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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 일부러 잠 안자고 마눌님에게 묵언의 시위, 즉 책 낼돈 달라는 행위 예술 내지 항의에 동참을 한 글.....그래도 마눌님은 요지부동이넹.
39.항주에서 가흥(嘉興)으로
항저우 만 대교 (중국어 간체: 杭州湾大桥, 정체: 杭州灣大橋, 병음: Hángzhōu Wān Dàqiáo)는 중국의 항저우 만을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일부가 사장교로 되어 있다. 2007년 6월 14일 완공되었으며, 상하이와 저장 성의 닝보 시를 연결한다. 항저우 만 대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바다를 건너는 다리이다.
2월 13일 드디어 최부 일행은 항주로부터 길을 떠난다. 북경으로 부터 어느 기별을 받았는지 적지를 않아 모르지만 서둘러 가는 길이다. 지휘첨사 양왕이 호위하여 당나귀를 타고 무림 역에서 길을 떠나 20여리쯤 가다가 성의 북문에 이르렀고 곳을 지나 오산포에 닿았다. 곳에서 배를 타기 위해 편을 나누었다. 양왕이 그 아우 양승(楊昇)과 송문위천호(松門衛千戶) 부영(傅榮), 전당사람 진훤(陳萱)과 종자 이관(李寬)·하빈(夏斌)·당경(唐敬)·두옥(杜王) 등 7·8인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최부는 배리 등과 북경 사람 이절 · 김태 그리고 허상리등이 같이 배를 탔다.
그들이 2월 14일 승덕현을 지날 때였다. 앞서 말한 대로 가는 곳의 역체에서 양식과 반찬을 제공하였다. 숭덕현에서도 충분한 양식을 주었다. 그런데 수부가 최부에게 다가와 지나온 곳에 장안역이 있었는데 알았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박식한 최부라고 하지만 남의 나라 초행길의 역을 알리가 없다. 몰랐다고 말을 하자 수부는 이는 양 지휘의 종자 진훤이 지급하는 양식과 반찬을 착복하고는 알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이는 양왕에게 직고를 하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부가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에 낄 리 없다.
2천리 넘는 긴 거리의 조운로인 만큼 상전들은 역이 하도 많아 지나친 것인지 헷갈린다는 것을 잘 아는 전문 사기꾼의 수법이다 싶다. 이렇게 빼돌리는 수법은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늘 흔한 것이란 게 오히려 내게는 친근감 있게 느껴진다. 범죄 내용은 달라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범죄 심리는 똑같다. 이 사실성이나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 현장의 낙서에서 발견된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나 인문학적으로는 일맥상통하는 동질성이 있다. 젊은이들은 늘 버릇이 없고 눈치 채지 못하면 범죄가 생기는 것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는 너무도 흔한 일이 아닌가. 인간사 속성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얄궂은 진리이기도 한 셈이다.
2월 15일 서수역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인데 역승(역장) 허룽(何榮)은 최부 일행에게 닭, 문어 등 찬거리를 보내면서 시 3수를 지어 보냈다. 최부도 이에 화답했다. 허룽은 그런데 그의 시에 조정의 낭중 기순과 행인 장근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황화집」을 지었는데 이를 조선 사람들이 화답했는데 서거정이 맨 앞에 있다고 했다. 그의 시에 명나라 황제가 조선이 어떤 곳인가 물으면 문물, 풍속이 중국과 같다고 말하겠다는 구절이 있는데 평생 처음 조선인인 그대를 만나니 정말 실감이 나고 반갑다고 했다. 말단 관리와 남루한 조선선비간의 평생 한번 뿐인 짧은 조우는「황화집」이 계기가 된 셈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편을 찾아보니 정말 중국 사신 기순이 나오고 서거정이 나온다. 어디 그 내용을 보자.
<성종 7년 병신(1476) (성화12) 07-02-16[02] 평양 선위사 임원준이 와서 복명하고 서거정이 명나라 사신에게 화답한 시를 바치다.
