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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 태산 같은 권세로 궁을 흔들었으나
후 : 후일을 헤아리지 못한 꾀가 화를 부르고
의 : 의심의 눈길 속에 감추었던 계략 드러나니
계 : 계교는 끝내 빛을 잃고 만천하에 밝혀지고
교 : 교묘했던 속임수도 진실 앞에 무너져
가 : 가려졌던 음모가 낱낱이 드러난다
탄 : 탄식과 놀람이 궁궐에 가득하고
로 : 로정 같던 권세도 한순간에 사라지니
나 : 나날이 쌓은 허망함만 남는 정소저
다 : 다음편엔 "대부인을 모시다" 편이 연재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九雲夢] 39. 태후의 계교가 탄로나다.
이튿날 승상은 난양공주와 더불어 영양공주 방에 모여 같이 앉아서 술을 마실새, 영양공주가 소리를 낮추어 시녀를 불러 진숙인을 청하거늘, 승상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 구슬픈 감회가 서려 낯에 오르니, 이는 전일에 양생이 여복을 입고 정사도 집에 들어가 소저를 대하고 거문고를 탈 적에, 곡계조를 청하던 목소리요, 그 용모가 더욱 눈에 익었더라. 이 날 영양공주의 음성이 또한 정소저의 그것이요, 자세히 본즉 모습 또한 정소저라. 승상이 이에 이르러 곰곰히 생각하되,
"세상에 흠사한 사람도 있도다. 내 정씨와 혼인을 언약할 적에 사생을 한가지로 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나는 금슬(琴瑟)의 즐거움을 맺었거니와 전씨의 외로운 넋은 어느 곳에 의탁하였을꼬? 내 허물을 피하고자 하여 무덤 앞에 한잔 술과 궤연(机筵)에서 꼭 한 번 아니 하였으니, 내 정씨를 저바림이 심하도다!"
하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이니, 정씨의 거울같은 마음으로 승상의 가슴 속을 어찌 알지 못하리오, 이에 옷깃을 바로 잡고 묻기를,
"이제 상공께서 잔을 잡으시고서 갑자기 슬픈 빛이 엿보이오니 감히 그 연고를 알고자 하나이다."
승상이 사례하시길,
"소유의 마음 속 일을 어찌 귀주(貴主)께 감추리오. 소유가 지난 날 정사도의 집에가서 그 여자를 보았거니와, 귀주의 음성과 용모가 정씨 여자와 흡사한고로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여 아마도 비창한가 하오니, 귀주는 괴이쩍게 여기지 마옵소서."
영양공주가 이 말을 듣고나자 두 볼에 붉은 빛을 띄며, 홀연히 자리를 떠나 내전으로 들어가 오래 나오지 아니하므로, 승상이 시녀를 시켜 청하나 시녀 또한 나오지 아니하니 난양공주가 이르며 말했다.
"저저는 태후마마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고로 성품이 굽힐 줄 몰라 첩의 잔망함과는 같지 않으신데, 아마도 상공께서 정녀와 견주시매 매우 미흡한 마음이 있는가 보옵니다."
승상이 다시 진씨를 보내어 사죄하기를,
"소유가 취중에 망발을 하였으니, 귀주가 곧 나오시면 소유는 마땅히 진문공(晉文公)과 같이 가두기를 청하리이다."
하였더니, 이윽한 후에 진씨 돌아오나 전하는 말이 없으므로 승상이 물어보되,
"귀주께서 노여움이 크시와 말씀이 과하시기에 감히 전치 못하겠나이다."
승상이 정색하며 이르되,
"귀주의 과하신 말씀이 숙인에게는 허물되지 않을 터이니 모름지기 자세히 전하렸다!"
