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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절반의 목요일☆]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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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목요일]
김미연 시집 / 지성의상상시인선 012 / 지성의 상상 미내르바(2019.03.3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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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목요일
김미연
초침도 멈춘 거실
가구들이 구부려앉아 졸고 있다
슬며시 소파에 스민 봄볕이
몽롱한 오후의 발등으로 내려앉는다
수요일이 사라진 자리
내 것이 아닌 절반의 목요일이 앉아있다
반복되는 무료함에
시간의 발이 멈춰 서 있다
침묵은 이곳에서 몸을 늘린다
베란다에서 소리 없이 꽃을 피운 것들은
어느 시간의 파도를 넘어왔을까
기다림이 저 꽃대에 앉아있다
나의 기다림도 오래 묵었다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나를 빠져나가고
오늘은 내일을 향해 지워지고 있다
목요일의 몸통이 흐릿해진다
이 고요는 몇 겹일까
바깥의 소음도 고요의 근처에서 가라앉는다
청어가시
김미연
내 몸이 무덤이다
통증은 마지막 말이었다
해독하지 못한 바다의 말이 목을 붙잡는다
캄캄한 길을 차마 넘지 못해
이 한마디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파랗게 멍든 파도의 몸을 빠져나와
과메기를 흔들던 해풍이었나
녹슨 철길을 서성이던
그 밤바람이었나
촘촘한 물결을 누비다 세상의끝에서
꼿꼿한 바늘이 되어버린
거친 동해의 파도 한 줌
몸을 붙잡고 끓어오른다
짜디짠 물에도 삭지 못한 뼈 하나
자정을 흔들고 있다
언 발
김미연
저 맨발들
까맣게 점으로 번지는 순간
하늘엔 화폭이 펼쳐진다
누가 붓을 들어
저녁하늘에 점을 찍는가
저 살아 움직이는 마리, 마리, 마리
충돌도 없이 일시에 동쪽하늘 모퉁이까지
낙관을 치고 돌아온다
물갈퀴로 하늘을 휘감고 날아올라
다시 내려올 때까지
회오리다
그때 보았다
쇠기러기의 빨갛게 언 발을
저 시린 부리로 먼 길을 날아오고
또 약속을 물고
바람을 젓는 발목의 힘으로
그렇게 또 다른 국경으로
떼 지어 노 젓는 소리
하늘이 뒤로 물러선다
구두 수선집
김미연
길가
빈 평 남짓한 공간에서
터진 삶을 꿰매는 사내는
길의 신神
수선할 하루를 무릎에 엎어놓고
본드에 취한 손이 또 삶의 뒷굽을 붙이고 있다
발의 집
망치, 줄, 바늘, 못으로
헌 구두에 기록된 노장의 족적을 풀어낸다
한쪽으로 절뚝거리던 걸음은 수평이 된다
숱한 발들이 간이역을 스쳐간다
각각의 문양
어지러운 세상의 무늬가 길에 찍힌다
맞은 편 가지가 찢긴 가로수들
진물이 흐르는 살을 깁고 있다
봄의 밑단을 덧대어 몸을 수선하는
길가 나무들도
무너진 허공에 또 집을 짓고 있다
폐역廢驛
김미연
비어 있는 대합실
왁자하던 소음도 승무원도 떠난 자리
고요가 앉아 있다
녹슨 열차 시간표에 매달린
적막을 깨고
막차가 떠난 지 오래,
깨진 창으로 들어온 달빛 한 줌
밤새 서성거린다
보따리장수 아낙이 놓고 간
온기는 싸늘히 식어
첫새벽을 가르던 기적汽笛도 입을 다물었다
철로변에 흔들리던 코스모스와
배웅하던 손들이 흩어지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폐역
누군가 흘리고 간 이별 한 소절이
철길 위를 배회하고 있다
가파도
김미연
어둡고 후미진 곳에서
살을 파고 숨어드는 밤
죽은 나무 밑동에
맨살 아프게 대롱거리다가 날다가
기억의l 뒤편으로 사라지는
먹물버섯
어느 스님의 얼굴에
저승꽃으로 앉았다가
한 덩이 외로운 사리로 익어가는
밤비는 초록이다
김미연
밤비는 소리로 내린다
허공이 초록으로 젖는 시간
잠든 나무들의 눈꺼풀이 열리고 귀가 트인다
온몸으로 하늘을 흡입하는 나무들
초록을 껴입고
나무와 나무를 건너다니는
저 빗줄기들은
나이테를 돌고 돌아
나무의 심장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어디선가 달려온
어둠이 가지마다 열린다
나직이 땅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는 뿌리를 타고 올라
나무의 키를 늘린다
내게 빗금을 그은 사람도 밤비처럼 다녀갔다
새벽 두 시가 젖는다
본색本色
김미연
치자꽃이 졌다
한 며칠, 시선을 온몸에 받더니
가지마다 눈부신 흰 빛은 향기조차 말랐다
애초에 갈색은 본색이 아니었을까
흰빛은 잠깐
그 밑에 숨겨둔 조글조글한 빛을 품고
꽃은 갈색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뒤늦게 드러난 땅의 빛
꽃의 본모습
이제 꽃은 시들어
사방으로 눈빛이 흩어진다
거두어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한 그루의 향기
꽃을 다 피우고
먼 길을 떠날 노모를 닮았다
다 이룬 빛은 갈빛이다
지구는 기우뚱거린다
김미연
독주에 취한 지구의 몸이 기울어져 있다
나의 하루도 23.5도 기울어져 있다
바람의 입김만 쐬어도
한쪽으로 기운다
내 몸을 싣고 가는 신발은
한쪽 뒤꿈치가 닳아 있다
독주에 취해
한쪽으로 삐딱하게 비틀거리며
세상을 밟고 다니는 신발들이
붉은 아가리를 벌리고
토악질을 하고 있다