평양 선위사(平壤宣慰使) 임원준(任元濬)이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임원준은 원접사(遠接使) 서거정(徐居正)이 명(明)나라 사신(使臣)에게 화답(和答)한 시(詩)를 가지고 와서 바치며 아뢰기를,“명(明)나라 사신이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는데, 상사(上使)가 평양 회고(平壤懷古)의 장편(長篇)을 지어 서거정(徐居正)에게 보이니, 서거정이 즉시 차운(次韻)을 해서 바쳤습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祈順)이 말하기를, ‘재상(宰相)의 시(詩)를 짓는 것이 매우 빠르고 또 교묘(巧妙)하니, 내가 미칠 수 없습니다.’라고 했으며, 이어서 통사(通事)에게 묻기를, ‘나라 안에 이같이 시(詩)를 잘 짓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하였다.【원전】 9 집 313 면.>
그의 물음에 또 최부가 말했다. <지금 그는 의정부 좌찬성입니다.>
그는 제주라는 지방에 있고 서거정은 한양 땅에 있는데 방금 본 것처럼 어찌 그리 소상히 아는가. 이에는 또 그러한 합당한 이유가 있다. 1485년(성종 16년)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은 왕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책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동국통감』 편찬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함께 민족 문화를 정리하는 선구적인 작업으로 시작되었는데,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56권 28책으로 엮은 조선 전기 대표적 관찬 사서이다. 1458년(세조 4년) 편찬 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고기류(古記類) 이용을 거부한 신하들의 비협조로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1476년(성종 7년)에 이르러 신숙주(申叔舟, 1417~1475)•노사신(盧思愼, 1427~1498) 등이 세조 때의 원고를 수정하여 고대사 부분의 『삼국사절요』 14권으로 편찬하였다.
이 책은 『삼국사기』에 빠진 고조선사가 보완되었다. 그 후 1484년(성종 15년)에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 훈신들이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를 합하여 『동국통감』을 완성하였으나, 왕은 사림 계열 관료를 참여시켜 다시 수정하여 『신편동국통감』(56권)을 다음 해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전하는『동국통감』이다. 이로써 『신편동국통감』은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입장을 모두 반영하는 절충적인 성격의 역사서가 되었다. 그 서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주상 전하[성종]께서는 대통을 이어받고 선왕의 계책을 뒤따라서 달성군 신 서거정, 행호군 신 정효항, 참의 신 손비장, 행호군 신 이숙감, 전 도사 신 김화, 교리 신 이승녕, 사의 신 표연말, 전적 신 최부, 박사 신 유인홍 및 신 이극돈 등에게 『동국통감』을 찬수해 올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용졸하여 재주가 삼장에 모자라는데, 삼가 윤명을 받들게 되니 떨려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바로 서거정과 최부는 얼마 전까지도 같이 모여 동국통감 편찬작업을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책의 저자가 서거정(1420~1488)으로 알고 있는데 안정복은 저서 동서강목에서 저자가 바로 최부라고 고증을 했다. 그와 헤어져 최부 일행이 서수역에서 큰 다리를 지나니 바로 그곳이 가흥부였다. 최부는 도착하자마자 가흥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흥부는 곧 옛날의 유리성으로서 월나라가 오나라를 격퇴시켰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월 17일, 소주의 고소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소주는 곧 옛날 오왕 합려가 오자서에게 성을 쌓게 하여 도읍으로 정했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가흥부터서 소주에 이르는 곳은 오나라 땅이라는 것이고 오나라가 항주에서 밀고 온 월나라에게 당했다는 곳이 가흥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서 오나라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와 책사인 오자서 그리고 월나라 구천, 범려, 서시에 대헤서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오자서의 무덤은 항주 오산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최부가 오는 것을 알고 만나기를 원해 급히 달려왔으나 만나지 못하고 관직이 도급사에 이르렀던 장공이란 사람이 사는 곳이 가흥부 해염현이라는 것도 우리는 더불어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오나라와 월나라 이야기는 종지부를 찍지 않았다. 끈덕진 것이 마치 오월동주를 닮고 와신상담하여 다시 재기를 노리는 듯 미진한 구석을 마저 적게 하고 있다. 가흥(중국식으로는 자싱)은 상해에서 서남쪽으로 95km 떨어진 남호라는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인데 기원 전 시대 가흥은 오나라가 발흥한 곳이다. 오는 양자강구에 살던 만이(蠻夷)가 세운 나라로 분명 한족(漢族)과는 구분된다. 기록상으로는 19대 수몽(壽夢)에 이르러 강력한 세력이 되어 오왕이라고 칭하며 장강 중류 형주 지역에 있던 초와 경쟁했다. 그 후 50년쯤 지나 BC 514년 합려(闔閭)가 등장하자 세력의 판도는 바뀐다.
