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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이지요
진실은 언젠가 더 만천하에 알려지겠지요
역사의 날조는 일본만 하는게 아니지요
이런글은 기득권 언론이나 출판나 방송에서 결코 말하지 않지요.
친일 그들은 대대로 한편이고 재벌과 정치권이 사돈 지간 친척으로 지금 현재까지 기득권을 독점하니까 ....요
긴글 퍼옵니다
이 글은 한겨레인터넷에 실린 김현미님의 글입니다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 구체적 친일 행적 열 가지 ★
[ 들어가는 말 ]
얼마전 3,1절 83돌을 맞이하여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 서 709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였다. 당시 전략적 차원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박정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한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는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이다. 친일부역의 정도에 따라서 A급, B급, C급 등으로 나눈다면 박정희 에게는 A급으로는 부족하여 특급 친일파(A+)로 분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저질적인 친일파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철저한 인권유린에 바탕을 둔 군사파쇼로 통치를 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를 휼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자나 경제전문가들에게서 긍적적인 평가의 대상조차 되기 힘든 박정희가 대중들에게 휼륭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분위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며 그 문제점과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역류시키고자 글을 올린다.
그 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글을 몇 편 올렸지만("너(박정희)의 가면 을 벗겨주마 1∼8편" 등) 구체적 친일행적에 대한 글은 올리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친일분자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통치하였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겨울공화국 같은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의 죄상을 묻지 않아도 친일행적 하나만으로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 죄인이다.
'변신의 황제'였던 그는 결국 한반도 남쪽에 일본도 흉내만 내다만 천황주의를 완성하였다. 즉, 다카키 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변장술, 위장술, 둔갑술 등을 이용하여 천황주의를 완성하고 진짜 천황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역겨운 구토물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라!
교사에서 군인으로--- 조선청년에서 일본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 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누루에서 다시 박 정희로---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빨갱이' 무기수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스런 장성에서 군사반란 두목으로--- 육군 대장에서 대통령으로---
박정희는 극과 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으며-- 그에게는 조국과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단지 '권력의 디딤돌'이었을 뿐이다.
-. 민족과 반민족, 정의와 불의 따위 구분은 깡그리 무시하였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아무리 반민족이고 불의라도 권력으로 통하는 길만 보이면 돌진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기회주의는 그의 처세술이고 천황주의는 그의 사상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제 그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용 ]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해서 들어가는 상황을 좀더 살펴 보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격 미달이었는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또한 나이를 낮췄다고 멀쩡한 조선인이 군관학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다카키마사오(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에서 인정을 받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동료교사 유증선이 아이디어를 내주었는데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하며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했다.
나이도, 신원검증도, 사상검증의 장애물을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충성혈서는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아니 일제를 감동 시켜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교사의 신분으로 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 입대하는 것은 천하제일의 기회주의자로 출발하는 신호탄이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자기를 지우려했던 어머니와의 출생전쟁에서 승리하여 '죽음의 집' 같았던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탈출하였고 다시 가난한 집과 고향으로부터 탈출하여 황국신민교육의 첨병 대구사범학교로 탈출하고...
다시 사무라이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장교 양성기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탈출하여 '신민지 조선'을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천황주의자의 신봉자가 되어 '조센징 토벌'에 몸과 마음을 바쳐 젊음을 불태우게 된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세력이 된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 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③ 완전한 일본인 - JS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 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 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 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 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 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기만 살아남는다.
박정희가 좌파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조갑제 등은 형(박상희)의 죽음과 연관 시킨다. 그 충격으로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다만 유리한 상황에 편승한것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미국 정보의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반도는 온통 붉은색(좌파)으로 뒤덮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러한 권력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지 간파하고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다.
하여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 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 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맺는 말 ]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 청년에겐 4가지의 길이 있었다. 물론 더욱 세분하여 분류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최상천씨가 제시한 4가지의 길을 소개한다.
첫째 :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투쟁하는 대의(大義)의 길을 가는 것.
둘째 : 개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가는 침묵의 길을 가는 것.
셋째 : 조선총독부의 들러리가 되어서 개인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소아(小我)의 길을 가는 것.