노란 현기증
아비의 목도 조이는 아찔한 세상
기울어진 채 돌아가고 있다
무시로 우는 달도
한 달에 한 번 기울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혈을 한다
세발가락나무늘보
김미연
거꾸로 매달린다
이 번민을, 이 생을 어떻게 비워낼까
저 아래아래 가라앉은 땅이 하늘로 보일 때
빈 허공이 되어간다
해 질 무렵까지 하나의 열매처럼
정물이 되는 것
한 점 티끌로 가기 위한 것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한 생은 쾌속으로 지나가는데,
물구나무서서
느릿느릿 몸속을 흘러 다니는 그리움을
다 쏟아내면
신선이 되는 것일까
몸에 이끼가 끼어 나뭇잎과 뒤섞인다
곡식의 싹과 같은 미소가 드리운다
시력이나 청력은 아무 소용없는 것
나무에 매달려
그냥 무심한 나무가 되고 있다
등
김미연
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생사를 넘어온 휘어진 절망을 닮았다
바닥에 엎드린 등
무릎에 얼굴을 묻었던 시간
그 이별의 흔적들이 내 뒤편에서 남아 있다
묵언의 등이 젖는다
세상은 나를 읽지 못한다
이곳까지 지고 온 길의 무게
얼마쯤 더 바닥으로 기울어야 할까
앞만 보고 살아온 시간은 다 빠져 나가고
저녁을 등에 지고 서성인다
이 무거운 하루를 어디에 부려야 하나
소리 없이
등으로 운다
바람의 모자
김미연
길바닥에 구르는 모자
비바람에 떠밀려 차도로 빨려든다
속도가 그를 향해 달려든다
누구의 지붕이었을까
그늘을 만들며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저 모자
끈을 놓치고 방황한다
바람의 완력 앞에 속수무책이다
하얀 밀짚모자에 감긴 화려한 레이스
붉은 꽃 한 송이로 한껏 멋을 낸 모자가
바닥에 떨어져 젖고 있다
꼭대기 빈 지리는 무엇으로 채웠을까
저 모자 속에 숨어 있는 비밀들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해
바닥을 치는 모자
바퀴가 뭉개고 달아난다
뿔
김미연
도축을 마친 누런 소
머리에 두 개의 뿔이 꽂혀 있다
뿔 끝에 그의 영혼이 빛나고 있다
허지만 생전에 한 번도 누구를 들이받지 못한
저 몸의 무기
세상에 대한 적의를 감춘 채
순순히 목을 내주었다
하늘엔 뜻 없는 낮달이 떠 있다
뒤늦은 후회가
저 뿔에 담겨 있을 까
뿔 속에 단단하게 굳어버린 비명이 있다
두 개의 뿔이 낮달 옆에서 흘러가고 있다
어머니의 갠지스강
김미연
갠지스강 화장터 뒷전에서 장작만 패던 그녀
비릿한 지구 한 덩이 거꾸로 퍼 올리고 있다
가까이 보이는 생生
어머니는 저잣거리애서 어느 날
부끄러움을 놓아버리셨다
평생을 이고 온
물항아리 내려놓는다
붉은 담석 덩어리 이제 흐물거린다
바라나시 기차역
몽골 사막에서 불어오는 흙바람
산 자와 죽은 자와 호흡이 뒤섞이는 것
열두 살 소녀 뱃사공은 강에 재를 뿌렸다
새벽까지 흐느끼는 강
그녀는
밤마다 죽음의 강을 건너고 있다
매달리다
김미연
모과 한 알 손을 푸는 소리
하늘에 매달린 구름이 풀어지는 소리
비의 매듭이 풀린다
바를 맞으며 모과 한 알 손을 놓는 소리
우리가 맨땅에 충돌하는 지점은 지구의 어디쯤일까
마침 우주를 떠돌던 유성 하나 발 앞에 떨어진다
오후 한 시의 잿빛 고리가 풀리고
소리만 매달린다
젖은 한쪽 어깨, 모과처럼 새콤한 기억들
빗물이 마를 때까지 나무 아래 서서
매달린 시간의 마디를 생각한다
빗물이 풀려 어딘가로 스민다
또 어디로 스미어 사라진 것인가
붙잡았던 이 세상의 인연도
어느 지점에서 풀릴 것이다
이제는 움켜쥔 것들을 놓아야 한다고
모과나무가 쿵,
노란 심장을 내려놓는 순간
세 시를 향해 미끄러진다
난蘭
김미연
하늘에서 스며온
초록빛이 무거워
난초 잎은 몸 흔들다
지쳐서 휘어지고
어젯밤 내려와
숨어 있던 달빛은
슬며시 올라와
하얀 꽃 피었네
시간의 두께
김미연
삐걱거리는 문틈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세간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마른 가랑잎이 훌쩍거리고 있다
소음도 이미
영마을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메마른 시간을 끌어안고
떠돌이 고양이 홀로 어둠을 갉아먹는다
손에 닿지 않는 과거가
저만치
숨죽이며 머물러 있다
얼룩진 벽지
시간의 비늘이 쌓여 있다
누군가 남기고 간 흔적이 한 뼘이다
대추
김미연
나날이 비어가고 있다
왁자지껄한 소문도 빠져나가고
제풀에 끓어 넘치던 열병도 사라지고
화상으로 남은 붉은 흔적
씨앗으로 여문다
비어서
가득 찬,
한 채의 집
노을 속에 영글고 있다
먼지의 부족部族
김미연
소금을 볶는다
주걱 끝에서 고통으로 빚어지는 결정체
피어오르는 사막의 냄새에
먼 나라의 아파르족*을 생각한다
수천만 년 묵은 다나킬 기슭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검은 먼지에게도 목숨을 붙여준다
겨우 태어나는 목숨의 등에 검은 땀이 흐르고
세상은 커다란 가마솥,
날마다 볶이고 튀어나가고 바스라진다
바다가 튀겨져 사막이 된 에티오피아
수분이 빠져나간
바다의 최후는 사막으로 남았다
땅이 뒤집혀 소금덩이 떨어질 때
낭떠러지에 간신히 걸린 외발에 의지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아파르족
먼지처럼 가벼운 생이 소금 알갱이처럼 짜디짜다
달빛의 덫에 걸려 울부짖는 밤
고삐에 끌려 소금 자루를 지고
모랫길 수 천리를 누비는 낙타의 등이 휜다
죽어야 빛나는 눈물
별들이 이울 때 탈진하는 낙타의 울음에 소금이 반짝인다