합려는 수도를 현재의 소주에 두고 초에서 망명해 온 오자서(伍子胥)를 등용하여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군사면에서는 손무(孫武)를 기용하여 강군(强軍)을 만들었다. 그는 초를 쳐서 초의 수도 영(郢=강릉[江陵])을 점령하고. 그는 회계(會稽=지금의 소흥[紹興]으로 항주의 동쪽에 있다)에 도읍을 두고 항주의 이남을 영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항주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월이 오의 도읍인 소주를 쳐들어와 합려는 초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한 채 급거 귀국하여 월을 물리쳤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원수지간(怨讐之間)이 된 것이다. 월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BC 496년에 월왕 구천(句踐)이 등장하고 나서부터다. 그는 장애가 되는 오를 쳐부수려 하였다.
오나라 합려는 초를 평정할 때 월이 쳐들어와 위험했던 때를 되씹으며 그 원한(怨恨)를 갚으려고 월로 쳐들어갔다. 그를 맞아 구천은 결사대를 편성하여 항주 북쪽의 지금의 가흥(嘉興)에서 맞아 싸워 격퇴하였다. 합려는 이 싸움에서 부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최부가 쓴 대로 가흥에서 죽는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앞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오나라 월나라는 아무튼 피눈물 나는 전쟁 끝에 부차가 자살함으로써 오는 멸망했다. BC473년의 일이다. 이후 월은 산동반도까지 진출하며 부강함을 자랑하였으나 8년 뒤 구천이 죽은 후에는 곧 쇠퇴하여 초에게 평정되고 만다. 그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싸운 것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부와 절강성(浙江省) 북부 사이의 기름진 평야 때문이다.
오월이 망하고 나니 이 지역은 한족(漢族)의 땅이 되었으나 여전히 변방(邊方)에 지나지 않았다. 한화(漢化)된 오월 사람들은 여전히 장강 이북을 중국(中國)이라 부르며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다시 한번 중원을 노리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서서 손책이 일으킨 동오였다. 오월이 활동하던 지역은 점차 한족이 이동하여 농업과 상업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신 개척지를 오(吳)라고 불렀다. 후한 말 천하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오군 부춘(富春= 지금의 항주 서남 인근의 부양[富陽])의 호족 출신인 손견(孫堅)이 천하제패의 뜻을 품고 기병하였으나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손책(孫策)이 이어받았다. 손책은 아직 16세 약관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를 닮아 뜻이 크고 호방하였지만 아버지를 잃고 날개가 꺾여 원술의 휘하에 들어가 굴종(屈從)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손책은 동오를 평정한다는 구실로 원술의 군사를 빌려서 떠났었다. 이로써 손책은 고기가 물을 만나고 호랑이가 산으로 들어간 격이 되어 이후 10년간에 걸쳐 장강 하류 지역과 전당강 이남의 해안지역까지 6군(郡)에 걸치는 지역을 평정하여 과거 오월이 나누어 쟁투하던 지역을 하나로 아울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200년 26세의 나이로 자객의 손에 죽고 나니 옛 오월의 영광은 빛을 잃고 말았다. 손책의 뒤를 이은 손책의 동생 손권은 수성(守成)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손권의 통치력도 뛰어난 것으로 수성에는 성공하였다고 보지만 중원으로 진출하려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끝까지 손권을 괴롭힌 것은 산월족(山越族)의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 월족(越族)에 대하여는 복잡한 설이 많으나 간단히 말하자면 장강 연안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에서 살던 종족으로 한족(漢族)이 아니고 베트남의 원조라고 흔히 말한다. 말도 전혀 다르다. 손권은 항주 남부의 산악지대를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그는 여세를 몰아 해안을 따라 광동성, 광서성, 복건성, 교주(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로써 현재의 중국과 같은 광대한 영토의 윤곽을 잡게 하였다.