마지 못하여 진씨가 대답하기를,
:"영양공주의 말씀이 첩이 비록 잔졸하나 태후마마의 총애하는 딸이요, 정녀가 비록 요조하나 여염의 미천한 집 여아라, 예범에 이르기를, 길말(천자의 수례)에 허릴를 굽힌다 하였으니 말을 공경함이 아니라, 인군이 타신 바를 공경함이거늘, 하물며 인군이 사랑하시는 누이에 있어서랴? 정녀가 일찍이 체모를 생각치 아니하고 스스로 그 자색을 자랑하여 상공과 더불어 말을 건네며 거문고 곡조를 논하였은즉, 아무래도 몸가짐이 옳지 못할지라, 또 스스로 혼사가 지체됨을 한탄하여 조울병(躁鬱病)을 일으켜 청춘을 재촉하였으니 그 신수가 가장 기박하거늘, 상공이 어찌 나를 여기에 견주시나뇨? 옛날에 노나라 추호가 황금으로써 뽕따는 계집을 희롱하매 그 계집이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하거늘, 첩이 어찌 부끄러운 낯으로써 가히 상공을 대하리오? 또한 상공이 이미 죽은 낯을 기억하고, 그 소리를 이별한 지 오랜 뒤에도 알아들으니, 이는 바로 탁녀(卓文君)가 외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가씨 집에서 향을 도둑질함과 같으매, 첩은 이제부터 맹세코 문 밖에 나지 아니하고 몸을 마칠지라 .난양은 성품이 유순하여 나와 같지 아니하니 바라건대 상공은 난양과 더불어 백년해로 하소서 하시더라."
승상이 마음이 대로하여 이르기를,
"천하에 여자가 세를 믿음이 이 영양 같은 자 또 있으리오? 과연 부마의 괴로움을 알겠도다."
이에 난양에게 이르되,
"내 정녀와 더불어 상봉함에는 곡절이 있거늘 이제 영양이 도리어 음행으로 내게 씌우고자 하는데 이는 상관 없지만, 욕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 미치니 이 실로 한탄할 바로다."
난양이 이르기를,
"첩이 마땅히 들어가 저저에게 깨닫도록 말씀하겠나이다."
하고, 곧 몸을 돌이켜 들어가더니 날이 저물도록 또한 나오지 아니하고, 이미 방안에 등촉을 벌려 놓았으매 난양이 시비를 시켜서 말을 전하되,
"첩이 어러가지로 타일러도 저저는 마침내 마음을 돌리지 아니 하시나이다. 첩이 당초에 저저와 더불어 사생 고락을 같이 하자 천지신명게 언약하였기로 만일 저저가 깊은 궁에서 홀로 늙으면 첩도 또한 갚은 궁에서 늙고자 하오니, 바라건데 승상은 숙인방에 나아가사 오늘 밤을 안녕히 지내소서."
하니, 승상은 노기가 치밀어 오르나 얼굴과 말에 드러나지 아니하고, 빈 방장과 친 병풍이 도한 무료하므로 침상에 비스듬히 의지하여 진씨를 바라보니, 진씨 곧 촛불을 들고 승상을 인도하여 침방으로 돌아가 금화로에 용향을 피우며 상아평상에 비단금침을 펴고서 승상께 아뢰기를,
"첩이 비록 불민하오나 일찍이 군자의 풍도를 듣사오니, 예법에 첩을 어거함이 감히 저녁을 당치 못한다 하니, 이제 두 공주마마께서 다 내전에 드신지라, 첩이 어찌 감히 상공을 모시고 이 밤을 지낼 수 있사오리까? 승상께옵서는 안녕히 취침하소서."
하고, 응용히 걸어가더라. 승상이 비록 만류치 아니하나 밤의 경색이 자못 쓸쓸한지라. 드디어 방장을 드리우고 베개를 베고 드러누우매 엎치락 뒤치락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누워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꾀를 내어 장부를 조롱하니, 내 어찌 저들에게 애걸할 것이랴? 내 전일 정사도 집 화원에 있으매, 낮이면 정십삼과 더불어 酒樓에서 취하고 밤이면 춘랑과 더불어 촛불을 대하여 술을 마시니 하루도 불쾌함이 없거늘, 이제 부마된 지 삼일만에 마음이 매우 괴롭도다."
하고 손을 들어 사창을 여니, 은하수는 하늘에 비끼고 월색은 뜰에 가득하기에 신을 신고 나아가 거닐다가, 멀리 영양공주의 방쪽을 바라보니 촛불이 휘황하여 사창에 영롱하기에, 승상이 마음 속으로 뇌이되,
"밤이 이미 깊었거늘 궁인이 어찌 지금껏 자지 않을꼬? 영양이 내게 노하여 나를 이리로 보내더니, 이미 침실로 돌아갔도다."
