 참혹했던 피와 눈물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다!
따라서 이들 발도인들의 신앙적 용기와 순수성은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되고도 남는다 할 수 있겠다. 그런 그들이 대륙의 중심부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대표단을 파견해 종교개혁 진영과의 신앙적 하나됨을 확인하며 협력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신중한 질문과 함께 자신들이 지켜온 고대의 발도인 신앙고백서 등을 종교개혁자들에게 제시하고, 마침내 그들과의 영적 하나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오직 성경'의 기치를 외치며 신앙적 순수성을 위해 투쟁했던 발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오류가 있었음이 외콜람파디우스와 파렐 등 개혁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에 발도인들은 겸허히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수용한다. 물론 이때도 개혁자들은 발도인들의 신앙적 순수함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됨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렐의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발도인들에게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며 지도할 교사들을 피에몽 현지에 보내주는 것과 현지 교육기관 등의 설립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성경'이라는 기치와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간의 죄성 및 처한 상황의 어려움 등과 맞물려, 그 본래의 정신에서 얼마나 부지불식 간에 벗어날 수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발도인들과 종교개혁자들 간 '신앙적 순수성'을 가지고 비교해 본다면 누가 우위에 있을까? 이 질문은 우문일까? 그렇다면 발도인들과 종교개혁자들 간 '오직 성경'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비교해 본다면 누가 더 본질에 가까웠을까? 당연히 새로 일어난 종교개혁자들의 진영이 훨씬 성경적이었다. 이는 발도인들과 개혁자들 간의 신학적인 대화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것이다. 주류의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탁월한 인문학도였다는 사실이다. 법학도였던 루터가 신앙적 위기를 겪고 수도원에 입회하러 들어갈 때조차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법전>만큼은 챙겼던 것과, 칼빈이 법학과 고전 등을 전공했던 것과, 츠빙글리도 고전과 헬라어 등 언어에 탁월한 인문학도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직 성경'의 정신이 유지되고 후대에도 잘 전수되려면 역사, 언어, 고전, 철학 등의 인문학적인 기반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인문학이라는 것은 오직 성경을 위한, 아니 오직 성경이 아닌 것을 분별해 내고 걸러내기 위한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발도인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들은 극심한 핍박으로 인해 세상과 고립되어 성경만 읽을 수 있었고, 몇 몇 고대의 신앙고백 문서와 구전 등을 통해 올바른 성경해석의 틀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신앙적 순수성은 계속 유지했겠지만, 성경해석의 순수성만큼은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성경해석의 순수성이 담보되지 못한 신앙의 순수성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이던가? 발도인들은 안타깝게도 무엇이 올바른 성경 해석인지 걸러낼 도구를 상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자들과의 감격적인 만남에도 불구하고 몇 몇 뼈아픈 지적과 충고를 들으며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순수성은 오직 성경에 의해 유지되지만, 오직 성경만을 읽으며 고립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 순수성이라는 것도 변질되기가 쉽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죄성을 지닌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오직 성경에 충실하려고 목숨까지 바친 위대한 발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인간의 한계만큼은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직 성경'이 '오직 성경' 되게 하려면, 그 가치를 올바로 유지하고 전수하려면 인문학적 기반은 필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박사 학위나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 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한 목사들이라 할지라도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의외로 쉽게(?) 가능하다. 끊임없이 기도하며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과 역사적 안목과 시대적 분별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 일엔 박사나 목회학 석사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도와 공부는 진리에 대한 마음의 감각 또는 영적 센스를 예민하게 유지하게 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우리 인간은 죄인인고로 그 이성적 능력과 지적 능력을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에 끊임없이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의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자기 이성과 지적 능력을 하나님 말씀에 굴복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부를 안 해도, 해도 항상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보아도 여기에 무슨 뚜렷한 해결책은 없는 것 같다. 그저 기도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기도해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이성과 지식을 끊임없이 굴복시켜 나가는 것뿐이다! 그래야 오직 성경과 신앙의 순수성이 유지 및 담보되며, 후대에도 잘 전수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