*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에티오피아 소금사막. 소금을 파는 ‘먼지’라는 의미를 지닌 아파르족이 산다
낯선 시간이 흐르고 있다
김미연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이물의 난간에 얹히고
위험하게 서 있는 낯선 시간
폐선 한 척
안간힘으로 흔들어댄다
몸부림칠수록 조여드는 오랏줄
노을도 이곳에서 발이 묶인다
발을 뻗어도 벗어날 수 없는
저 동그라미
텅 빈 갯벌에 지난 시간의 묵은 그림자가 널브러지고
방파제 말뚝은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뱃길이 끊어진 저 폐선,
갯벌의 무덤에 몸을 묻는다
허기진 저녁이 걸어온다
김미연
골목 모퉁이를 돌면
노파의 졸음이 걸려 있는 허름한 구멍가게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림자가
앞서 걷는다
눅눅한 그림자 한 벌 걸치고
돌아가는 시간
늦은 하루의 경계를 넘어간다
밤을 홀로 흘러가고
어둠이 외로운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공복의 저녁이 흔들린다
오늘도 조각난 꿈들이
등 뒤에 쌓이고
불 꺼진 창을 향해 걷는다
다섯 살 아이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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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나의 기다림은 오래 묵었다.
절반의 목요일이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 시를 쌓는다.
한 권의 시집을 묶는 것은
다음 시집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므로.
2019년 3월
김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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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詩集 [※절반의 목요일※]
[ 해설 ] -
존재자들의 잔잔한 슬픔을 통한
역설의 항체로서의 시쓰기
― 김미연의 시세계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 동일성과 아이러니의 균형
서정시를 창작하는 주요한 동기 가운데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확인 충동이 가장 커다랗고 직접적인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실 시쓰기에 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삶의 직접성을 노래하고 싶고, 그 흔적이나 여운이 간직하고 있는 선명한 파동을 언어로 재현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마련일 것이다. 그만큼 서정시는 내면과 대상을 언어 안에서 호헤적으로 공존시키면서 이른바 ‘동일성’의 형상을 적극 견지해가게 마련이다. 서정시가 탐색하고 실현하려는 이러한 동일성 미학은 자연스럽게 시인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깊이 의존함으로써 주체의 자기 확인 충동을 극대화해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동일성 논리가 서정시 안에서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징후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가령 우리 시대는 예측 가능한 이성적 사유와 합리적 인과론이 현저하게 힘을 잃어가고 그 대신 불확정성의 원리나 다양한 아이러니적 사유가 더 우세해지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미연 시인의 첫 시집『절반의 목요일』은 고전적 서정의 보고寶庫로 다가옴으로써, 이러한 시대 조류에 대한 강렬한 역설의 항체 역할을 하고 있는 의미 있는 결실이다. 이 시집은 서정시의 가장 근원적인 동기가 거울을 바라보는 듯한 자기 확인 충동에 있다는 점과, 그럼에도 시인이 바라보는 거울은 투명하고 밝은 것이 아니라 흐리고 어둑한 것이라는 점을 혼신을 다해 암유暗喩해 간다. 이때 그 흐린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은 나르시스처럼 매혹에 가득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때로 지극한 연민이나 갈등을 가져다주는 복합성의 표정을 띠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김미연 시인의 이번 시집을 통해 매혹적 자아 탐색의 열정과 함께 일정한 반성적 거리를 통해 모순과 맞서는 시인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순과 갈등의 이중적 의미를 표현하는 미학적 양식을 ‘아이러니’라고 할 때, 김미연의 서정시는 안정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동일성 미학과 함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균열을 포괄하는 아이러니 미학을 균형적으로 담아낸 예술적 성과인 셈이다.
