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훈 토마스 신부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로마 13,8-10 루카 14,25-33
우리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때로는 그 여정이 힘들어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우뚝 섭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잠시 길에서 벗어나 쉬어 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목표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확실한 목표가 보이지 않고, 곧게 뻗어 있는 것만 같았던 길은 구불구불한
오르막입니다. 갈림길이 나오면, 후회할지 모를 선택을 해야만 하기도 합니다.
많은 군중 또한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온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입니다.
설레고 감동받았던 처음의 마음은 의심과 불신으로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희망의 길이었던 그 여정이, 이제 두려움과 아픔의 여정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걸어가는 좀 더 편해 보이는 길을 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잠시 쉬라고 하십니다.
갈림길 앞에서 “먼저 앉아서” 우리가 걸어온 그 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여정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집중하였는지, 혹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그런 나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함께 들어 주셨는지,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고민들은 보이지 않던 희망을 점차 뚜렷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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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로마 13,8-10 루카 14,25-33
예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금하는 율법의 힘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데에
너무나 뚜렷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보다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려는 이들의 사랑과 이 마음에서
우러난 희생이 악인들이 저지른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 또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고,
믿는 이들이 그분을 뒤따라가자면 반드시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이러한 기능을 대속적(代贖的) 은총이라 합니다.
이 대속 기능은 세상이 주는 이익이나 명예로는 어림없고, 오직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그분을 닮으려면 거룩해져야 할 신앙의 요청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인도 아니시면서 마치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고,
그 물의 세례에 이어 불의 세례 즉 사랑의 세례이자 십자가의 세례까지 받으시는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십자가, 대속적 동기를 지닌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길이 그분의 길이었고,
그분을 따라 믿는 이들도 걸어가도록 요청받고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악과 맞서신 예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의로운 마음을 지닌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의인들이 그 의로움에 만족하여 주저앉지 말고 거룩함의 경지에까지 올라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자신들은 의롭기 때문에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 위선자
아흔아홉보다는, 자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진정한 의인 하나를
하늘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악인들의 회개는 어렵습니다. 부자들의 나눔 역시 세상 끝 날까지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고백하는 의인들의 거룩한 회개가 차라리 낫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나눔이 더 쉬운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또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과 나눔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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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로마 13,8-10 루카 14,25-33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5절-33절)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6절)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버려야 하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듯이
소유의 모든 것을 비울 때,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 주신 ‘참 행복’에 이르게 되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은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듯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돌아가신 고통의 길은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비울 때에 비로소 주님의 참다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서 13장 8절)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오로는 율법에 의한 구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진정한 구원과
전인격적인 삶의 목적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과 함께 지독하게 쓴, 고통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좋아하기는 쉬워도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못 박고 침 뱉으며 모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하시도록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이 남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이기적인 감정’까지도 ‘사랑’이나는 말에 함께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시편저자는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지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저자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죄인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우리도 낭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실망과 상처를 겪은 연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작은 교회인 가정에서 부부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참아주고 이해와 용서의 마음을 갖고 넉넉하게 살아가야
원만한 가정을 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말처럼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로는 서로의 상처의 고통도 겪지만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의 진리를 겪어야 하지요.
서로 사랑하다는 것은 고통도 나누어야 하고 자신이 먼저 십자가도 져야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혈연관계나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의 목숨(텐 프쉬켄 헤아우투 τὴν ⸂ψυχὴν ἑαυτοῦ’을
‘미워하지 않으면(우 미세이 οὐ μισεῖ),’ 당신 제자가 될 수가 없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가족과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는 루카와 달리 “’나보다(휘페르 에메 ὑπὲρ ἐμὲ)’,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을 ’사랑하는 사람(ὁ φιλῶν)’”(마태 10.37)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루카는 이어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마태오는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9)
라는 말씀을 전한다. 루카는 마태오와 달리 탑을 세우려는 사람이 미리 공사경비를 계산해야 하고,
싸움에서 만 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 만 명을 거느린 적을 맞설 수 없으면 평화협정을 청해야 한다는
독립적인 이야기(루카 14,28-32)를 삽인한다.
그리고 루카는 결론으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5)라는 주님을 말씀을 전한다.
2) 우리는 흔히 ‘좋아한다’, ‘마음에 든다.’ 또는 그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며 산다.
그런데 ‘사랑한다.’라는 말은 사실 쉬울지 모르나 실제에 있어서는 어렵다는 사실을 안고 산다.
이탈리아어에 이런 말이 있다.
‘고통이 없는 사랑은 없다.(amore non è senza amaro)’
‘사랑하다’라는 ‘아마레 amare’에서 ‘사랑’이라는 ‘아모레 amore’도 나오고
‘쓴맛’이라는 ‘아마로 amaro'도 나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랑’과 ‘쓴맛’은 사촌지간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쓴 맛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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