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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하나님의 임재(臨在) / 시편 22: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하나님의 임재 (시편 22:3) -마경훈목사 (youtube.com)
오늘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제가 약 10년 전에 한 ‘하나님의 임재’라는 설교를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임재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 중 일부를 보겠습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 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 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 곳에 오셔서 이 곳에 앉으소서/ 이 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 곳에 있습니다.”
요즘 기독교에서는 임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임재가 중요합니다. 찬송을 해도 그 찬송에 주님이 임재 하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잘 준비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실패한 예배입니다. 생일잔치에 주인공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찬양, 임재가 없는 기도, 임재가 없는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세 가지 면을 다룹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의 뜻을 살펴봅니다. 둘째, 임재의 결과입니다. 셋째 어떻게 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가를 나누겠습니다.
1. 임재란 무엇인가?
임재라는 말은 한문의 뜻을 풀면 임할 임(臨)자에 있을 재(在)로 ‘임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단체나 어느 장소나 공간에 특별하게 임하셔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찬송 중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 ‘계신다.’는 말이 하나님이 임재 하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야샤브’라는 말인데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하나님이 임재를 잠간씩 체험합니다. 찬송하는 중에 한 소절 정도 체험하기도 하고, 기도 중에 잠시 체험하기도 합니다. 좀 강하면 예배를 드리는 내내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면 임재가 사라지고, 교회에서 나가면 임재가 사라지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임재가 계속 되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1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 1년간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 된 것이고, 1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10년간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 된 것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무드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에녹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임재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임재로 시작해서 임재로 끝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들과 에덴동산에서 함께 하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자기 백성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2. 임재의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후에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임재’라는 단어가 겔 37:1에 한번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임재 하셨습니다. 여기서 임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야’라는 단어인데 뜻은 ‘~이 일어나다, ~이 되다, ~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뭔가가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면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 어떤 존재로 변화됩니다.
겔 3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에스겔을 통해서 마른 뼈가 서 일어난 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임재 하셔서 마른 뼈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른 뼈가 큰 군대를 이루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LPG 가스가 새면 가스가 새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 수 있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냄새로 알게 됩니다. 원래 LPG 무색무취입니다. 냄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스 회사에서 가스가 새는 것을 알게 하려고 LPG에 암모니아가스를 함께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스가 새는 것을 냄새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임재 후에 나타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나타는 결과 혹은 현상을 나누겠습니다.
1)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담대해집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순교자들은 사자의 밥이 되는 순간에도 담대했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담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약 30m에 육박하는 신상을 만들어서 두라 평지에 세웠었습니다. 그리고 낙성식을 하면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음악 소리에 맞춰서 그 신상에게 절을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운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그들은 왕 앞에 서야 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다시 음악 소리가 날 때 절하면 좋지만 만일 절하지 않으면 즉시 그들을 풀무불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실 것이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자기들은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화가 난 느부갓네살 왕은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게하고 그들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풀무불 속에 들어간 사람은 셋이었는데 네 사람이 풀무불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주님께서 믿음을 지킨 그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은 그들이 풀무불 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그들은 왕의 불호령 앞에서도 담대했고, 풀무불 앞에서도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당했습니다. 의지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담대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대환난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 시대에 대환난이 찾아온다면 믿음을 지키고 환난을 잘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환난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시 23:4에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면 담대합니다.
2)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기쁨이 넘칩니다.
고김기범 장로님이 살아계실 때에 장로님 댁에 불이 났습니다. 하루는 경비 아저씨가 강윤정 권사님에게 웃고 다니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불이 났는데 웃고 다니면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불이 난 후에 강권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답니다. “기뻐해라” 그래서 기쁘게 다니다보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나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니 울어야 할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시 16:11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의 앞과 주의 오른쪽은 하나님의 임재 앞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니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3)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구원을 받습니다.