2. 타자들로 이월해가는 대화적 태도
김미연 시편에서 사물들은 비교적 투명한 화음和音으로 서로 어울리면서 가볍게 출렁이고 있다. 그 출렁임은 격렬한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사물과 사물 사이를 환하게 이어주고 채워주는 파동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파동 속에서 시인은 이미 제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사물들에게 새로운 생각과 이름을 선사해주고, 그들끼리 서로 소통하게 하며 나아가 그들이 시인 자신의 경험 속에 어떻게 깃들이게 되었는가를 탐구하고 표현한다. 이때 시인이 바라보는 사물들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단자單子들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고 촘촘한 내적 연관성을 가지는 유기적 전체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그녀가 상상적으로 구성해가는 사물들의 관계는 그 자체의 합리적 인과율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적 시선에 의해 결속되어간다. 그 안에는 존재자들의 잔잔한 슬픔을 통한 역설의 항체로서의 그녀만이 시쓰기 과정이 담겨 있다.
저 맨발들
까맣게 점으로 번지는 순간
수묵화 한 폭이 떨쳐진다
누가 붓을 들어
저녁 하늘에 점을 찍는가
살아 움직이는 마리, 마리, 마리
충돌도 없이 일시에 동쪽 하늘 모퉁이까지
낙관을 치고 돌아온다
물갈퀴로 하늘을 휘감고 날아올라
다시 내려올 때까지
회오리다
그때 보았다
쇠기러기의 빨갛게 언 발을
전 시린 부리로 먼 길을 날아오고
또 약속을 물고
바람을 젓는 발목의 힘으로
그렇게 또 다른 국경으로
떼 지어 노 젓는 소리
하늘이 뒤로 물러선다
-「언 발」전문
시인의 시선은 얼어 있는 ‘맨발’을 향한다. 그 맨발들이 까맣게 점으로 번져가는 순간을 “수묵화 한 폭”이 펼쳐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누군가 붓을 들어 저녁 하늘에 점을 찍은 저 그림은, 말하자면 살아 움직이는 새떼의 비상 장면을 옮겨 적은 것이다. 서로의 어떤 충돌도 없이 동쪽 하늘 모퉁이까지 낙관을 치고 돌아오는 그네들은 ‘회오리’ 형상 그 자체다. 그런데 물갈퀴로 하늘을 휘감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지켜보던 시인의 시선에 “쇠기러기의 빨갛게 언 발”이 돌어온다. 새들은 그렇게 “시린 부리”와 ‘언발’의 힘으로 “또 다른 국경으로//떼 지어 노 젓는 소리”를 내면서 이동해간 것이다. “수묵화 한폭”을 가능케 했던 것은 그들의 시리고도 언 부리와 발이 었으니, 마치 “어느 해 겨울 같은 처마 끝/그 시린 흑적들”(「겨울빨래」)처럼, “신의 숨소리까지 들으며/우러러 하늘을 경배하는”(「고사목」) 움직임처럼, 새떼의 순간적 비상과 아름다운 비행은 우리 삶의 고단하고도 신산한 이치를 한없는 외경畏敬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생사를 넘어온 휘어진 절망을 닮았다
바닥에 엎드린 등
무릎에 얼굴을 묻었던 시간
그 이별의 흔적들이 내 뒤편에 남아 있다
묵언의 등이 젖는다
세상은 나를 읽지 못한다
이곳까지 지고 온 길의 무게
얼마쯤 더 바닥으로 기울어야 할까
앞만 보고 살아온 시간은 다 빠져나가고
저녁을 등에 지고 서성인다
이 무거운 하루를 어디에 부려야 하나
소리 없이
등으로 운다
-「등」전문
‘등’에는 바람의 흔적만 남아 있고 “생사를 넘어온 휘어진 절망”도 서려 있다. “바닥에 엎드린 등”에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던 시간”과 함께 이별의 흔적들마저 깊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세상이 읽어주지 않는 “묵언의 등”은 그 자체로, 새들어 ‘언 발’처럼, “이곳까지 지고 온 길의 무게”를 잘 보여준다. 또한 바닥을 향해 기울 대로 기운 젖은 ‘등’은 우리로 하여금 “이 무거운 하루”를 생각하게끔 해준다. 조금 확장해서 읽으면 이 작품은 ‘등’에 서린 구눈가의 꿈과 노동의 시간을 노래하고 있는데, 사실 지난 날 우리는 휘인 ‘등’에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를 지고서 검은 시간을 통과해오지 않았던가. 김미연의 시는 이렇게 소리 없이 ‘등’으로 우는 존재자들의 ‘언 발’을 생각하게끔 해준다.
이처럼 김미연의 시는 ‘언 발’과 ‘우는 등’을 통해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사물들의 긴밀하고 촘촘한 내적 연관성을 거듭 노래한다. 이때 시인이 불러내는 사물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적 시선에 의해 새롭게 배열되면서, 그녀의 발화를 단순한 독백에 멈추지 않게 하고 사물과 타자들로 한없이 번져가게끔 한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를 나타내는 언어가 본질적 언어이며 그것은 대화적 형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고, 휠라이트 또한 인간의 본질을 화자인 동시에 청자일 수 있는 가능성에 두었다. 이들은 언어의 기능을 존재의 말건넴과 소통으로 보았는데 이때 서정시는 존재의 본질과 직결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읽은 김미연의 시는 스스로 중얼거리는 독백에 갇히지 않고, 숱한 타자들로 이월해가고 그들과 소통하는 대화적 태도로 이어져간다. ‘발’과 ‘등’은 그러한 소통을 가능케 해준 신체적 매개였던 셈이다.
