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강원도 태백산 밑 조그마한 동네에 사는 불자입니다. 제가 구인사를 처음 찾은 것은 1980년 음력 6월 20일이었습니다. 그때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참담한 심정으로 아들 형제의 손을 이끌고 구인사를 찾은 것이 엊그제같기만 합니다.
그 당시 둘째아이는 아들로서 장남이었으나 항상 다리가 아프다고 하고 막내는 어릴 적부터 너무 말라 한시도 마음이 편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큰스님을 친견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구인사를 찾았습니다.
저희 막내가 태어난 것은 1977년 음력 2월 6일이었습니다. 백일까지는 먹는 대로 살도 찌고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러던 음력 5월 어느날 옆집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치뤘습니다. 그뒤 3일이 지난 후 아기 목에서 피가 올라왔으나 우리 부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며칠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3개월이 지나서는 아기 얼굴의 살이란 살은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몸에 살이 빠지고 나자 꼭 개구리를 말려놓은 것처럼 말라서 사람이라 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상문에 걸렸다고 수근댔습니다. 그래서 대구에서 온 용하다는 보살을 불러 상문을 풀어줘도 마찬가지였고, 주위의 암자를 지키는 스님들을 찾아 액땜을 했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는 점점 아무것도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똥도 누지 못했습니다. 매일매일 똥을 뉘기 위해 관장약을 넣었고 그래도 안되면 약국에 가서 2백원씩 약을 지어다가 먹이고야 용변을 봤습니다. 이런 증세는 돌이 되도록 계속됐습니다.
이제 아이는 말라서 팔다리가 활처럼 휘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뭐라 하든 생명이 있는 한 내가 낳은 나의 아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돌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지배를 받다보니 어미라는 저는 장사하러 밖으로 나다녀야 했고 아기는 친정어머니가 돌보았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다니면 동네 사람들이 비웃는 듯했고 어머니는 ‘죽지도 않고 에미를 고생시킨다’며 아이를 붙들고 매일 울다시피 했습니다.
빠른 것이 세월이라 아이는 어느덧 3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개도 못들고 다리는 휘어 서거나 걷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묘하게도 얼굴 볼이 축 늘어지고 눈만 반짝반짝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다리에 보조기를 맞춰주면 뼈가 바로 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즉시 장리 빚(10만원 1개월에 이자 6만원)을 얻어 아이를 들쳐업고 소개해준 아주머니와 함께 포항에 있다는 보조기 맞추는 곳을 갔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아이의 활처럼 굽은 팔다리를 보시고 보던 중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장리 빚까지 빌려갔는데 만약 바로 서지 못한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만이 앞을 가렸습니다. 보조기를 채운지 몇 개월만에 아이는 서서 한 발짝씩 발을 띨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빠진 살은 다시 붙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의 막내와 항상 다리가 아프다던 둘째아이의 다리를 고치려고 구인사를 찾은 것입니다. 처음으로 적멸보궁에 올라가 큰스님 전에 참배를 올리는데 새삼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며 울음이 북받쳤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참을 길이 없어 목놓아 통곡했습니다.
제가 통곡한 이유는 1973년 8월에 맺었어야 할 구인사와의 인연을 무심히 지나쳐버린 데 대한 참회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광산 일을 하던 남편이 눈을 다쳐 병원에 가기 위해 열차를 탔을 때 어떤 노보살이 병원에 가지 말고 구인사를 가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야지 어떻게 절로 가느냐고 그 보살을 책망하며 구인사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원 다섯 곳을 전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구 명성안과를 밤 늦게 찾아들어갔으나 퇴근시간이 되어 간호원이 문 앞을 가로막고 들어서지 못하게 했고 퇴근하던 원장은 남편의 눈을 보더니 머지 않아 눈알이 뻥 터질 것인데 병원은 무슨 병원이냐며 책망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습니다.
첩첩산중에 살아 세상물정을 모르다 처음 대구를 찾아갔는데 이같은 날벼락을 받고보니 해는 저물고 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 앉아 끝없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 중 한 사람이 파티마병원을 가보라고 했습니다.
파티마병원을 다닌지 27일만에 남편의 눈이 대강 완치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한달 가까운 대구에서의 일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는 재산을 남편의 병원비로 써버리고 나니 많은 식구가 살아갈 생각에 앞날이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그 길로 열차행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 8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행상을 하는 도중에 구인사를 가보라는 몇번의 권유를 받았으나 때를 못만났는지 시간을 허비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뒤늦게 구인사를 찾고보니 많은 생각이 앞을 가리며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게 된 것입니다.
첫 구인사 참배를 삼일기도로 마치고 돌아간 후 다시 구인사를 찾은 것은 백중을 맞이해서였습니다. 그때 구름다리 불사에 시주를 하면 다리 아픈 사람에게 좋다는 말을 듣고 선뜻 5만원을 시주했습니다. 그리고 조상님 천도재를 올리려 했으나 조상님의 제사날은 물론 조모님의 성씨도 몰랐기에 망설이다 그저 대주 권용수의 조부모님으로 하여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친정 조상님의 천도재는 제가 아는 대로 날짜를 적어 올렸습니다.
저희 시댁은 선대조상들이 아들 형제만 낳고는 어미가 요절하기를 4대째 내려오다보니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도 묘한 것은 아버지들이 재혼을 하지 않았고 둘째 집들도 역시 잘 안되어 손이 귀한 집안의 내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인사를 찾으며 문득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어설픈 집안에서 내가 천태종을 안믿고는 헤어날 길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찾게 된 구인사를 다니기 시작한지 어언 10년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둘째와 막내아들의 병이 언제 어떻게 나았는지 모릅니다. 지금 둘째는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막내도 어엿한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미련한 이 중생이 대조사님의 크신 은혜도 모르고 큰스님의 위신력도 모른 채 지내온 과거가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생사고해의 현실 앞에 허우적거리며 날짜를 보내고 마음 속으로만 구인사 갈 날을 손꼽고 있는 미련한 중생입니다. 큰 행사 때 구인사를 찾는 것이 제 생활에 있어 가장 큰 기쁨의 하나입니다.
언젠가 회관에서 회장님이 ‘신도들 영험담’을 모은다는 말을 듣고 한번 써볼까 생각하다가 치워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삼광사를 방문했을 때 교무부에서 신도님들의 영험담을 수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또 한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대조사님 살아 생전에 인연을 못맺은 것이 한으로 남아 구인사에 발만 들여놓으면 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리 안울려고 해도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듯이 제가 겪은 영험 속에는 대조사님의 은혜가 배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생명 다하는 날까지 천태종과의 인연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은혜를 잊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저의 막내를 훌륭히 공부시켜서 구인사로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다만 이 아이가 에미의 마음을 알아 바르고 곧게 성장해주려는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겪은 영험을 다 쓰려면 책 열 권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생각하다보니 생각이 뜻대로 쓰여지지 않은 느낌도 듭니다.
금년 14살 중학교 1학년인 저희 막내 정사생 권희찬을 제게 다시 돌려주신 크신 은혜 부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보답하겠습니다. 부처님 이 중생을 보살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