출 3장에 보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괴로워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려가시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하시니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압제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하시기 위해서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때문에 영혼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환경에서 구원, 질병에서 구원, 악인들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님께서 가시니 물이 포도주로 변화 되었습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대학 다닐 때 시험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두 시간동안 학생들은 머리를 짜내어 답안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이런은 딱 한 줄로 짤막하게 답을 적었습니다. “물이 그를 창조한 주인을 만나매 얼굴이 붉어졌더라”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듯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후 5:17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면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헌 것을 고치는 변화가 아닙니다. 고장 난 자동차를 수리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자동차가 생기는 변화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삼상 10:6입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사울에게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사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인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없습니다.
5)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형통합니다.
창 39장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디발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23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형통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결과가 형통이라면 형통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왕자가 산에서 사냥하다가 크게 다쳤는데, 나무꾼이 잘 보살펴주어서 궁궐로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왕이 고마워서 나무꾼을 불러서 무엇을 해줄까 물었습니다. 나무꾼은 “다른 것을 필요 없고 임금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룻밤만 주무시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이 나무꾼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라에서 나무꾼이 사는 동네 길을 넓히기 시작하고, 그의 집을 새로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사용할 모든 침구도 준비하고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음식재로도 준비했습니다. 임금님이 임재 하려고 하니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형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형통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형통은 만사가 자동문이 열리듯이 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종살이를 하면서 형통했고 옥살이를 하면서 형통했습니다. 형통이란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6)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만사가 속성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때로는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출 13:21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증거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롬 8:14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며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아주 큰 영향력을 끼친 어거스틴(Augustine)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어거스틴이 설교 부탁을 받고 낯선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모르는 그는 길을 잘 알고 있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내자는 어거스틴을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안내자가 어이가 없어서 한 말입니다. 그는 그 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다른 곳으로 온 것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그 날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을 뻔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대적들이 숲속에 숨어 어거스틴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시고 어거스틴을 다른 길로 인도하셔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우리는 그 때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임재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7)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승리합니다.
사 41:10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11-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승리 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사람들에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자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들은 패배하여 사라져버리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 됩니다. 그들은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은 존재들이 되고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자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면 승리합니다.
초등학교에서 반별로 축구 대회를 합니다. 그런데 한 반에 이강인 선수가 들어갔다고 가정합시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어느 반이 이길까요? 당연히 이강인이 들어간 반이 이기죠. 이강인의 임재가 그 반을 승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임재 하셔서 나와 동행하신다면 나의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우리의 3대 적은 마귀와 세상과 육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면 마귀도, 세상도, 자기 자신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의 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사는 영적 전쟁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임재 하시는 하나님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사십시오. 승리할 것입니다.
3.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가?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의 몸에 성령님의 임재가 시작 됩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틈이 있으면 강제로라도 밀고 들어가서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면 그 때 들어오십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요 1:12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권사님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천국에 가실 것을 확신하고 소망을 가지고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에게 “애들아! 예수님 잘 믿어라. 나는 천국에 간다. 천국에서 만나자!” 이런 유언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원망하며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이 맨붕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복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지 복이 없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겁니다. 아무나 믿는 것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이어야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편에서는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기도 중에 임재하십니다.
출 3:8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7절에 보면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이유를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재 하셨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어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야곱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기도할 때 야곱에게 임하셨습니다.
금년도 우리 비전교회의 주제 성구는 시 105:4입니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여호와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두 세 사람이 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강하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찬송 중에 임재하십니다.
시 22:3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우리가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임 중에 임재 하십니다.