3. 사물들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탐색
김미연의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주제 가운데 또 하나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물들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시는 스스로의 개별적 체험에 한정되지 않고 존재 일반의 탐색이라는 보편적 성격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적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일군의 시편들도 결국은 이러한 시인의 근원에 대한 믿음과 의지가 구체적 현실 속으로 침투한 결과일 것이다. 가령 다음 작품은 이러한 균형 감각이 뜻깊게 실현된 실례일 터인데, 시인이 탐색하고 꿈꾸는 존재자들의 근원이 어떠한지가 그 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 사물들의 존재 형식은 낡아가고 사라져가는 ‘폐허’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비어 있는 대합실
왁자하던 소음도 승무원도 떠난 자리
고요가 앉아 있다
녹슨 열차 시간표에 매달린
적막을 깨고
막차가 떠난 지 오래
깨진 창으로 들어온 달빛 한 줌
밤새 서성거린다
보따리장수 아낙이 놓고 간
온기는 싸늘이 식어
첫새벽을 가르던 기적汽笛도 입을 다물었다
철로변에 흔들리던 코스모스와
배웅하던 손들이 흩어지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폐역
누군가 흘리고 간 이별 한 소절이
철길 위를 배회하고 있다
- 「폐역廢驛」 전문
이제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廢驛’에는 텅 빈 대합실을 중심으로 더없는 고요가 내려앉아 있다. 승무원도 떠난 자리에는 녹슨 시간표와 막차가 떠난 시간만이 오랜 적막으로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깨진 창으로 들어온 달빛 한 줌”은 달리던 “첫새벽을 가르던 기적汽笛”의 역상逆像으로 다가온다. 철로변 코스모스와 누군가를 배웅하던 손들도 다 흩어지고 이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폐역”에는 “누군가 흘리고 간 이별 한 소절”만이 낡아가는 철길 위를 떠돈다. 시인은 한때 웅성거리고 붐볐을 속도의 시간 위에 누구도 보이지 않는 고요의 시간을 얹으면서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지는”(「가파도」) 사물들의 존재 형식을 음각으로 부조浮彫gorks다. 그것은 ‘언 발’이나 ‘우는 등’처럼,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필연적 뒷모습이자, “시간의 몸에서 떨어진”(「먼지의 두께」) 순간들의 상상적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깊은 굴에서 캐온
검은 쌀로 우리는 배를 채웠다
곡괭이가 드릴로 바뀌는 동안
아버지의 가슴에는 얼룩진 소음이 차오르고
한 장 한 장 매장된 어둠을 캐낼 때마다
우리의 책가방도 함께 자랐다
내가 읽은 글자들도 검은빛
세상을 이룬 빛은 모두 어둠 속에서 태어났다
검은 재와 기침 소리가 들리는 문서 한 장에는
찬바람만 불고
인연 하나 새겨진 말뚝 하나 서 있는
그 황량한 아버지의 땅
일생 혼자 살다간 갱도에는 검은 발자국조차 없다
횅한 가슴을 안고
다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간 아버지
내게 폐허 한 장을 남기고 갔다
-「폐허」 전문
이번에도 어김없는 ‘폐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폐허 한 장”은, 앞에서 읽은 ‘폐허’처럼, 한때는 역동적이었지만 이제는 사라져간 어떤 ‘중심’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곳에는 ‘굴/곡괭이/드릴/소음/재/기침 소리/갱도/어둠’으로 현상되던 현장성과 ‘검은 쌀/책가방/글자들/문서’로 번져가던 화자 자신의 뚜렷한 성장사가 선연하게 담겨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한 장 한 장 매장된 어둠을 캐낼 때마다” 시간은 흐르고 “책가방”은 자라고, 화자는 “세상을 이룬 빛은 모두 어둠 속에서” 태어났음을 천천히 온몸으로 기록해간 것이다. 이제 “인연 하나 새겨진 말뚝 하나”서 있을 뿐인 “황량한 아버지의 땅”에는, 검은 발자국조차 없고, “다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간 아버지”의 흔적만 ‘폐허’처럼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게 아버지가 남긴 “폐허 한 장”은 소멸해간 시간을 환기하기도 하지만, 화자의 생을 이끌어온 새로운 창신創新의 모토母土를 함의하기도 한다.