국부(國富)로만 본다면 손권의 오가 가장 튼튼하였을 것인데 어째서 천하를 손에 넣지 못하였는가 하는 데는 이러한 사유가 있다. 그 지역은 산도 높고 계곡이 깊어 묘족이라는 소수족들도 살았고 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앞서 글에서 썼듯 동방불패가 괜히 나온 영화는 아니다. 더욱이 묘족은 행색이 묘하게 고구려 사람들을 닮았다고 앞서 또 말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삼국이 통일되는 때부터 남쪽의 만이(蠻夷)들이 한족의 문화 속으로 흡수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성 싶은데 만약 동오가 북의 조조와 맞서 장강을 사이에 두고 천하를 2분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중국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가흥은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식구들이 3년간 절체절명의 시기를 보냈던, 한국인과 중국인의 목숨을 건 우정이 녹아 있는 도시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중국침략 일본군 육군사령관을 비롯해서 주요 일본요인들을 폭살시킨 윤봉길의사 의거가 있었다.
일제는 즉시 김구선생과 임시정부를 배후로 보고 검거를 위해 날뛰었다. 김구선생에게 걸린 현상금만 지금 우리 돈으로 600억원...아마 이보다 많은 현상금을 내건 경우는 지구상에 아직 없다고 한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뜻밖의 은인이 나타난다. 중국인 저보성. 저보성의 도움으로 김구선생과 임정식구들은 4월29일과 5월1일 사이에 황급히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으로 피할 수 있었다.
김구선생은 항주로 임시정부청사를 옮기고 업무를 보게하는 한편, 동지 몇명과 가흥으로 피신했다. 저보성은 상해 법과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상해 항일단체회장, 절강성장을 지낸 유력인사였다. 상해도 일제천지여서 발각되면 목숨은 물론 가문이 쑥대밭이 될 위험이었지만 저보성은 주도면밀하게 임정식구들을 지원했다. 가흥에는 남호에 접한 저보성의 본가와 두 아들이 운영하는 종이공장, 실공장이 있었다. 당시 세계경제공항의 여파로 공장이 파산상태였지만, 임정식구들이 숨어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저보성은 일단 김구선생님을 가흥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첫째 며느리의 고향 해염의 별장으로 피신케 하고, 나머지 임정식구들을 가흥 은신처에 따로 숨겨주었다.
김구선생님은 해염 별장에서 6개월을 지내고 가흥 저보성의 둘째 아들 집으로 피신했다. 이어 저보성의 주선으로 남호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해서 지내게 된다. 도처에 암살단이 깔려있던 시기...영화 암살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다.
김구선생과 임정식구들은 3년을 숨어 지내고 1935년 남경으로 떠난다. 주애보는 남경까지 따라가 김구선생과 함께 지내다가 남경에서 헤어진다. 김구선생은 창사로 갑작스럽게 이동함으로써 제대로 고맙다는 표현도 못하고 떠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지금 가흥시에서는 김구선생님과 임정식구들의 은거지를 정비해 2005년 절강성 보호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김구선생 은거지: 매만가 76호/ 임정식구 은거지: 남문가 일휘교 17호. 그들은 빨랫줄에 속옷이 걸려 있으면 일본군이 주변에 있다는 뜻이었고 속옷이 없으면 안전하니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식으로 교신을 했다.
아울러 가흥은 마오저뚱이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지역으로 공산당이 창당된 때는 김구 선생이 가흥을 떠난 1936년이었다. 김구 선생은’백범일지’에서,
<“가흥은 산이 없으나 대신 호수와 운하가 낙지발처럼 사방으로 통하며,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과 풍속이 상해와는 딴 세상이었다. 상점은 값을 속여 받지 않고, 가게에 손님이 무슨 물건을 놓고 잊어버린 채 갔다가 며칠 후 찾으러 오면 잘 보관하였다가 공손히 내어준다”>고 기술하였다. – 매만가76호 유적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