제가 10년 전에 전라도 고흥군에 있는 익금화평전원교회에서 브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곳을 담임하시는 목사님은 천상식 목사님이십니다. 약 1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인데 주변의 몇 교회들과 교통을 잘 해서 마지막 날에는 60-70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이 집회에서 들은 간증입니다. 가까운 곳에 도천 한마음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은 권영홍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께서 혼자 2013년 여름에 4개월 동안 사택과 교회를 건축하셨습니다. 그 교회가 교인은 2명이지만 목사님은 빔 프로젝트가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셨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함께 찬송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2시간을 찬송 하는데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니 천상식 목사님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천목사님은 돈이 하나도 없지만 본인이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천상식 목사님이 평상시 알고 지내던 분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본인이 3년간 매달 몇 만원씩 저금을 했는데 그 돈을 보내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송금된 돈이 120만원이었고 프로젝트는 100만원짜리이지만 권목사님이 20만원을 하겠다고 해서 천상식 목사님은 80만원을 지불했습니다. 40만원이 남아서 그 돈으로는 자동차를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찬송 중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최낙중 목사님께서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찬송의 능력을 체험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성탄 새벽송을 돌다가 무당집 앞에서 찬송을 했습니다. 그 때 안에서 굿을 하던 무당 둘이 쓰러지고 이에 놀란 집 주인 무당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찬송 중에 임하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임재 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자동차에 운전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삼손은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힘의 비결은 성령이셨습니다. 성령이 삼손에게 머무실 때는 삼손에게 엄청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삼손을 떠나시니 삼손은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적들에게 잡혀 눈이 뽑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 생활은 가짜입니다. 믿음도 가짜고, 기도도 가짜고, 예배도 가짜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생겼다고 사람이 아닙니다. 그 속에 영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사람에게서 영이 떠나면 시체입니다.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한 평생 선교사로 일했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교회를 들락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세례도 받고 정식으로 믿고 싶습니다. 성경을 몇 번 읽어야 됩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대답했습니다. “촛불이 언제부터 빛이 나나?”, “심지에 불을 붙여야 빛이 나는 것이죠.”, “마찬가지네. 성령의 역사가 자네 마음속에 역사할 때에 그때부터 온전한 교인이 되는 것이네.” 옳은 말입니다. 수십 년을 교회 다녀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온전한 교인이 아닙니다. 단 며칠을 다녀도 성령님이 역사하면 진짜 교인입니다. 은사나 능력 그리고 어떤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진짜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임재 하십니다.
5) 하나님은 깨끗하면 임재 하십니다.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시 24:3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으냐?라는 질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할 수 있으냐?입니다. 4절에 답이 나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깨끗한 사람입니다.
출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 33:3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들에게 임재 하십니다.
똥이 묻어 있는 사람에게는 파리가 오겠지요. 꽃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벌과 나비가 오겠지요. 죄가 있는 곳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죄를 처리 받아서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임재 하시기 전에 먼저 백성들의 정결함을 요구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십계명을 받기 전에 목욕하고 정결하게 준비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개혁 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많이 들립니다. 저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하고 거룩한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온갖 음란하고 더럽고 악한 방법으로 역사를 합니다. 사단에게 조정당하는 세상에 빠지지 마십시오. 성결하여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사십시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에게 임재 하십니다.
6) 하나님은 교회에 임재하십니다.
사무엘 시대에 사무엘은 자신의 고향인 라마 나욧에서 신학교를 운영했습니다. 라마 나욧은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라마 나욧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충만했냐면요.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할 정도였습니다.
삼상 19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라마 나욧으로 가서 사무엘을 만나고 그곳에 숨어 있습니다. 사울이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라마 나욧에 도착한 군인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잡지도 않고 사울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그곳에서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시 다른 군인들을 보내지만 그들도 앞 사람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사울이 또 세 번째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임제를 경험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이 직접 다윗을 잡기 위해서 라마 나욧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옷을 벗고 벗은 몸으로 넘어져서 하루 반을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면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장00이라는 청년이 제게 안수를 받다가 넘어져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그 청년의 표현을 빌리면 쪽팔려서 일어나고 싶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답니다. 며칠 후에 그 청년이 다시 와서 제게 안수를 부탁하면서 “목사님 살살 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얹었는데, 그 청년이 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울이 넘어졌던 것과 동일한 경험입니다.
