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방향
이승애
먼 산등성이로
해가 넘어간다
일찍 집을 나선 새벽이 그 사이 늙어
서쪽하늘에 붉은 발자국을 찍으며
집으로 가고 있다
지친 몸을 흔들리는 허공에 묶고 꾸벅꾸벅 졸거나
휴대폰에 코를 박고 앉거나 서 있어도
참,좋구나 저녁이란 말
퇴근이란 말
각자의 아침을 매고 나온 사람들
빌딩 숲 어디쯤 짐을 부려놓고 오는 것일까
미로를 헤매고 먼 길에 절뚝이며
출구를 찾던 하루가 묵묵히 마스크 속에
입을 숨기고 말을 삼켜도
집이 다가올수록, 숨이 트인다
차창을 넘어온 금속성의 날카로운 바퀴소리도 귀에 걸치고
금세 겉잠이 드는 도시의 유목민들
따끈한 밥상과
어딘가에 발을 뻗고 잘 방 한 칸이 있기에
모두 연어 떼가 되어
오던 길 거슬러 가는 중이다
이내 멀어지거나 우르르 다가오는 낯선 얼굴들
저녁에 승차해서 모두 한 방향으로 달린다
역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어둠이 짙어진다
멀거나 가깝거나
모든 저녁은 기다림을 향해 저물어 간다
---{애지}, 2024년 여름호에서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어야 하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어야 한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어야 하고, 어렵고 힘든 노동이 있으면 즐겁고 기쁜 휴식이 있어야 한다. 자연의 이치는 이처럼 모든 사물들의 질서와 균형을 잡아주며, 상호간에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
이승애 시인의 [저녁의 방향]은 “참, 좋구나 저녁이란 말/ 퇴근이란 말”에서처럼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자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회인들, 즉, “도시의 유목민들”의 삶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으며, 피곤하고 지친 육체를 씻고 너무나도 산뜻하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집은 모든 꿈과 행복이 자라나는 신화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집, 즉, 보금자리란 최초의 시원의 장소이자 우리들 모두가 다같이 하늘나라로 돌아갈 장소라고 할 수가 있다. “일찍 집을 나선 새벽이 그 사이 늙어/ 서쪽하늘에 붉은 발자국을 찍으며/ 집으로 가고 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어느 누구도 집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먼 산등성이로/ 해가 넘어”가면 일찍 집을 나선 사람들이 그 사이 늙어 서쪽하늘에 붉은 발자국을 찍으며 집으로 가고 “각자의 아침을 매고 나온 사람들”은 “빌딩 숲 어디쯤 짐을 부려놓고 오는 것일까”라고 이승애 시인이 묻고 있듯이, 일터에서의 삶이란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고, 이 사건과 사고의 삶 속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차창을 넘어온 금속성의 날카로운 바퀴소리도 귀에 걸치고/ 금세 겉잠이 드는 도시의 유목민들”이란 이 일터에서 저 일터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하지만, 그러나 “따끈한 밥상과/ 어딘가에 발을 뻗고 잘 방 한 칸이 있기에/ 모두 연어 떼가 되어/ 오던 길 거슬러 가는 중”인 것이다.
이승애 시인의 [저녁의 방향]은 미로에서의 탈출이며, 영원한 안식처로 향한다. 우리가 최초로 태어나고 자란 곳도 집이고,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천륜을 맺어준 곳도 집이다. 잠을 자고 꿈을 꿀 수 있는 곳도 집이고, 밤하늘을 연구하고 우주왕복선을 띄울 수 있게 해준 곳도 집이다. 집은 모든 영웅신화의 산실이며, 우리가 그 영웅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살다가 모든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곳도 집이다. “이내 멀어지거나 우르르 다가오는 낯선 얼굴들”도 집으로 가고, “저녁에 승차해서 모두”들 다같이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
집은 나와 우리 가족, 아니, 우리 모두의 안식처이며, 우주적인 꿈과 행복의 발사기지라고 할 수가 있다. 제우스가 돌아가는 곳도 집이고, 아프로디테가 돌아가는 곳도 집이다. 천마 페가수스가 돌아가는 곳도 집이고, 천하제일의 바람둥이가 돌아가는 곳도 집이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꿈을 꾸고, 호머라는 별을, 베토벤이라는 별을, 파블로 피카소라는 별을, 단군이라는 별을, 세종대왕이라는 별을, 아인시타인이라는 별을, 니체라는 별을 쏘아올린다.
집이 다가올수록 숨통이 트이고, 더없이 달콤한 잠과 아름답고 멋진 꿈들이 쏟아진다.
모든 [저녁의 방향]은 우주적인 꿈과 행복의 발사기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