마당 뒤꼍
시간에 삭아가는 저 싸리비
헛기침으로 마당에 고인 새벽을 밀어내더니
어둑어둑 늙어간다
한때는 골목을 끌고 큰길까지 나서던 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벌떡, 일어섰다
그 숱한 아침을 어디에 두고
저리 어깨가 초라할까
눈비에 젖은 노숙의 잠
사계절을 쓸어 담은 밑바닥 인생이다
돌담에 기댄 각도가 위태롭다
싸리꽃 피던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노끈이 풀리고
뼈만 남아 고요하다
-「싸리비」 전문
마당 뒤꼍에서 삭아가는 ‘싸리비’역시 사라져가는 것들의 위의威儀를 잘 보여준다. “한때는 골목을 끌고 큰길까지 나서던 힘”을 가졌지만 이제는 “마당에 고인 새벽”을 밀어내면서 어둑어둑 늙어가는 ‘싸리비’는, 초라한 어깨를 한 채 “눈비에 젖은 노숙의 잠”을 비치는 “밑바닥 인생”으로 은유되고 있다. 이제는 돌담에 위태로운 각도로 기댄 채 “뼈만 남아 고요”한 날들을 견디고 있는 그 형상은, “고단한 잠을 골목에 부려놓은 노인”(「골목의 달」)처럼, “깊게 파인 주름의 계곡”(「재래시장」)처럼, 마지막 잔광殘光을 비추는 존재자들의 위엄이 서린 마지막 순간을 보여준다. 그렇게 시인은 존재자들의 잔잔한 슬픔을 담아냄으로써 “침묵에도 녹이 슨”(「폐차」)것들이나 “뱃길이 끊어진 저 폐선”(「폐선」)들도 모두 삶의 보편적 형식을 보여주는 실례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어떤 사물도 도구적 이성이 서열화하는 합리성과 효율성의 기준에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때 합리성과 효율성은 그 자체의 물질성으로 인해 맹목의 가속도가 붙게 되고, 주체가 대상을 통해 환기하는 심미적 감각은 그러한 합리성과 효율성 아래 복속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관행 안에서 우리는 존재 자체와 온전하게 만날 수 없고, 폐허의 상태는 근원으로 충만한 가능성의 공간으로 읽혀지지 않고 결핍과 불모의 상관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김미연 시인은 역설의 독법讀法으로 그 폐허들에서 비록 “깊이를 알 수 없는/허무”(「골다공증」)를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 안에서 사물들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탐색을 수행해간다. 사라져감으로써 항구적인 기억을 남기는 어떤 구체적 시공간을 회억回憶하면서, 소중한 이들의 삶과 노동을 아름다운 순간들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4. 구체적 삶의 실감을 통한 성찰의 자세
재차 강조하지만, 김미연의 시에서 사라져감으로써 슬픔을 남기는 존재자들은 격정적 비극성이나 감정 과잉의 감상성을 결코 동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차분하고 관조적인 성찰적 성격이나 타자들을 향한 연민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우리는 인간 존재를 향한 시인의 가없는 사랑의 반영으로 그 슬픔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김미연 시에서 ‘슬픔’이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인이 사물에 부여하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개재하는 모든 친화적 정서나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상한다. 이처럼 김미연 시학의 중심은 슬픔과 사랑 안에서 수행해가는 성찰의 자세에서 발원하고 또 완성되어간다.
길가
반 평 남짓한 공간에서
터진 삶을 꿰매는 사내는
길의 신
수선할 하루를 무릎에 엎어놓고
본드에 취한 손이 또 삶의 뒷굽을 붙이고 있다
발의 집
망치, 줄, 바늘, 못으로
헌 구두에 기록된 노정의 족적을 풀어낸다
한쪽으로 절뚝거리던 걸음은 수평이 된다
숱한 발들이 간이역을 스쳐간다
각각의 문양
어지러운 세상의 무늬가 길에 찍힌다
맞은편 가지가 찢긴 가로수들
진물이 흐르는 살을 깁고 있다
봄의 밑단을 덧대어 몸을 수선하는
길가 나무들도
무너진 허공에 또 집을 짓고 있다
-「구두 수선집」 전문
“길가/반 평 남짓한 공간”에 터를 잡은 “발이 집=구두 수선집”에는 한 사내의 오래고도 지속적인 노동의 삶이 녹아 있다. 시인은 그 사내를 “길의 신”이라고 명명하거니와, 그에게는 많은 사람들의 수선해야 할 삶의 뒷굽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망치, 줄, 바늘, 못”같은 소도구들은 “헌 구두에 기록된 노정의 족적”을 풀어내면서 절뚝거리던 걸음들을 어느새 수평으로 만들어낸다. 이 균정均整의 노동을 통해 사내는 숱한 발들이 “각각의 문양”을 얻어 다시 어지러운 세상의 무늬를 길에 찍게끔 만들어준다. 이렇게 고단하지만 쉼 없이 지속되어가는 사내의 노동은 “느린 저 걸음”(「자벌레」)으로 궁극에는 “나이테를 돌고 돌아/나무의 심장으로 가는 길”(「밤비는 초록이다」)에 들어서는 이들의 실존적 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다시 길 위로 나선 이들의 “생생한 첫 울음”(「蓮, 아라가야를 품다」)이 역설적으로 녹아 있을 것이다.
