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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대 미-유럽 외교 활동 一考
허만 명예교수/전 한국유럽학회장
단결은 발전의 역사를 낳고, 적전분열은 패배의 역사를 낳는다.-- 허만
건국전쟁은 20세기 초엽과 중후반에 걸친 이승만의 권력 추구와 민주주의 기반 세우기에 주력했다. 그의 투쟁 과정에서 기장 중요하고도 정치적 투쟁 권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다. 그는 약속국 또는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보다 국력과 외교라고 생각했다. 특히 20세기 초 일본 군국주의가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대국의 지원을 얻어 내는 외교를 수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해외에서 33년 간 외교 활동을 수행했는데 이 부분이 건국전쟁 다큐가 조명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본 난에서는 이승만의 불굴의 외교적 도전을 일고하려고 한다.
이러한 목표를 세었던 이승만은 미국 밀사 외교를 20세기 초부터 떠받았다. 고종의 요청을 받아 1904년 11월 미국으로 향했다. 대담하게도 그는 John M. Hay 국무장관을 만나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거중조정(good offices)을 정중히 요청했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독립외교와 주권회복 외교를 전제했다. 그 직 후 1905년 8월 4일 시어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을 찾아 가 면담하는 가운데 “미국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할 의무가 있으며 이번 강화회의에 그 의무를 이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그 해 7월 27일 Taft-Katsura밀약을 이미 체결함으로써 이승만의 외교를 외면해 버렸다. 루즈벨트는 조약을 어기고 당시 열강인 일본 군국주의 편에 섰다. 그의 이러한 외교는 일본이 태평양에로 진출을 미연에 저지하고, 일본을 북상하도록 촉진하는 이른바 세력균형에 근거 한 것이다.
대 미 외교의 실의를 딛고서 이승만은 윌슨 미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 창설에 대한 연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 한국을 새로 창설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둘 것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스승인 윌슨은 무대답이었다. 이승만은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 앞에 크게 좌절했을 법한데도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었던 서재필을 방문해 한국인들과 미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한인대화 개최를 요청했다. 한인들은 테극기를 앞세우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 한 다음, 미국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이승만의 선창으로 “대한공화국 만세와” ”미국 만세“를 외치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이 같은 행동으로써 미국 내 여론을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하겠다. 그 후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었고, 그 뒤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제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추대됨에 따라 전의를 더욱 가다듬었다. 그는 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전승국 대표들을 상대로 속속히 접촉을 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노력을 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표들은 전승국의 권리를 재확인하는 자리이므로 식민지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재차 부정적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대표가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의 외교의 연속적인 좌절에도 불구하고 장소와 위치를 바꾸어 잠시 미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와 독립운동의 역량을 추수렷다. 예컨대 그는 구미위원부를 설립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데 집중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위기가 이승만에게 찾아왔다, 1920년, 3월 5일 임정이 그에게 임정에 부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행치 않을 경우 불심임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즉각 부임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하고, 1921년 1월 상하이에서 3차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이 때 임정은 이승만이 만든 구미위원회의 적법성을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러한 갈등은 임정과 이승만 간 적극적 전략적인 구상을 함께 한다는 생각보다 각자의 위치를 견고히 하겠다는 소극적인 구상 때문이었다. 즉 소극적 국익 (상하이 권력 집단)이 적극적 국익(임정의 승인과 주권회복)을 압도하는 갈등이었다. 갈등은 소소한 부분에서 일어났다. 이승만을 1919년부터 열강과의 외교를 고려해 대통령(president)타이틀을 외교 문서에 사용했고 직함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president 단어는 집전관총제의 합당한 번역이라면서 외교 문서에 계속 사용했다. 이 직함을 사용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해 작지 않은 갈등을 일으켰다. 이는 小益이 大益을 압도한 또 다른 사례이었다.
