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의 관찰일기
진은영
사랑이나 이별의 깨끗한 얼굴을 내밀기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의 신은 공중화장실 비누같이 닳은 얼굴을 하고서 내게 온다
두 손을 문지르며 사라질 때까지 경배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과 전쟁의 심벌즈는 내 유리 손가락, 붓에 담긴 온기와 확신을 깨버렸다
안녕 나의 죽은 친구들
우리의 어린 시절은 흩어지지 않고
작은 과일나무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 키높이만큼 낮게 흐르는 구름 속으로 손을 넣으면
물감으로 쓸 만한 열매 몇 개쯤은 딸 수 있다, 아직도
여러 밝기의 붉은색과 고통들
그럴 때면 나폴리 여행에서 가져온 물고기의 색채를
기하학의 정원에 풀어놓기도 한다
나는 동판화의 가는 틈새로 바라보았다
슬픔이 소녀들의 가슴을 파내는 것을
그녀들이 절망을 한쪽 가슴으로 삼아 노래를 멀리 쏘아 올리는 것을
나는 짧게 깎인 날개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조금씩 부서지는 누런 하늘의 모서리
나쁜 소식이 재처럼 쌓인 화관을 쓰고
나는 본 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영원히 날아가려 했다
폼페이의 잔해더미에 그려진
수탉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폭풍이 이 모든 폐허를 들어 올릴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 속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나를 좋아하던 어느 문예비평가가 말했다지만, 글쎄……
그는 국경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나는 해부학과 푸생, 밀레와 다비드를 공부했고
이성과 광기의 폴리포니를 분간할 줄 아는 두 귀에,
광학을 가르치고 폐병과 심장병의 합병증에도 정통했지만
슬픔으로 얼룩진 내 얼굴과의 경쟁에선 번번이 패배했다
그때마다 나는 세네치오를 불렀고
부화하기 전의 노른자처럼 충혈된 그가 왔다
진은영
대전 출생. 2000년《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훔쳐가는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