겔 48장에 보면 하나님의 다른 이름 하나가 나옵니다.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입니다. 거기가 어디입니다. 그 앞에 보면 성전의 식양이 나옵니다. 거기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올라갔던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이 성도 개인의 몸을 말하지만 구약의 성전은 교회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함께 하십니다 마 18:20에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입니다. 우리는 이 건물에서 매주 정해진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주님은 이곳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려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저를 만나려면 제가 있는 곳을 찾아오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찾아와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님의 집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하게 임하십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천한 일이 없습니다. 청소를 하고, 주방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교회 일은 다 거룩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교회는 교인들이 세우게 하십니다. 노아의 방주의 설계는 하나님이 하셨지만 노아가 수고해서 만든 것입니다. 성막도 하나님께서 설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신해서 만들었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디자인하셨지만 성도들의 헌신으로 세워집니다.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경기도 한 도시의 교회에 있었던 아픈 이야기입니다. 6.25직후 미군 부대 옆에 있는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싸우기만 하고 충성도 전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님이 두 분이었는데 그 두 분이 서로 패거리를 만들어 싸웠습니다. 싸우는 것은 마귀가 기뻐하는 일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니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당은 다 찌그러져 가고 있는데 교회당을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교인들이 서로 싸우기만 하니 목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어느 주일, 목사님이 아픈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는데 막내아들이 교회학교를 마치고 뛰어나왔습니다.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아들아, 종을 칠 시간이 되었는데, 아빠가 종을 치면 예배 시간에 늦을 것 같으니 네가 좀 쳐 주렴.”, “알았어요. 아빠.” 그 아들이 종 줄을 잡고 종을 쳤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종을 칠 교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종을 치고 집으로 뛰어가다가 과속으로 달려오던 미군부대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니 아들이 차에 치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아들을 본 사모님은 졸도했습니다.
미군 부대의 장군이 부관들을 데리고 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운전병이 실수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께 이때 한몫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장군님, 바쁘신데 이 누추한 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 아들이 죽은 것은 장군님 부대 운전병의 실수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으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데려가신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리고 간곡히 부탁드리는데 그 운전병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실수로 그런 것이니 너무 꾸중하지 마세요.” 그러자 미군장군이 감격해서 “세상에! 이렇게 귀한 분이 계시다니...”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장군이 부대에 돌아가 참모들을 모아 놓고 목사님의 말을 전하며 부대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때 참모들이 교회를 새로 지어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대에서 목사님과 의논도 하지 않고 교회를 허물고 거기에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봉헌식에 총회와 노회의 임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모여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봉헌 예배를 뜨겁게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교회 열쇠를 드리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열쇠를 갖고 강단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멈추어 서서 덜덜 떨며 울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어서 올라오세요.” 그래도 장로님은 올라가지 않고 여전히 울기만 했습니다. “장로님, 그러지 말고 어서 올라오세요.”, “목사님, 저는 여기에 서 있을 자격도 없고 열쇠를 목사님께 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장로이지만 교회 부흥을 위해 일하기는커녕, 성전 건축을 위해 일하기는커녕 싸움만 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는데, 제가 어떻게 열쇠를 목사님께 드리겠습니까?” 목사님도 울고, 모든 교인도 울고, 손님들까지 다 울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내려가 장로님을 모시고 올라와 장로님을 꼭 껴안았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 가운데 강하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든든히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머리 되시는 주님께 순종하고 머리 되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7) 하나님은 임재의식을 가지고 살면 임재 하십시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는 사람은 없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하며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장로교를 만든 칼빈은 “30센티 앞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처럼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감리교를 세운 웨슬리는 “집에서 늘 내 옆에 의자를 둔다. 왜냐하면 내 옆에 주님이 계시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살았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 남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충만했습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십시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함께 계신 주님에게 계속 해서 말을 거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에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나 감동이나 생각에 반응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계속적인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