이승만은 이 같은 갈등 구조를 안고서도 워싱턴군축회의에 대비하기 위해 1921년 8월 말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하와이에 거주하는 교포들과 국내의 유지들에게 호소해 외교 교섭에 필한 자금을 모았다. 이 때 그는 구미원원회 전속 변호사 돌프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선전 자료를 제작, 배포했다. 예컨대 한국적요(Briefs for Korea), 청원서(Korea's Appeal for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 그리고 이 청원서의 추가본인 태평양과 극동군축보충적 청원서(Supplementary Appeal on the Limitation of Armament in the Pacific and Far East) 등을 제작했다. 그 외에도 상하이와 한인 지도자들이 보내 온 일본 군국주의의 괴뢰인 만주국 통치, 그 잔악상 등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결국 그 해 2월 24일 국제연맹 본회의는 Lytton Report를 채택해서 3월 27일 군국주의 일본을 국제연맹에서 탈퇴시키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외교를 적극화하기 위해 토마즈(Charles E. Thomas) 코로라도 주 전 상원의원을 특별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단장 서재필, 서기 장한경, 특별고문 토마즈 등으로 구성된 5인 한국대표단을 창설해 본격적으로 외교 활동에 들어갔다. 이로써 워싱턴회의의 주최국인 미국 대표단장 휴즈( Charles E. Hughes)국무장관을 상대로 참석과 발언권을 얻어내려는데 주력했다. 이 외에도 이승만은 미국대표단에게 서한을 보냄으로써 한국대표단의 외교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주력했다. 끝내 촬스 휴즈 단장은 이승만의 진지한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외교 활동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임시의정원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최창익, 여운형 등 상하이 고려공산단 계열의 인사들은 1925년 3유 18일 제 13회 임시의정원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승만을 향해 임시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켜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시켰다. 그 직후 대통령 서리였던 박은식은 대통령령으로 워싱턴 구미위원부의 폐지를 명령했다. 이러한 환경에 처한 이승만은 정치, 외교 활동을 전면 봉쇄당한 셈이다. 이 떼 이승만은 구미위위원부가 자신의 영달을 위한 기구가 절대로 아니라, 임정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기구이기에 그 이름을 바꿔 주미외교위원부로 개칭해서 1949년까지 워싱턴에서 외교 활동을 유지했다. 이 같은 갈등은 大國益, 즉 임정의 승인과 더불어 독립을 쟁취하는 기구로 발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정에서 외교적 성과가 적다고 해 포기시키려는 행위는 바로 敵前分裂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이 같은 적전분열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더 강경하게 임정 승인 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 오늘의 도전(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츨판했는데, 여기에서 군국주의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에서 미국에 도전할 것을 예언했다. 동시에 미국이 전쟁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고 조언도 했다. 미일 전쟁 가능성을 이렇게 진단하면서 그는 1941-1945년 사이 워싱턴에서 충칭 임시정부에 대해 승인을 해 줄 것을 계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 때 충칭 임정은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겸 주워싱턴 전권 대표로 임명함으로써 측면에서 지원했다. 이 지원에 힘입어 이승만은 재미한족위원회(The United Korean Committee in America)를 단숨에 발족시켰고, 이에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은 대미 외교의 전권을 이승만에게 위임했다.