넷째 : 일본군국주의를 숭배하고 그 전위대가 되는 사냥개의 길을 가는 것.
식민지 청년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위에서 살펴 본 봐와 같이 네 번째 '사냥개의 길'를 선택했다. 그것도 무서운 집념과 실천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일본의 사냥개 노릇을 하였다. 참고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첫 번째의 길을 선택하고 일본에 맞서다가 감옥을 수차례 드나들었다.
어떤가? 이러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신궁을(기념관) 지어줄 것인가?
집권시절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 등의 죄악을 묻지 않아도.... 친일 행위 하나만으로 기념관은 불가하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친일파는 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민족은 일제에서 해방되었지만 민족의 정기는 바로 서지 못했다. 모두 친일 세력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파가 대통령을 하고.... 국무총리를 하고.... 각 부서의 장관을 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자본가가 되고...
역사에서 친일파는 승리자라는 공식을 우리는 언제까지 만들어 주며 보아줄 것인가? 자신들의 죄과를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지 않고 죽어가며 이제 그들의 죄상까지 죽어가고(묻히고)있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친일 행위는 반드시 그에 응당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 친일파로써 가장 성공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죽어서까지 영화를 누리고 있다.
근대화의 아버지.... 경제성장.... 운운하며 일본군인의 기념관을 자랑스럽게... 서울 한복판에.... 현직의 대통령과.... 정부가 주도하여.... 기념관을 지으려고 한다. 역대 대통령 기념관도 아닌 '다카키 신궁'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나간 일이며 미친 짓이다.
다카키 신궁이 완공되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하며 천황을 기리듯이 '다카키 신궁'에 머리를 조아리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번엔 그 집안을 알아봅시다.
■ 박정희 딸 박재옥
우선 박정희의 딸 박재옥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1931년 평남 안주 출신이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대사, 캐나다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죽자마자 권력에서 멀어졌다. DJP연대로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개혁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위원장이 되는 등, 조금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친인척을 멀리한 건가?
■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
그 다음에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을 보자. 그러니까 박정희는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다.
1941년 경북 구미 출신이다. 대구상고, 고려법대를 졸업하였다.
28살의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거 정상적인 건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 아들 박준홍
또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을 보자.
1947년생이다. 경북 구미 출신이다. 계성고, 경희대 정외과,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요거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한 얘긴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지금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촌형인 박재홍과 맞붙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친인척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 박근혜의 외삼촌 육인수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 그러니까 박근혜의 외삼촌인 육인수 같은 경우에도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 씩이나 지낸 거 아닌가?
그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 김종필
김종필 같은 경우에도 박정희가 끔찍이 생각했던 형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의 남편 아닌가? 박정희의 처조카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다. 25년 전에 887억원이면... 이건 계산이 불가능한 돈이다.
이래도 박정희가 깨끗하고 청렴한가? 그걸 몰라서 가만히 놔 둔 건가? 박정희 개인은 절대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런지는 모르겠다.
■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 정수장학회
박정희 덕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를 지배하고 있나? 정수장학회가 말이 장학회지, 그 규모가 1조 300억원에 이른다. MBC의 30%가 정수장학회 소유다. 부산일보도... 경향신문 사옥 부지도...
■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또 어떻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나? 육영재단도 수천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나?
이게 청렴한 대통령의 표상이라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들
게다가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다던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 뿐이랴!!!!
박상희의 세째 딸 박금자를 총리실에서 근무하는 반기언과 혼인시키고, 결정적으로는 박상희의 막내 딸 박설자를 벽산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시켰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이 박설자로 말미암아 박정희 집안이 드디어 그랜드 서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가 바로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다. 이 허영자의 조카사위, 그러니카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다.
■ 박태준의 아들 박성빈
그런데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한번 가보자. 참 웃기는 거 발견했다.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인 허영자의 오빠가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이다.
이 허남각의 딸 허정윤이 얼마전에 정대호라는 청년과 결혼을 했는데 이 정대호가 그 유명한 황해도 재령의 대지주의 아들인 강원산업 창업자 정인욱의 손자이자, 현재 강원산업 회장인 정문원의 아들이다.