초침도 멈춘 거실
가구들이 구부려 앉아 졸고 있다
슬며시 소파에 스민 봄볕이
몽롱한 오후의 발등으로 내려앉는다
수요일이 사라진 자리
내 것이 아닌 절반의 목요일이 앉아 있다
반복되는 무료함에
시간의 발이 멈춰 서 있다
침묵은 이곳에서 몸을 늘린다
베란다에서 소리 없이 꽃을 피운 것들은
어느 시간의 파도를 넘어왔을까
기다림이 저 꽃대에 앉아 있다
나의 기다림도 오래 묵었다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빠져나가고
오늘은 내일을 향해 지워지고 있다
목요일의 몸통이 흐릿해진다
이 고요는 몇 겹일까
바깥의 소음도 고요의 근처에서 가라앉는다
-「절반의 목요일」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이 시편은 공간을 실내로 옮겨 “초침도 멈춘 거실”을 향하고 있다. 봄볕이 가구들과 소파를 몽롱하게 적시는 오후에 시인은 “내 것이 아닌 절반의 목요일”을 느끼고 있다. 반복과 순환의 속성을 지닌 “시간의 발”은 내려앉은 침묵과 함께 이곳에 있다. 베란다에 핀 꽃들도 이러한 시간의 파도를 넘어왔을 것이다. 오래 묵은 기다림이 시인에게나 꽃들에게나 다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절반만 남은 고요가 주변의 소음마저 가라앉히면서 스르로를 지탱해가는 것을 한껏 느끼면서, 일상의 리듬에서 느런하게 반복되는 고요와 침묵 그리고 새삼 우리 삶을 가능케 하는 “시간의 발”을 사유한다.
이처럼 ‘구두 수선집’이나 시인의 ‘거실’은 모두 사물과 내면이 접점을 이루면서 만들어내는 역동적 생성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시인은 객관적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되 그것의 속성 자체보다는 사물이 주체의 내면과 형성하는 유추적 연관성을 일관되게 탐색해간다. 따라서 그것은 눈 밝은 이가 행하는 세계 소묘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간접화하여 드러내는 내밀한 고백이기도 하고, 세계를 향해 자기를 내미는 일종의 자기 개진이기도 하다. 이러한 풍경들은 시인의 풍부하고 다양한 의장意匠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삶의 비의秘義에 대한 시인의 회감回感과 경험이 일관되게 담겨 있다. 더구나 시인의 돌연하고도 내밀한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는 몇몇 시편은, 그야말로 존재가 스스로를 표상하고 견뎌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각인하고 있다. 결국 이번 시집은 시인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슬픔과 영혼의 자의식이 표출되고 있는 역동적 성취로서, 구체적 삶의 실감을 통한 이러한 성찰의 자세는 존재자들의 잔잔한 슬픔을 통한 역설의 항체로 그녀의 시를 인도해가는 것이다.
5. 이방의 타자들을 통해 불러보는 자성적 노래
김미연 시인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오랫동안 응시해온 대상들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러한 응시와 성찰의 과정에서 시인의 시선은 대상에 대한 연민의 순간과 조우하곤 한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주위에 있는 소소한 것들의 순간성 속에서 미美의 근원을 찾기도 하고 시의 존명存命가능성을 궁구하기도 한다. 신神은 세목細目속에 깃들인다는 말이 있거니와, 이번 시집이 대상으로 삼은 소재들은 그야말로 소외되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신성한 기운을 띠고 있는 이역異域의 타자들로 나타난다. 그녀는 시는 스스로 겪어온 시간에 대한 경험 형식에 이역에서 바라본 구체적 시공간을 겹쳐 놓음으로써 가장 오래고도 아스라한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해 성찰해가는 것이다.
그녀는 평생 빨래만 한다
비누 거품이 피어오를 때마다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오물은 온 육신을 적시고
비대한 브라만, 그 사타구니의 악취가
아픈 하늘로 피어오른다
죽음의 계곡이 보이는 강 건너 저쪽
야위어 비틀어진
지뗀드라의 삭정이들이 허리를 굽힌다
바위에 널어놓은 빨래들 위로
쏟아져 내리는 별의 똥들
검은 어깨가 출렁이며 부서질 때마다
저승의 습윤한 바람을 타고
붉은 박쥐가 나른다
풀잎처럼 휘청거리던 목숨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또 바위에 내려친다
-「뭄바이 빨래터에서」 전문
“새벽까지 흐느끼는 강”(「어머니의 갠지스 강」)에는 대대손손 빨래만 하는 인도 여성들이 있다. 그녀들은 “비대한 브라만, 그 사타구니의 악취”와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오물”을 견디면서 야위어 비틀어진 삭정이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녀들의 “풀잎처럼 휘청거리던 목숨”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시쓰기가 불모와 폐허의 삶에 대한 증언과 기록임을 잊지 않는다. 그 점에서 ‘시인’이란, 오랜 삶의 흔적을 순간적 함축 속에서 발화하고 구성함으로써 이 불모와 폐허의 시대를 견디게 해주는 사람이다. 결국 ‘지뗀드라’의 삶은 “짜디짠 물에도 삭지 못한 뼈 하나”(「청어가시」)만으로 “메말라 단단해진 것들”(「늦가을」)을 안고 “어디쯤 떨어져 흙이 되어버린/한 줌의 울음”(「둥지」)에 가닿는다. 그녀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물이 되는”(「세발가락나무늘보」) 순간을 보여준다.