신소릴를 죽이며 고이 걸어 가만히 창 밖에 나아간즉, 두 공주의 말소리와 웃는 소리와 주사위 쌍륙 소리가 창밖으로 새어나오므로 가만히 창틈으로 엿본즉, 숙인이 두 공주 앞에 앉아 한 여자와 더불어 주사위 판을 대하고 일을 빌며 육을 브르더니, 그 여자가 몸을 돌려 촛불을 돋우는데 자세히 보니 가춘운이라, 원래 춘운은 공주들이 대례를 올리던 날 궁에 들어옴이껬더라. 그러나 그 날은 춘운이 몸을 감추어 승상을 보지 아니한고로, 승상이 이에 춘운이 있을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승상이 놀라 괴이쩍게 여기며 홀로 지껄이기를,
"필연 공주가 춘운의 자색을 보고자 하여 불러옴이로다."
하는데, 진씨가 갑자기 주사위 판을 다시 벌리며 말하기를,
"내기를 아니하므로 재미가 없으니, 내 마땅히 춘랑과 더불어 내기를 하리로다."
춘운이 이에 대답하되,
"춘운은 보래 빈한하여 한 그릇 주효도 다행으로 알거니와, 진숙인은 공주마마의 곁에 있었기로 능라금수(綾羅錦繡)와 경거옥패(瓊琚玉佩)이 풍족하실 터인데 춘운에게 무슨 물건을 내기하라 하시나뇨?"
진씨가 대답하기를,
"내 지면 허리에 찬 노리개와 머리에 꽂은 비녀 중에 춘랑이 원하는 대로 줄 것이요, 낭자가 이기지 못하면 내 청을 들을지니, 이 일은 실로 낭자에게는 허비할 바 없도다."
춘우이 다시 묻되,
"청코자 하는 바는 무슨 일이며, 듣고자 하는 말은 무슨 말이뇨?
진씨가 말하기를,
" 지난번에 두 공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매, 춘랑이 신선도 되고 귀신도 되어 그로써 승상을 속였다 하는데, 내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으니, 낭자가 지거든 이 일로써 고담 삼아 내게 들려주라."
춘운이 이에 주사위 판을 밀고 영양공주를 향하여 여쭙기를,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는 평일에 춘운을 사랑하심이 지극하시더니, 이런 이야기를 공주께 들리사 숙인이 이미 들었다 하오니, 궁중에 귀 있는 사람이야 뉘 알지 못하였사오리까? 이제 춘운이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사오리까?"
진씨가 말하기를,
"이 몸이 춘낭자에게 책할 말이 있도다. 우리 공주가 어찌 춘랑아가씨가 되리오? 영양공주는 대승상의 부인이요, 의국공의 여군으로 연세는 비록 젊으시나 지위는 이미 높으시니 어찌 감히 아가씨라 부르리오?"
춘운이 사과하되,
"십 년이나 익은 입을 하루 아침에 고치기는 어렵고, 꽃을 다투고 가지를 가지고자 싸우던 일이 완전히 어제 같으니, 공주를 내가 두려워 하지 않는 데서 실언함이니 용서하소서."
하고, 소리내어 크게 웃거늘, 난양공주가 영양공주에게 묻자오되,
"춘운의 이야기 끝을 소매도 미처 듣지 못하였는데, 과연 승상께서 춘운에게 속았나이까?"
영양이 비로소 말하기를,
"승상께서 춘운에게 속은 일이 많으니, 불 아니 땐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날 수 있겠나이까? 다만 겁내는 형상을 보고자 하였더니 미욱하여 귀신을 미워할 줄 모르니, 예에 이르기를 호색하는 사람은 계집의 아귀라 하는 말이 과연 거짓말 아니니, 귀신에 주린자가 어찌 귀신을 미워할 줄 알겠나이까?"
하니 좌중이 크게 웃더라.
승상이 정녕 영양공주가 정소저인 줄 알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창을 열려고 하다가, 도로 멈추며 홀로 지껄으기를,
"저들이 나를 속이고자 하니 내 또한 저들을 속이리라."
하고, 이에 가만히 진씨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더라. 이튿날 일찍이 진씨가 나아와 시녀에게 묻되,
"승상께서 기침 하셨느냐?"
시녀가 대답하기를,
"아직 기침 아니하시나이다."
진씨가 창 밖에 오래 서 있으니, 어느덧 아침 햇살이 창문에 가득하고 조반상이 들어가야 하는데 승상은 일어나지 아니하고 이따금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기에, 진씨가 나아가 물어보되,
"승상께서 미령하시나이까?"
승사이 눈을 떠 직시하되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 같고 간간이 잠꼬대를 하니 진씨가 되묻기를,
"승상께서 잠꼬대를 하시나이까?"
승상이 어지러운 듯 잠시 머뭇 거리다가 갑자기 되묻되,
"네 누구냐?"
