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바오로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324년에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사건을
왜 기념할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이 축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미사 가운데 사제가 바치는 고유 기도문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이어서 영성체 후 기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집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랫동안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천상 교회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미미하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지만, 언젠가 천상 교회,
곧 천상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나그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방인입니다(1베드 2,11 참조).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돌로 지어진 성전이 드러내는 이 지상 교회에서 살지만, 천상 교회에서
영원히 살게 될 영광스러운 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 신앙인은
성사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총에 힘입어 하루하루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준비합니다.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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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저는 신학생 때 학생회 간부를 맞지는 않았지만 자치회장을 위한 ‘지지연설’은 2번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지지했던 후보가 자치회장이 되었고, 저는 덕분에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프로테스탄트의 장점은 자유입니다. 가톨릭의 단점은 변화에 쉽게
대응하기 힘들고, 프로테스탄트의 단점은 구심점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후보는 교회의 전통과 학교의 지침을 잘 따르면서 신학생들의 복지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후보자는 학생을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헌신 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인용하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치회장이라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자치회장을 했던 친구는 교구에서 중책을 맡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계제도와 성전이 있기에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계제도와 성전을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지난 2019년 성주간 월요일에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가 있었습니다.
저도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 유럽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성당입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프랑스는 ‘교회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 불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성당이 불에 타고 있는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당 주변에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당은 화재로 사라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시민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 식어가는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건물은 복원할 수 있지만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와 같은 성당의 화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어버린 신앙을 뉘우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 탐욕, 거짓, 분노, 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 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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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키엘 47,1-2.8-9.12 요한 2,13-22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제 출신의 에제키엘은 성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바빌론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부터 환시를 통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비극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루살렘 멸망의 예고를 남겼다면 에제키엘은 종말에 펼쳐질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면서도 폐허로 끝났던 예루살렘에 세워질 미래의 성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천사는 예언자를 데리고 하느님의 집 어귀로 돌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봅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으로 해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 가는데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들어갑니다. 이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립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에는 땅도 생기를 갖기에 이 강가 이쪽저쪽으로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납니다. 그 과일이 양식이 됩니다.
오늘은 라떼라노 대성전 대축일입니다.
라테라노 가문의 궁전이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 로마 주교에게
넘어간 것이 라테라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in Laterano)의 기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기원후 313여년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라떼라노 궁전과 연결되어 있는 대성당이 실베스테르 1 세 교황에 의해서
‘하느님의 집’으로 선포되는데 그 시기를 기원후 32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가 시작되던 해(1309)까지 약 천 여 년 동안 라떼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역대 교황들이 머문 자리가 되었고 교회 행정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우셨는데(마태 16,18) 역사적으로 그 교회를
첫 번 째로 상징하는 라떼라노 대성전이 보수 개축과정을 거쳐 봉헌되었는데
그 건물을 바치고 있는 12개의 기둥에는 교회의 초석들이 되는 12사도의 조각상들이
그 당시 대표적인 7명의 조각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대성전 중앙 입구에 있는 계단은 물결모양으로 둥근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것은 에제키엘이
환시중에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물이 흘러 아라바를 향하며 사막을 적시고
바닷물을 생수로 바꾸었다는 사상과 연결된다고 보겠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강물처럼 세상으로 흘러 생명을 주는 의미를 또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순례하는 많은 사람들로 도시와 성전 부근이 북적이었던 것입니다.
외국에 있던 사람들은 희생제물로 바칠 가축을 사기 위해서 환전상으로부터 성전 돈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환전상들은 대목을 만나 순례객들을 맞아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환전상을 쫓아내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를 둘러엎으십니다.
이 광경을 보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며 따지는 것입니다.(요한 2,18)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그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도 제자들까지도 이 성전에 대한 이 말씀이 예수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1-22절)
후에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지체인 교우들을 두고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17)
우리는 보통 교회하면 건물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전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던 중앙 성전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것과 서로 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인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이기에 거룩하고 세상이 침범하지
못하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며
공간의 의미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배지에서 성전 대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다시 모입니다.
에즈라 느헤미야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벌이 역사적인 일은 하느님의
성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조차 그들의 뜻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향수로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그 성전의 역할이 세상 각처로 흩어진 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회당과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도 예루살렘 귀환 후에도 그들은 솔로몬에 대한
성전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재건 운동을 벌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북부 이스라엘은 단과 그리짐 산과 남부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갈등을 일으켰는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이 남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그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라고 질문을 하는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과 우리 교회의 대성전도 역사적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러하시고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는 이미 그 성전이
예수님이시며 또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라떼란 대성전 봉헌을 함께 기억하며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거룩하고 새롭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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