이 정문원의 부인 최금자의 언니가 최금숙이다. 최금숙이 누구냐? 바로 얼마전에 형제의 난으로 물러난 두산그룹 회장 박용오의 부인이다.
게다가 정문원의 동생이 정도원인데 정도원에게 두 딸이 있다.
큰 딸 지선이는 기아자동자 회장인 정의선과 결혼했다. 정의선은 누구냐? 현대자동차 정몽구의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회장의 손자다, 이 말이다.
작은 딸 지윤이는 박성빈이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이 박성빈은 또 누구냐? 포항제철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포철 박성빈이랑 현대 정의선이랑 동서가 된다. 따라서 현대그룹이 철강산업을 하려고 부지까지 선정하러 다니다가 포기한 배경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 박성빈을 좀 더 파헤쳐 보자
박성빈을 좀 파헤쳐보면 아주 재밌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서프앙들에게 미안해진다. 양해 바란다.
박성빈은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다가 요즘 무슨 통신 솔루션 업체인 사운드파이프 코리아 대표이사로 있다.
이 회사를 가만히 보니까 무슨 다국적 기업인 것 같은데 국내 대리점을 영업하는 듯 하다. 전자신문같은 걸 보면 꽤 잘 나가는 듯 하다. 잘 나갈 수 밖에 없다. 예를들면 사운드파이프에서 무선랜 환경을 구축했다는 아산병원은 현대 계열 아닌가??
박성빈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박태준이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 드러난 박성빈의 부동산만도 강남구 역삼동의 170평짜리 카센터와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등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남동에 빌라도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고구마 줄기라고 할 수 없다.
■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를 주목해야 한다. 김형수는 박태준의 한국화가 딸 박유아와 결혼을 했는데, 박유아는 본래 변호사 고승덕과 살다가 헤어졌다.
이 김형수는 또 이력이 만만치 않다. 한국맥도널드 사장과 국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 렉서스를 수입판매하는 렉서스 케이모터스 대표이사다.
그런데 이 김형수의 부친이 그 유명한 동일고무벨트 창업자인 김도근이다. 이 김도근의 이력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지향적인 것이 분명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등등 골 때리는 이력이 꽤 많다.
문제는 김도근의 큰 아들이자 김형수의 형인 김진재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박정희시절부터 여기저기 부산지역을 마구 쑤시고 돌아다녔다. 청년회의소니 부산 싸이클 연맹이니 뭐니 닥치는대로 자리라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도 맡았다.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다.
열심히 하면 위에서 알아보는 법,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다.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그 유명한 춘천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
■ 육영수의 조카사위 한승수
그런데 이 괴상한 상황을 우리 서프앙들이 알아야 한다. 이 한승수가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한승수의 장모가 육영수의 큰언니 육인순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에게 한승수는 사촌 형부다. 한승수의 장인은 일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이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사위들이 세명이나 국회의원이 됐다. 예전에 서주산업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혀바닥 시뻘겋게 되는 아이스 바를 다들 먹어 봤을거다. 그 서주산업의 회장이 바로 국회의원을 지낸 홍순일의 다섯째 사위 윤석민이다.
한승수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홍소자가 혜원여고 교장을 지냈는데 알아보니까 혜원여고 이사장 윤석민의 처형이네?? 헐... 신문에는 그런 관계가 안 나와서 참 재미가 없다.
홍소자랑 열린우리당 이미경의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 육영수의 언니 육인수의 사위 장덕진
또 만주지역에서 엄청나게 크게 농장사업을 벌였던 천재라는 장덕진이라는 사람이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사위다. 이 사람은 박정희정권 하에서 장관도 지냈다. 분명히 장덕진과 한승수가 춘천고 동문으로 친분이 있어서 동서가 된 거 같다.
■ 육영수의 조카 사위 정영삼
전국민이 뻔질나게 소풍가는 한국민속촌 회장 정영삼도 육인순의 사위로서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어쨌든 이렇게 오만가지 요직은 다 해먹었는데 무슨 박정희가 친인척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 민자당 후원회장 히회림과 박정희의 조카사위 한승수의 사돈관계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얼마전 이희현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내가 깊이 파보니까 이희현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상준의 장인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이화영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웬걸??