진씨가 대답하기를,
"첩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첩은 진숙인 이옵니다."
승상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요, 눈을 도로 감으며 목안의 소리로,
"진숙인 진숙인이 누구냐?"
하기에, 진씨가 승상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이르기를,
"이마가 자못 더우니 승상께서 환후를 얻으셨나이다. 하루 밤 사이에 무슨 병이 이렇듯 위중하시나이까?"
승상이 다시 눈을 떠 정신을 가다듬으며 이르기를,
"이상하도다! 정녀가 밤새 나를 괴롭히니 내 어찌 할꼬?"
하기로, 진씨가 그 자세한 이야기를 물은즉 승상이 다시금 어지러운듯 대답지 아니하고 몸을 옮겨 돌아눕기에, 진씨는 매우 걱정이 되므로 시녀를 보내어 공주께 이뢰기를,
"승상께서 환후가 계시니 속히 나와 뵈옵소서."
영양공주가 이르되,
"어제 술 마시던 상공이 무슨 병이 있으리요? 아무래도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나아가 보게 함이리라."
하는데, 진씨 급히 들어와 아뢰되,
"상공이 정신이 혼미하사 사람을 보아도 알지 못하시고 오히려 어두운 데를 향하여 잠꼬대를 자주 하시니, 황상께 아뢰옵고 이관을 불러 치료하심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태후가 들으시고 공주를 나무라시되,
"너희들이 승상을 지나치게 속였거늘, 그 병이 중함을 듣고도 나아가 보지 않으니 이 무슨 도리냐? 급히 문병하고 만일 증세가 중하거든 의관 중 의술이 심묘한 자를 불러 진찰하고 치료케 하렸다."
영양이 난양과 더불어 승상 침방으로 들어가 보게 하였더니, 승상이 혹은 두손을 휘두르고 혹은 두눈을 부릅뜨면서, 처음에는 난양이 묻는 말을 듣지 못하는 듯하더니 비로소 목 안의 소리로 말하기를,
"내 명이 장차 다하겠기로 영양과 더불어 영결하려 하거늘, 영양은 보지 못하겠도다."
난양이 말하되,
"승상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승상이 처량한 말로 덧붙이기를,
"간밤에 비몽사몽 간에 정녀가 내게 와서 말하되 상공은 어찌 언약을저바리시나이까? 하고 노여움이 추상 같으며, 진주 한 움큼을 내어 주시에 내 그것을 받아 삼켰더니 이는 실로 흉한 징조요, 눈을 감은즉 정녀가 내 몸을 누루고 눈을 뜬즉 정녀가 내 앞에 섰으니 어찌 능히 살리오?"
말을 마치지 못하여 또한 기진하는 시늉을 지으며 낯을 돌려 벽을 향하더니 다시 횡설수설하니, 난야이 그동정을 살펴보매 놀랍고 염려되므로, 밖으로 나와 영양에게 이르기를,
"승상의 병인즉 아무래도 의질이오니 저저 아니면 능히 고칠 자 없나이다."
하고 이어서 병의 증세를 말하니, 여양이 반신반의로 주저하므로 난양이 손을 끌고 들어가더라, 승상이 아직도 잠꼬대를 하는데 모두가 정씨를 향한 말이라, 난야이 소리높여 말하되,
"승상, 승상! 저저가 납시었으니 눈을 떠 보소서."
승상이 잠깐 머리를 들고 자주 눈을 휘번덕거리며 일어나고자하는 시늉을 하기에 부축하여 일으켜 평상 위에 앉히니, 승상이 공주들을 대하여 하는 말이,
“소유가 편벽하게 천은을 입어 두 분 귀주와 더불어 성혼하매 백년해로 하려 했으나, 나를 자아 가려는 듯한 자 있기로 세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겎으니 이를 서러워 하나이다."
영양이 말하기를,
"승상은 이치를 아는 구자이거늘 어찌 허망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정씨의 흩어진 넋이 남아 있을지라도 백령이 호위하는 구중 궁궐에 어떻게 들어오며, 또 어찌 대승상의 귀중한 몸을 침노할 수 있사오리까?"
승상이 소리 높여 외치되,
"정녀가 지금 당장 내 곁에 있거늘 어찌 들어오지 못한다 이르느뇨?"
난양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술잔의 배암을 마시고 의질을 얻더니, 벽에 걸린 활 그림자가 배암 모양임을 안 후로는 병이 쾌차하더라 하는데, 승상의 병이 또한 그와 같고 쾌차하실 방법도 그와 비슷한 줄로 아뢰나이다."
