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누구고 어디서 왔어?"
"왜 이렇게 피부가 까매?"
"엄마 아빠는 없는 거야?"
알 수 없었다. 이런 질문의 요점이 무엇인지. 네이버 지식인이나 종합 대백과를 훑어봐도, 도무지 나올만한 전형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교양서적과 도덕 학습지, 도덕 교과서, 조던 피터슨의 쿼라(Quora)에도 찾아볼 수 없었던 무례한 질문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로 한껏 냉랭해진 안면을 강타했다. 굳은 표정에 입 밖으로 튄 침처럼 가는 빗방울들이 굴곡진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 울적한 마음을 후볐고 끝끝내 피로 얼룩진 양말처럼 셔츠를 적셨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뒤틀린 질문에 어울리지 않는 시원한 대답을 해야 모멸감과도 같은 상황이 잠시나마 풀릴 터였다.
새롭게 부여받은 첫 명찰, '미숙아'.
그다음, '입양아'. 그리고 '보육원 생활자' 혹은 '보호 대상 아동'.
고아는 천체적으로 인적자원과 직렬적으로 관련된 문제에서 '사회적 약자'로도 불린다. 왜냐하면 첫째, 부양할 가족이 없으며 오로지 단신으로 생활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직접 헤쳐 나가야 하고, 둘째로 재단의 그늘 아래 극진한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보호 대상 아동이 고아로 된 상황은 제각각이다. 당시 나는 재단이라는 화단 안에서 새초롭게 자라는 온실 속 화초였다. 신으로부터 하사 받은 하루의 일용할 생활을 담당자 수녀님을 통해 이어나갔다. 집 하나 없는 길바닥에서 거리생활을 했더라면 그나마 부지했던 목숨이 더욱 위태로웠을 것이고, 남은 인생이 말도 안 되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을게 분명했다. 보다 큰 위험을 안아야 할 상황을 마주하지 않은 덕에 사회 보육시설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정적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켜켜이 묵힌 어둠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안정적인 삶은 여진을 넘어 기록적인 대진으로, 불안정한 길바닥에서 안정이란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자아를 수차레 위협했다. 집중적인 시선과 무언의 폭력, 방치와 방임, 시시때때로 신체적인 폭행들과 성추행. 이곳은 기대했던 푸른빛의 정원이 아닌 폴리페모스*클론들의 주거지였다.
폴리페모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외눈박이 거인족의 이름이며 키클로페스 중 한 명이다. 폴리페모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 일행을 잡아먹으려다 눈을 찔려 장님이 되었다. 그는 눈이 멀기 이전에 아름다운 님페 갈라테이아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다른 연인 아키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위를 던져 아키스를 무참히 죽였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과 바다의 님페 토오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토오사는 해신(혹은 바다 괴물) 포르키스의 딸로 괴물 에키드나, 고르곤, 그라이아이 등과 자매지간이다. 그는 갈라테이아에게서 세 아들 갈라테서, 켈토스, 일리리오스를 얻었다.
오디세우스에 의해 눈이 멀기 전, 폴리페모스는 바다의 님페 갈라테이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갈라테이아는 해신 네레우스의 딸들인 50명(혹은 100명)의 아름다운 네레이데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님페였다. 예언자 텔레모스는 폴리페모스가 오디세우스라는 자에게 시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자 이미 자신은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갈라테이아는 사랑하는 다른 연인이 있었다. 그녀의 연인은 열여섯 살의 아름다운 소년 아키스였다. 갈라테이아가 아키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폴리페모스는 질투심에 안달이 났고, 그가 그럴수록 갈라테이아의 마음은 폴리페모스에게서 멀어졌다. 갈라테이아는 폴리페모스를 싫어하는 마음과 아키스를 사랑하는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큰지 몰라 혼돈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폴리페모스는 여느 때처럼 노을이 지는 해변 바위에 홀로 앉아 애타는 마음을 피리로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폴리페모스는 석양이 떠오른 해변에서 아키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갈라테이아를 발견했고, 곧이어 분노가 폭발했다. 그의 성난 목소리에 잠이 깬 갈라테이아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떠났고, 폴리페모스는 산에서 커다란 바위를 뽑아 아키스를 향해 내던졌다. 바위는 그대로 아키스를 깔아뭉갰고 바위 밑으로 아키스의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슬픔에 잠긴 여신 갈라테이아는 연인의 피를 맑은 강물로 만들어 아래로 흐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아키스는 강의 신이 되었다.
폴리페모스의 분노는 자아의 영역까지 미쳐 새로 산 수성물감처럼 쉽게 번졌다. 지독한 분노로 치장한 대한민국의 유행병인 '화병'에 감염되고야 말았다.
나는 아키스의 붉은 강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뒤에 이것이 순전히 피 맛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분노의 맛, 후회의 맛, 처절한 고통과 후회의 맛이었다. 에너지 이용을 위해 마그네슘을 섭취한 줄 알았건만, 근육의 기능 유지를 위해 그리하도록 뇌의 명령에 따라 행했건만, 치사량 높은 복어의 독으로 유명한 테트로도톡신이 될 줄 몰랐다. 아키스의 강물은 어쩌면 처음부터 독이 든 성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독이라고 맹신적으로 믿어왔기에 실제 독으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확연한 의심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키스. 성인이 된 또 다른 나 폴리페모스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했고, 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갈라테이아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에게서 멀리 도망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아키스를 애도하고 있다. 폴리페모스의 눈에서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니라 아키스, 자신의 피일 것이다. 그가 뒤통수를 더듬으려 하자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허공만 남아있을 뿐이다. 머리가 바위에 짓뭉개져 버려 으깨진 핏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후회하면서도 아키스의 형체를 남기지 않고 바위로 내려친다. 완벽하게 붉은 액체가 될 때까지. 세게, 세게, 더 세게 바위를 내리꽂는다.
흉한 몰골로 잘게잘게 으스러진 아키스를 뒤로 하고 혼자 돌아서 앉는다. 울분을 토할 때마다 고통이 스며든다.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아키스의 눈물이자 폴리페모스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처절한 후회이다. 한때는 연인이었던 갈라테이아가 준 조건없는 사랑이다.
나무 뒤에서 흐느끼는 갈라테이아가 이 쪽을 본다. 울다지쳐 쓰러진 나는 강물에 손을 대는 순간 안타까움의 감정으로부터 철저하게 숨겼던 무연고의 분노가 날뛰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 정신이 신경감각이 죽은 각질이 되어버린 것처럼. 서서히, 아주 천천히 무뎌지기 시작했다. 나트륨 이온의 통과는 폐문되었고, 신경세포의 활동 전위 생성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기후학적인 연강수량이 4% 이하로 복합적인 코로나섬니아(Coronasomnia)가 빠짐없이 신체의 구석으로 뇌의 변연계로 도달했다. 극심한 가뭄과 마비로 온몸이 메말랐다. 그다음 또다시, 자석처럼 억척스럽게 붙어버린 새로운 호칭이 뒤 따라붙었다.
'고아'
4살의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디의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