이 이화영이라는 사람이 마지막 개성상인이니 뭐니 하면서 언론에서 띄워주는 성북동에 사는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었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ITV 폐업할 때 그 모습이 마지막 개성상인의 모습인가?
내가 그동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후원회장 이회림이 왜 그랜드 서클 안에 안 들어오나, 의아했다. 그러니까 이회림과 한승수가 사돈을 맺은 거다.
어쨌든 한승수같이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낸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이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 박정희를 추모하고 애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깜빡 속아 넘어가겠다. 한승수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에요. 조카사위!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아까 언급했던 박태준의 사위 중 튀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가 있는데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김병주는 1962년생인데 얼마전까지 미국 칼라일 그룹 아시아지역 회장 겸 이사였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졸업하였다. 김병주는 국민의 정부시절 자민련이 연정을 할 즈음 박태준이 총리가 되기 직전에 칼라일 코리아 사장이 되었다.
김병주는 쌍용정보통신을 꿀꺽하더니 5000억원을 쏟아부어 한미은행을 먹었다. 하나은행마저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였다. 한미은행을 4억달러에 사서 씨티은행에 27억달러에 팔아먹었다.
물론 그 이익은 미국 칼라일의 몫이었다.이토록 한국의 부를 외국에 팔아넘기는데 그들은 서슴치 않는다. 매국노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들이 자신들의 배만 채우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있고 부의 국외 유출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부시 아버지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외국계 인사로 초대된 것으로 봐서 한국인이기보다는 미국인으로 추정된다. 요즘 칼라일 간부 5명과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들이고 있다.
MBK는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기관에서 5억 달러를 끌어들였고, 캐나다 교직연금에서 2억 5천만 달러를 끌어들였다. 삼성생명, 대우정밀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인물은 민주개혁세력이 끊임없이 눈여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 청렴하다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은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거기 이사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거다.
기회의 평등을 무시한 만고의 역적 다카키 마사오의 개정희가 저지른 이런 한국의 부패는 그놈을 부관참시를 하지 않고는 정리를 할 수 없으며 이런 부정부패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놈들의 모든 재산은 모두 압수하여 국고에 환수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나?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다 뻥이다. 이토록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 부정축재를 저지른 매국노 박정희는 후세인의 처벌 이상의 처벌을 해야 하며 그들의 자자손손들에게도 그 업보를 짊어지게 해야 할것이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겠다. 이상과 같이 해 줄만큼 다 해줬고 해처먹을 만큼 다 해처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머리가 아니라, 이미 장면정부때부터 기획구상된 것이었다 5.16쿠테타이전부터 장준하 선생이 국토개발기획단장이 되어 가지고 농촌을 바꾸는 새마을운동을 이미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용이네요... 박정희가 친일파 일본 군인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경제를 세웠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저지른 많은 악행은 덮어버리는 우리 언론과 국민들(일부)... 속지 말아야지요
얼키고 설킨 친일 잔재 기득권들의 인맥...........친일 매국의 잔재를 없애야 앞으로 나아갈수 있겠지요.알본과의 수 많은 이들의 한이 풀려야 용서도 되고 21세기의 친구도 되고 할터인데 말이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민족문제 연구소를 쳐보세요/ 작은 힘이 모여 역사를 움직여 왔습니다.
저도 잘 몰랐던것을 자주루비님 때문에 알게 되었네요..
한때 매국했던 자들이 지금도 더 잘살고 더 큰소리 치는 세상 인것 같아요..
이제라도 바로 알고 바로 대처 해야 하는데 왜 아는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있는것 인지...
친일 매국노들 지금이라도 단죄 하는 방법은 없는지요...
우리땅 독도를 방문하는 대통령이 왜 일본에다가 먼저 통보를 하는지원....현실이 이러하니 일단은 선거가 아니겠어요.....
좋은글주셨네요....이제는 국민들도 알권리를 찾아야한다고요.
저도 병원출신이라서 느끼는데요..환자는 자기의병을 알권리가있답니다.
원래 의사가 자세하게 설명해주는것이원칙인데, 우리나라는 의사가 왕이니...이거참...
정치든생활이든 국민의 알권리를 찾는게 참 민주주의아니겠어요?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많은 일들을 해 오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