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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아이돌’은 어쩌면 출연자보다 심사위원 때문에 더 유명해진 프로그램이다.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출연자들에게 ‘희망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독설을 날리는 사이먼 코웰의 거침없는 입담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지난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가 프로그램에서 떠나면서 누가 그의 역할을 대신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사실 그동안 ‘아메리칸 아이돌’의 심사위원은 여러 번 바뀌었다. 시즌 7까지는 사이먼 코웰, 랜디 잭슨, 폴라 압둘의 3인 체제를 고수하다가 시즌 8에는 여성 싱어송라이터 카라 디오과르디가 추가됐다. 시즌 9에는 폴라 압둘이 빠지는 대신 여성 코미디언 엘런 드제네러스가 투입됐다. 그러나 사이먼 코웰의 존재감에 대적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새 시즌에는 기존의 심사위원 랜디 잭슨 이외에 록그룹 에어로스미스의 리드 싱어 스티븐 타일러와 가수 겸 배우인 제니퍼 로페즈가 투입됐다. 제니퍼 로페즈는 인터뷰에서 “나는 출연자들을 ‘쥐어짜듯’ 혹독하게 다룰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뉴욕 빈민가 출신의 그녀가 거칠게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터프한 심사평을 해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여성 심사위원들에게 부여되는 역할은 한정돼 있었다. 코웰의 독설로 상처받은 출연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코웰이 인기를 끌었던 건 단지 독설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심사가 굉장히 정확했기 때문인데, 여성 심사위원들은 많은 경우 혹시나 출연자들이 마음을 다칠까 애매모호한 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때론 시청자도 공감할 수 없을 호평을 하기도 하고, 뚜렷한 자기 주관 없이 앞서 말한 심사위원의 말을 “나도 동의한다”는 식으로 에둘러 이야기하곤 했다. 카라 디오과르디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폴라 압둘의 경우 도대체 왜 저기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고 엘런 드제네러스도 유머 구사에만 급급했다.
요즘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슈퍼스타K가 ‘아메리칸 아이돌’의 포맷과 유사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여성 심사위원의 역할마저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유일한 여성 심사위원인 엄정화의 심사평은 늘 모호하다.
그저 “너무 좋았고요” 혹은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고요”를 연발하는 엄정화의 모습에서 프로페셔널한 면을 찾기는 힘들다. 희망도 좋고 다 좋지만, 심사위원은 심사를 하는 사람이다. 좋았으면 어떤 면이 좋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뿐더러, 단점을 지적할 때도 앞서 심사한 이승철의 말을 반복 인용하는 데 그치면 곤란하지 않을까.
연예계는 나이 든 여성에게 유난히 더 혹독한 법인데, 제니퍼 로페즈와 엄정화는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댄스가수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당연히 나름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을 터. “여성은 부드러워야 한다”는 이른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프로페셔널의 예리한 시선이 느껴지는 심사평을 해주길 기대해본다.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유학하고 있다. 음악과 문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