이렇게 신임을 받아 이승만이 기사회생해 주미외교위원부장 자격으로 미 국무부를 자주 방문해, 혼백 특별 고문에게 임정의 신임장을 제출하는 자리에서 임정 승인을 정중히 요청했다. 혼백은 이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자 포기하지 않고, 1942년 2월 7일 Hull 국무장관에게 정식으로 신임장을 제출하면서 다시 입정 승인을 요구했다. 1943년 2월 16일 다시 헐 장관에게 “미국이 충칭 임정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 곧 소련이 ‘한반도 소비에트 코리아공화국’(Soviet Republic of Korea)를 수립할 가능성이 많다는 경고성 외교까지 했다.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세계적 차원에서 미소가 분열돼 냉전이 전개될 가능성을 예측했고, 이 예측을 미국이 받아 들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예측과 분석은 George Kennan이 전후 세계질서를 재수립하기 위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보다 더 실용적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봉쇄정책이 전후 50여 년 간 냉전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한하는데 기여했지만 이 질서를 허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국무부의 냉대를 받은 이승만은 미 군부와 직접 접촉해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전시키려고 노심초사했다. 그는 정보조정국장 William J. Donovan과 1942년 6월 연합참모부 산하 설립된 전략첩보국에 접근해 우리의 참전외교를 벌였다. 재중 25,000명의 광복군을 대일전 참전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다. 결국 소수의 한인 청년만을 투입하고, 광복군 전체를 투입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이승만은 민간 외교에 군외교(미군의 힘을 입은 광복군 대 일 침공 작전)를 동원한 하브리드 외교( hybrid diplomacy)를 구상했던 최초의 지도자다. 오늘날 모든 나라는 하브리드 외교술 개발에 애너지를 쏟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임정 승인과 주권회복 운동을 30여 년간 벌인 결과를 실패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성공적인 활동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 실패의 국면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외교 활동은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 우호적,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측면만을 보더러도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그의 외교 활동이 임정의 승인과 주권 회복 운동이 루즈벨트, 처칠 그리고 장개석에게 긍정적 인상을 미쳤기 때문에 전쟁 종료 후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 한다”는 문구가 삽입될 수 있었다. 이러한 문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장개석의 주장이 아니라 루즈벨트의 지시에 따라 홉킨스 특별보좌관이 완성한 선언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945.4.25.-6.26까지 국제연합창립총회가 열었다. 이승만은 이 회의가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임정의 승인과 주권 회복 기회로 잡았다. 그는 한국대표단장으로 임명되기 전 이미 Edward Stettinius 국무장관에게 대회 참가 승인을 신청했다. 미 국무부는 3월1일까지 유엔에 가입한 국가들만 초청한다면서 역시 거부했다, 이승만은 총회사무총장 Alger Hiss에게 한국대표단 옵서버 참관만을 허락해 달라는 요구마저 거부했다. 그 때 이승만은 1882년 조미조약과 1945 12월 발표된 카이로 선언의 기본 정신에 따라 충칭 임정 승인을 즉각 승인할 것과 회원국 가입도 동시에 강경하게 요청했다. 조미조약은 근거하면 한국과 미국은 서로 주권 독립국가로 인정한 선린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던 조약이다. 그러나 미국이 이 사실을 외면함에 따서 한국은 냉정한 국제정치 현실에 내몰렸던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조미조약을 파기한다는 선언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유엔에 가입할 자격이 원천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을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 해 5월 8일 The Chicago Tribune지에 그리고 12일에는 San Francisco Examiner지에 각각 미국이 카이로 선언 정신을 위반했다는 대단한 폭로성 기사를 기고했다. 한국 대표단의 참석 거부는 카이로 밀약에 근거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이승만은 얄타회담에서 미-영-소 정상이 한반도 문제를 놓고 밀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요컨대 그 밀약은 미-일전쟁이 끝나면 조선을 러시아의 세력권에 가둘 것이라고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이 밀약 문서를 전 소련 공산당원인 비밀 탐정원 Emile Gauvreau로부터 입수했다는 사실도 폭로해 버렸다.
국제정치는 많은 나라들이 국제법에 따라 국제질서를 지키고 협력한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너무 자주 자신의 국익을 강조한 나머지 국제관계는 얽히고설킨 쇠사슬에 얽혀 있다는 사실이 엄존하다. 즉 선의 논리보다는 악의 논리가 지배하는 장이다. 이 사실이 이승만의 30여 간의 해외에서의 외교 활동이 얼마나 긴 고통과 쓰라린 고독의 긴과정이였음을 국민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외교 투쟁사에서도 우리의 지도자들이 결정적인 위기 시에 몇 번이나 적전분열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하겠다. 반성 없는 역사는 퇴보의 역사만이 생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