소금을 볶는다
주걱 끝에서 고통으로 빚어지는 결정체
피어오르는 사막의 냄새에
먼 나라의 아파르족을 생각한다
수천만 년 묵은 다나킬 기슭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검은 먼지에게도 목숨을 붙여준다
겨우 태어나는 목숨의 등에 검은 땀이 흐르고
세상은 커다란 가마솥
날마다 볶이고 튀어나가고 바스라진다
바다가 튀겨져 사막이 된 에티오피아
수분이 빠져나간
바다의 최후는 사막으로 남았다
땅이 뒤집혀 소금덩이 떨어질 때
낭떠러지에 간신히 걸린 외발에 의지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아파르족
먼지처럼 가벼운 생이 소금알갱이처럼 짜디짜다
달빛의 덫에 걸려 울부짖는 밤
고삐에 끌려 소금 자루를 지고
모랫길 수 천리를 누비는 낙타의 등이 휜다
죽어야 빛나는 눈물
별들이 이울 때 탈진하는 악타의 울음에 소금이 반짝인다
-「먼지의 부족部族」 전문
에티오피아 소금사막에는 ‘먼지의 부족’인 아파르족族이 살아간다. “고통으로 빚어지는 결정체”인 소금은 아파르족의 가파른 삶을 생각하게끔 한다. 가령 시인에게는 “수천만 년 묵은 다나킬 기슭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검은 먼지에게도 목숨”을 붙여준 세월이 떠오르기도 하고, “수분이 빠져나간/바다의 최후”가 사막으로 남은 “낭떠러지에 간신히 걸린 외발에 의지하며/목숨을 부지하는 아파르족”이 환기되기도 한다. 그들의 생은 소금 자루를 지고 모랫길을 누비는 “낙타의 등”처럼 휘인 채, “죽어야 빛나는 눈물”차람 반짝이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생생한 장면들을 통해 그들의 “통증은 마지막 말”(「청어가시」)이고 그들의 “투명한 울음소리”(「수인囚人」)는 가장 빛나는 눈물임을 일체의 과장 없이 기록해간다.
이렇듯 김미연 시인에게 이방으로의 여행은 일상에 무심히 길들여진 자신을 성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사물과 풍경을 이방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고 과잉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해주는 실천적 행위가 된다. 또한 그것은 순수 원형의 풍경 혹은 풍속의 속살들을 만나는 존재 전환의 제의祭儀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작시법이 현실과 날카로운 대결의 자장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현실의 핵심적인 소용돌이로부터 한 발 비켜서면서 자신까지 반성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노래를 불러간다. 따라서 그녀의 시는 서정시의 일반 문법인 주체와 외계의 융합이라는 고전적 명제에 합당한 실례로 읽을 만하고, 존재자들의 잔잔한 슬픔을 통하 역설의 항체로서 다가온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김미연의 첫 시집은 사물을 응시하고 바라보면서 사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살아 움직이게 하고 그것을 시인 내면과의 상관물로 저극 유추하게끔 하고 있다. 일상을 구성하는 삶의 형상들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의 빛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선명한 개체성과 그리움의 힘을 가지고 세계의 실상과 마주해간다. 이러한 구체성과 현재성이 말하자면 김미연만의 근원 지향성과 깊이 연관되는 것이다. 소망하거니와, 김미연 시인은 이러한 뚜렷한 성과를 갖춘 첫 시집을 지나 더욱 활달하고 심미적인 다음 세계로 건너갈 것이다. 스스로도 “한 권의 시집을 묶는 것은/다음 시집을 위한/새로운 시작”(「시인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시집은 그러한 미학적 진경進境으로 나아가는 매우 중요한 첫 표지標識로서 잔잔하게 기억되고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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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김미연 시인은 정태靜態의 사물을 관조적을 시각으로 대하면서 그 본질을 꿰뚫어보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시인이 정태의 사물, 일테면 ‘새잎’ ‘목요일’ ‘찬밥’ ‘점퍼’ ‘청어가시’ ‘언 발’ ‘싸리비’ 등에서 뽑아내는 것들은 우리네 삶의 원리와 진실이다. 그러니까 그 작은 정태의 사물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인생’을 예민한 감각으로 찾아내는 일이 곧 그의 시작詩作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를 처음 대할 때는 직관에 의해 손쉽게 쓰여진 듯 보이지만 다시 읽으면서 음미해 보면 한 편 한 편에 많은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고심과 번뇌가 여러 밤을 지새우게 했을 것이고 되풀이되는 퇴고의 노고가 또한 있었으리라. 그것이 이렇듯 뜻 깊고 단아한 시편들을 탄생케 한 원인일 것이다.
― 문효치( 시인. 미네르바 대표)
김미연 시인의 첫 시집『절반의 목요일』은 고전적 서정의 보고寶庫로 다가옴으로써, 이러한 시대 조류에 대한 강렬한 역설의 항체 역할을 하고 있는 의미 있는 결실이다. 이 시집은 서정시의 가장 근원적인 동기가 거울을 바라보는 듯한 자기 확인 충동에 있다는 점과, 그럼에도 시인이 바라보는 거울은 투명하고 밝은 것이 아니라 흐리고 어둑한 것이라는 점을 혼신을 다해 암유暗喩해 간다. 이때 그 흐린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은 나르시스처럼 매혹에 가득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때로 지극한 연민이나 갈등을 가져다주는 복합성의 표정을 띠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김미연 시인의 이번 시집을 통해 매혹적 자아 탐색의 열정과 함께 일정한 반성적 거리를 통해 모순과 맞서는 시인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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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시인∥
∙ 국문학 박사(동국대)
∙《월간문학》문학평론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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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The Thorn Birds Theme - Henry Mancini / 가시나무새(TV) The Thorn Birds (1983)
제작 1983년 (Mini) , 미국 // 감독: Daryl Duke // 음악 : 헨리 맨시니 (Henry Mancini)
#출처: 관악산의 추억( http://cafe.daum.net/e8853/MVDb/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