승상이 눈을 감고 대답치 아니하며 다만 손만 놀릴 따름이라, 영양이 병세가 점차 위중한 줄 보고 다가앉으며 하는 말이,
"승상께서는 다만 죽은 정녀만을 생각하시고 왜 산 정녀는 보고자 아니하시나이까? 승상이 정녀를 보고자 하실진대 첩이 바로 정녀 경패로소이다."
승상이 거짓으로 믿지 못하는 체 하면서 이르기를,
"무슨 말이뇨? 정사도에게 한 딸이 있다가 죽은 지 이미 오래도다. 죽은 정녀는 이미 내 몸 곁에 있은즉 그 밖에 어찌 산 정녀가 있으리요? 죽지 않고 살고, 살지 않은즉 죽는 것이 사람의 정한 일이요, 죽은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느니라 하니, 귀주의 말씀을 내 맏지 못하겠소이다."
이에 난양이 덧붙여 말하되,
"우리 태후마마께서 정씨를 양녀로 삼으시고 영양공주로 봉하시어 첩과 함께 승상을 섬기게 하였으니 영양 저저가 곧 전일의 거문고를 듣던 정소저이나이다. 그렇지 않사오면 어찌 정녀와 조금도 틀림이 없을 수 있사오리까?"
승상이 이 말에는 대답치 아니하고 적이 신음하는 소리를 내더니, 홀연히 머리를 쳐들고 숨을 크게 쉬며 말하되,
"내 정씨 집에 있을 적에 정소저의 비자 가춘운이 내게 와 사환노릇을 하였는데, 이제 춘운한테 한 말을 묻고자 하니 그는 어디 있느뇨? 보고자 하나 그 역시 어렵도다! 슬프다 한스럽기 그지없도다!"
난양이 이에 밝히기를,
“춘운이 영양저저께 보옵고자 궁중에 들어왔다가 또한 승상의 병환이 근심하여 이제 밖에서 문후하나이다.”
하더니, 춘운이 들어와 여쭙되,
“승상께서 기체 어떠하시나이까?”
승상이 하는말이,
“춘운만 머무르고 그 밖의 사람은 다 나가기 바라오.”
하니, 두 공주와 숙인이 나와 안간을 의지하며 서니라.
승상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춘운을 시켜 세 사람을 불러들이니, 춘운이 웃음을 머금고 나와 두 공주와 숙인한테 말하기를,
“승상께서 청하시나이다.”
하기에 네 여인이 들어가니, 승상이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관금포(官錦枹)를 입고 백옥여의(白玉如意)를 잡고 안석에 의지하여 앉았으니, 기상이 화창한 봄날씨 같아 조금도 병들었다 일어난 사람같은 기색이 없으므로 영양공주는 비로소 속은 줄을 알고 웃으며, 머리를 숙이고 다시 문병치 아니하나, 난양은 물어보기를,
“승상의 기후 지금은 어떠하시나이까?”
양승상이 정중한 태도로 정대히 대답하기를,
“소유가 보니 근래의 풍속이 괴이하여 미인계로서 장부를 속이는 지라, 유한하고 정정한 부덕을 장차 어디를 좇아볼 수 있으리요? 소유가 대신의 반열에 있기로 이에 겨정할 방책을 골똘히 생각하다 병이 되었으되 이제 쾌차하니 귀주는 염려를 마옵소서.”
한 난양과 숙인은 웃으며 대답치 아니하였다.
영양이 다만 말하기를,
“이 일이온즉 첩이 알 바 아니오며, 승상의 병근을 알고자 하시진대 스스로 돌이켜 보시고 남 속이던 일을 뉘우칠 것이요. 한편 태후께 품달하여 보소서.”
승상이 마음의 가려움을 이깆 못하여 이에 소리내어 웃으며 하는 말이,
”양소유의 신출귀몰한 계교로서 전후 미인계의 실상을 알았으니, 부인은 사람의 아래에 엎드린다는 말이 옳도다. 그러나 오직 공경하고 감복함은 태후마마께서 자식같이 보시는 은덕과 황상폐하의 천신하시는 어념과 귀주의 우애하시는 덕행이오니 소유 정성을 다하여 금술의 즐거움을 오래오래 누리리이다.“
두 공주와 숙인이 부끄러운 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이 없더라.
출처: 구운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